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77)
신마의선-377화(377/500)
신마의선 (377)
그때였다.
“지랄 마라, 범계위.”
벌컥.
저 멀리, 총표파자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전각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악호군이었다.
눈썹을 씰룩이는 악호군의 손에는 이미 살기를 진하게 베어 문 한 자루 박도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달아나지도, 숨지도 않는다.”
이미 일전을 치를 각오를 다진 그 모습에 괜히 민망해진 범계위가 쓴 입맛을 다셨다.
“어?”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씨익 웃었다.
“이제 와 잘난 척하기에는 많이 늦지 않았나?”
“뭐?”
“이미 전력이 있잖아.”
의아해하던 악호군은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수하들까지 데리고 무위로 도망쳐 온 놈이 할 말은 아닌 듯싶어서.”
“……!”
차마 반박은 못 하고 붉으락푸르락 얼굴만 붉히는 악호군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지. 한데 오판이었다.”
악호군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로 인해 내 명예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어.”
“과연 그럴까?”
악호군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 있던 범계위가 뭐라 받아치려는 순간.
단악선이 범계위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뇨. 당신은 틀렸어요, 총표파자.”
눈살을 찌푸리는 악호군을 향해 단악선이 말했다.
“저는 이미 봤거든요.”
“……?”
“바닥이라 생각했던 그곳, 그 아래에 존재하는 더 깊은 나락을요.”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악호군이 멈칫했다.
“그 지옥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사람이 바로 총표파자, 당신이에요.”
악호군은 단악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단악선이 말하는 나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웃음을 말아 올렸다.
“흥! 내게 양심의 가책 따위를 기대했다면 헛수고다.”
저벅.
악호군이 단악선과 신마삼존을 향해 다가섰다.
“이제 이 지겨운 악연을 끝내자.”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날 이처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너다.”
“천화표국을 비롯한 상당수의 주요 표국이 통행세를 올리기로 합의했어요. 이제는 굳이 앵속을 재배하지 않더라도 예전만큼의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예요.”
입매를 말아 올린 악호군이 비릿하게 웃었다.
“얌전히 던져 주는 뼈다귀를 받아먹고 꼬리나 흔들라는 거냐?”
“한 걸음씩 양보하면 서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녹림 입장에서도 손해 볼 건 없지 않나요?”
“손해지. 그것도 아주 큰.”
“네……?”
“총표파자라는 감투를 쓰고 있어 깨닫는 게 늦었을 뿐이야.”
악호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우리는 녹림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그 세상이 싫어 산으로 숨은 자들이지. 하지만 적어도 녹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당당했다. 한데 이제 와서 다시 우리가 버린 세상에 굴복하라고?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러기 싫다.”
진정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깨닫는 법.
숨만 쉰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녹림의 정체성.
그건 어떤 재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을 향한 그들 나름의 의지였다.
“당당……이요?”
결국 단악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약탈과 범죄로 쌓은 악명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요?”
“그게 우리 녹림이다.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뿐이지.”
그 대답에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비등점을 넘어섰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죠. 그게 무슨 훌륭한 자랑이라고 뻔뻔하게 떠드시나요? 세상을 포기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양심도 함께 내려놓은 건가요?”
악호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제갈연을 상대했을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말발로는 눈앞의 어린놈을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놈이 혀끝만 신랄하구나. 하나 나는 네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요.”
단악선이 묵룡을 움켜쥐며 앞으로 나섰다.
“신랄한 건 그것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 드리죠.”
“뭐? 설마……?”
“총표파자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무림인의 방식으로 해결을 보죠.”
악호군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네가 날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악호군은 일순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마 단악선이 자신과의 대결을 자처하고 나설 줄이야.
그 순간.
단악선은 돌연 섬뜩한 예기가 가슴팍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단악선이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콰악.
허공을 날아온 한 자루 투박한 칼이 방금 전까지 단악선이 서 있던 곳에 틀어박혔다.
반면 빈손이 된 악호군은 힐난하는 눈빛으로 신마삼존을 노려봤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아무나 나서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래도 나름 강호의 절정 고수인 그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꼬맹이와 칼을 섞을 수는 없는 노릇.
그 순간.
악호군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단악선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온 것이다.
신마삼존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단악선과 손에 들린 묵룡을 확인한 악호군은 내심 어이없어 당혹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악호군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안광이 넘실거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신마삼존의 표정을 확인한 악호군이 섬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 결정, 후회하게 해 주마.”
시선은 단악선에게 향해 있었지만 정작 신마삼존에게 들으라 한 말이었다.
단악선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짙은 살기로 일렁이는 눈빛과 그만큼 위협적인 기파.
거기에 사이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파가 더해지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위험이 느껴졌다.
그러나 단악선은 망설이지 않고 더욱 거리를 좁혔다.
쾌애액.
전면을 아우른 묵빛 그림자가 악호군을 집어삼키던 그 순간.
“조심……!”
누군가의 경호성을 뒤로한 채 전력을 실어 묵룡을 휘두르던 단악선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공을 향해 까닥이는 악호군의 손과 그의 얼굴에 맺혀 있는 비웃음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팟!
단악선의 어깨 부근이 갈라지며 기다란 자상이 시뻘건 입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
화끈한 고통과 함께 단악선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비록 피부가 베인 얕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그대로 팔이 잘려 나갔을 터.
그만큼 배후에서 날아든 칼은 은밀하고도 교묘했다.
범계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기어도(以氣御刀)?”
병장기를 익힌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바라 마지않을 지고한 경지.
단순히 칼을 던지는 비도술 수준이 아닌, 의념을 실어 자유자재로 공격할 수 있어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무공 수법이 바로 이기어였다.
사람 손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은 무기는 인체 구조상 결코 구현해 낼 수 없는 궤적과 변화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범계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호군의 무위가 그 정도였다면 진즉에 천하제일고수로 이름을 날렸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격공섭물을 활용해 이기어를 흉내 냈군.”
한설화의 말에 범계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기꾼 자식!”
반면 초악량은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악호군이 내력으로 회수한 칼과 그의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하는 궤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응용력은 그만큼 상당한 수련을 반복했다는 방증.
아무리 단악선이 성공리에 폐관 수련을 마쳤다 하지만 실력과 경험 면에서 악호군은 아직 버거운 상대였다.
“엇!”
범계위의 입에서 다시금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단악선의 허벅지와 옆구리에서 다시 한 번 핏물이 튀어 오르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피가 번져 벌겋게 물들어 가는 단악선의 의복을 보며 세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악호군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단악선의 결정이었고, 의지였다.
처음부터 말렸다면 모를까, 이미 싸움을 시작한 이상 자신들의 개입은 두고두고 단악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최후의 마지막 순간에는 나서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일단은 단악선 스스로 활로를 찾아 위기를 벗어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나서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단악선의 눈빛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단악선의 상황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고, 겨우겨우 악호군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도 단호하고 굳은 의지를 담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연이어 쇄도하는 무수한 공격을 가까스로 흘려 낸 단악선이 한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악호군이 아니었다.
“죽어라!”
벼락같은 일갈과 함께 악호군이 칼을 내리그었다.
지금까지 억눌렀던 억하심정을 단번에 쏟아내듯, 전력을 실어 낸 일도였다.
단악선도 물러서지 않고 묵룡을 휘둘러 맞부딪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콰앙!
새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튀어 오른 묵룡.
충격을 미처 흘려 내지 못한 단악선의 신형이 그대로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단악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묵룡을 놓칠 뻔했던 것이다.
손안에서 요동치는 묵룡을 겨우 붙들고는 있었지만 이로 인해 호구가 터지며 순식간에 핏물 범벅이 되었다.
새삼 악호군의 무위에 소름이 끼쳤다.
그만큼 악호군의 칼은 단순히 내공과 기교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수많은 상대를 베며 피와 원한을 머금어 온 칼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저릿하게 만든 충격은 그대로 내부를 진탕시키고 있었다.
그 여파로 미처 뱉어 내지 못한 날숨이 기도를 막으며 호흡이 멎을 정도.
깊은 고랑을 새기며 삼 장 넘게 밀려난 단악선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진기를 어떻게든 다스리기 위해 전력으로 위화신공을 운용했다.
그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범계위가 단악선 앞을 막아섰다.
“단 의원. 이제 나한테 맡겨.”
“아직 아니에요.”
“더 이상은…….”
단호하게 말을 하려던 범계위가 입을 다물었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표정.
그것은 무인의 눈빛이었다.
“부탁드려요.”
“어…….”
결국 범계위가 단악선의 기세에 밀려 비켜섰다.
그런 단악선을 향해 악호군이 섬뜩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만용을 부리는 구나. 하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순간 단악선의 눈앞에서 악호군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그는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구름처럼 일어난 유형의 도기가 전면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단악선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때와는 다르다.’
물론 단악선도 생사결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원에서의 상황과 여러모로 달랐다.
당시에는 거듭된 난전으로 전황 자체가 혼란스러웠고, 상대 역시 단악선의 진정한 힘을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전력과 전력을 부딪쳐 겨루는 형태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때.
―새벽녘 잠을 깨우는 계명성(鷄鳴聲)이 미망을 흩어 내니, 하늘에 오롯한 계명성(啓明星)은 오연히 세상을 굽어보는도다. 어제도 오늘도 닭은 울고 별은 그곳에 있나니, 하나는 벗 삼고 하나는 죽장(竹杖) 삼아 그저 나아갈 뿐.
돌연 어디선가 떠오른 시구 하나가 뇌리를 스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언젠가 남궁백이 언급했던 그만의 심득(心得)이었다.
당시에는 어딘가 묘하게 가슴을 울렸지만 진정한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
그런데 지금은 그 안에 담겨 있던 진정한 요체가 벼락처럼 정수리를 관통했다.
“……!”
단악선의 얼굴 위로 기이한 열기가 일렁였다.
심신을 사로잡는 뜨거운 희열과 함께 단악선은 자신도 모르게 덧씌웠던 칼과 족쇄를 부수고 오롯이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래.’
흔들렸던 마음을 바로잡은 단악선이 위화신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위화신공의 진기를 한껏 머금은 묵룡의 무늬가 선명해지며 웅혼한 울음을 토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믿고, 흔들림 없이 나아갈 뿐.’
신검합일(身劍合一).
마음이 가는 곳에 이미 검이 이르러 있으니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했던가.
초식이나 내공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검의 또 다른 형태인 검아일체(劍我一體)의 묘리를 단악선이 자신의 것으로 녹여 내는 순간이었다.
꽈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굉음이 일대를 집어삼킨 것은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