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79)
신마의선-379화(379/500)
신마의선 (379)
악호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명예는 박살 나고 자존감도 바닥을 친 지금보다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헛소리.”
“그건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듣고 나서 판단하시죠.”
어이없단 표정을 짓던 악호군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전 총표파자를 이대로 관아로 압송할 생각이에요.”
“무림의 일에 관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냐?”
“앵속분으로 인한 피해가 무림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요.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죄 없는 양민들이 대부분이었죠.”
단악선이 서늘한 눈빛으로 악호군을 응시했다.
“미풍양속을 해치고 사회 규범을 무너트리는 사건은 관에서도 항상 예의 주시하던 사안이에요. 게다가 이미 증거는 차고도 넘치죠. 흑암방의 주요 인물들을 통해 녹림이 대규모로 앵속을 재배했다는 진술을 확보했으니까요.”
침음하는 악호군을 향해 단악선이 쐐기를 박았다.
“이대로 녹림의 씨를 말려 드리죠.”
“뭐라?”
“저는 관군을 움직일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제 모든 인맥을 동원해 녹림 토벌에 나설 거예요.”
“……!”
“제게 그럴 만한 힘이 없다 생각하시나요?”
악호군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녹림 입장에서는 무림보다 무서운 것이 관의 정예군이었다.
일단 병력 자체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산채들이 위소를 중심으로 훈련을 반복해 온 정규군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만큼 그들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관이 나서면 녹림은 반역자들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나마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일반 백성들도 녹림을 외면할 터.
생필품 구매가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중원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각종 사업권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다.
무엇보다 중원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감시 체계를 벗어날 방법이 전무했다.
지금껏 녹림이 황실과 관부의 인물을 절대 건드리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했다.
관이 움직이는 건 무림인과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악선은 구파일방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눈앞의 소년이 지닌 화려한 인맥을 떠올린 악호군이 내심 욕설을 삼켰다.
산채에 틀어박혀 비축해 둔 식량으로 농성 체제를 갖춘다면 그나마 관군은 어찌어찌 버텨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수 정예로 구성된 고수들이 녹림의 지휘 체계를 무너트려 무력화한다면 방법이 절무한 것이다.
악호군이 나직이 으르렁댔다.
“관을 움직인 사람이 너라는 게 알려지면 너 또한 무림의 지탄을 면치 못할 텐데.”
그 말을 뱉고 나서도 악호군은 내심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기껏 생각해 낸 타개책이 이따위 치졸한 협박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상관없어요. 그걸로 이 땅에서 녹림을 완전히 지워 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해야죠.”
악호군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만큼 일그러졌다.
상황이 이쯤 되니 더 이상 어린놈의 치기 어린 헛소리라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런 악호군을 상대로 단악선은 더욱 압박의 수위를 높여 갔다.
“호송 과정에서의 탈출은 꿈도 꾸지 마세요. 마침 무위에는 동창과 어림친위 소속의 고수들이 파견되어 있으니까요.”
그때였다.
후두둑.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겹게 능선을 오르던 회색 구름이 기어이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는 이내 사나운 폭우가 되어 일대를 집어삼켰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악호군이 자조 섞인 웃음을 말아 올렸다.
들끓던 분노가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오자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식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만약 생사결의 결과가 바뀌었다면?
자신은 단악선처럼 손속의 여유를 남기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 필시 단악선의 죽음으로 귀결되었을 터.
그리되면 녹림은 무위의 사파인들뿐만 아니라 단악선과 친분이 있는 정도 문파들과 개방을 상대해야 했다.
단악선을 추종하는 능소밀 역시 당연히 관아의 위소군을 움직일 터.
이래도 저래도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자신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남아 있다는 정도.
‘어차피 모든 주도권은 놈이 쥐고 있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비를 맞으며 악호군이 희게 웃었다.
과거 악호군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백의 장렬한 죽음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가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진 그의 고귀한 최후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역시 언제든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있었다.
결연한 의지가 일렁이는 악호군의 눈빛.
이를 마주한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생각이 너무 빤히 읽혔기 때문이다.
“총표파자. 당신은 여전히 이기적인 사람이군요.”
“뭐?”
“그 알량한 자존심과 명예. 그게 모든 수하들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나요?”
이어진 단악선의 질책에 악호군이 아연실색했다.
“자신을 위해 남의 고통은 외면하는 이기적인 아집. 지금의 총표파자가 노단양과 다른 점이 뭐죠?”
“……!”
악호군은 한동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자결한다 해도 당신의 죽음은 결코 미화되지 않아요. 오히려 가장 큰 치욕이 되겠죠. 녹림의 멸문을 가져온 마지막 총표파자로 기억될 테니까요.”
결국 참지 못하고 악호군이 소리쳤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의지가 꺾인 악호군의 눈빛을 응시하던 단악선이 다시금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녹림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걸 원치 않는다면요. 이게 마지막 기회예요.”
“…….”
“이 모든 불행을 야기한 당사자인 총표파자께서 책임지고 이번 사태를 수습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단악선이 돌아섰다.
잡아먹을 듯이 악호군을 노려보던 범계위가 마지못해 단악선의 뒤를 따랐다.
초악량과 한설화 역시 마찬가지.
돌아서기 전 그들이 던지고 간 눈빛이 더없이 아프게 악호군의 자존심을 헤집어 놓았다.
멀어지는 단악선.
뿌연 물안개 너머로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악호군은 한숨을 터트렸다.
놈은 이미 자신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어 있었다.
“내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었구나.”
한바탕 비를 뿌려 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악호군의 눈에 감출 수 없는 회한의 감정이 일렁였다.
* * *
무위로 돌아오는 내내 단악선은 말이 없었다.
저만치 앞서 걷는 단악선을 응시하는 범계위 역시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눈빛을 흘리는 범계위의 모습에 초악량과 한설화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하냐?”
슬쩍 건넨 초악량의 물음에 범계위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을 키워 낸 걸지도 몰라서 말이우.”
“괴물? 설마 단 의원을 말하는 거냐?”
초악량의 반문에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단 의원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수.”
초악량이 피식 실소했다.
하지만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웃음이 사라졌다.
“천하의 그 악호군이 그렇게 쩔쩔매는 건 처음 봤거든. 힘으로는 얼마든지 놈을 무릎 꿇릴 수 있지만 단 의원처럼 완벽하게 정신마저 굴복시키는 건 우리도 불가능한 일이잖수.”
“하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궁지에 몰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악호군을 떠올린 초악량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단악선은 자신들이 알던, 마냥 해맑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단순히 무공뿐만 아니라 상대를 설득시키는 언변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단순히 당면한 눈앞의 문제뿐만 아니라 향후 이어지는 큰 그림을 파악하는 놀라운 직관과 혜안을 지닌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만약 자신들이었다면 이처럼 부수적인 피해 없이 오직 악호군과의 일전만으로 사안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벌써부터 혼날 걱정부터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찔리는 게 많은가 보군.”
“뭐?”
발끈하는 범계위를 향해 한설화가 특유의 차가운 미소를 말아 올렸다.
“그때가 오면 내가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봐 주지.”
“……!”
“기대되는군. 한껏 울상을 지을 그 표정이.”
“마녀 너라고 다를 줄 알아?”
“다르지. 누구와 다르게 단 의원에게 밉보일 게 전혀 없거든.”
“나도 없어!”
“그야 모르지. 하루가 멀다 하고 멍청한 짓을 벌이는 데에는 이골이 난 두 사람이니까.”
난데없이 자신까지 싸잡혀 범계위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된 초악량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가만히 있는 난 왜 걸고넘어지는거냐?”
서늘해진 초악량의 눈빛에 한설화가 코웃음을 쳤다.
“대동소이. 어차피 두 사람 다 오십보백보야.”
“뭐라!”
“지금 싸우자는 거지?”
순식간에 맹렬한 살기가 세 사람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다퉜냐는 듯 세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앞서 걷던 단악선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신마곡으로 능소밀이 찾아온 것은 단악선 일행이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나고 나서였다.
“녹림에서 새로운 총표파자를 선출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녹림을 다스릴 새로운 총표파자를 지명한 뒤 악호군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에 단악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단악선의 반문에 능소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악호군이 지명한 차기 총표파자가 꽤나 강경파라는 점입니다. 그는 기존의 녹림을 혁파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겠다 공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죠?”
“와호채의 채주, 전굉입니다.”
초악량과 범계위, 한설화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분명 그날 악호군은 단악선이 준 마지막 기회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한데 자신 못지않은 강경파를 후임으로 지명하다니?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반면 단악선은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요. 총표파자 입장에서는 나름 고심한 끝에 내놓은 방안이었을 거예요.”
영문을 몰라 하는 초악량을 뒤로한 채 단악선이 능소밀을 바라봤다.
“차기 총표파자의 임명식이 언제죠?”
“보름 후입니다. 검단산의 총타에서 개최하는 녹림 총회를 통해 정식으로 총표파자에 오를 계획이라 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단악선의 모습에 능소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제가 시작한 일이니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야죠.”
새로운 총표파자가 대외적으로 향후 녹림의 행보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인 만큼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악호군이 열어 놓은 수습 방안을 온전히 완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제가 부탁드린 일은 어찌 되었나요?”
단악선의 물음에 능소밀이 씨익 웃었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고마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단악선이 신마삼존과 함께 다시금 신마곡을 나섰다.
* * *
녹림 총회 당일.
새로운 총표파자의 즉위를 겸한 만큼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모든 채주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열여덟 명의 채주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그야말로 매우 드문,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금일 녹림 총회가 지니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이미 총표파자직을 내려놓은 악호군을 대신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와호채의 채주, 전굉이었다.
“오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으니 정식으로 녹림 총회를 개회하겠소.”
거령채 전체를 뒤흔드는 그의 음성에 몇몇 채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개중에는 아예 대놓고 조소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비록 한자리에 모였다고는 하나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총표파자께서는 저자를 후임자로 지목한 거지?’
일부 채주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불만.
특히 악호군을 절대적으로 따랐던 채주들은 전굉을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가 녹림 총회를 빌미로 악호군을 압박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개회가 선언된 이후에도 얇은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