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80)
신마의선-380화(380/500)
신마의선 (380)
이대로 녹림 총회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채주들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과 권위로 녹림을 통솔해 왔던 악호군의 빈자리는 그만큼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현재 녹림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자는 악호군이 다음 총표파자로 지목한 전굉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개혁파는 녹림의 재건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신마상단과의 관계를 끊고, 이전처럼 독립적인 녹림의 위상을 회복하자는 그의 주장은 많은 이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반면 악호군을 따르던 이들이 주축이 된 보수파는 그들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하는 대신 현재의 안정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해 입지를 다져 나가자는 것이 최우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거기에 중립을 지키며 상황을 관조하는 온건파까지.
비록 세력은 가장 적었지만 보수파와 손을 잡는다면 개혁파를 넘어서는 세력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새로운 총표파자를 꿈꾸는 전굉 입장에서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오만…….”
넌지시 운을 뗀 전굉이 회의장 안을 가득 메운 채주들을 한 사람씩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금일 녹림 총회의 가장 중요한 사안은 새로운 총표파자를 선출하는 것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굉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좌중을 향해 내보였다.
악호군에게 받았던, 총표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묵철패였다.
술렁이는 채주들의 면면을 확인하던 전굉이 슬쩍 웃음을 말아 올렸다.
아무리 총표파자의 자리가 채주들의 합의를 통해 선출되는 직책이라 하나 정통성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
전임자의 인정을 받은 그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총표파자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전 채주의 말이 사실인지 그분께 직접 들어야겠소.”
눈살을 찌푸린 전굉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악호군을 따르던 보수파.
그들을 이끌고 있던 복우채의 채주 담가진과 시선을 마주한 전굉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총표파자께서는 이미 은퇴를 선언하고 야인으로 돌아가셨소.”
“그렇다면 총표파자께서 전 채주를 후임자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소?”
“여기 그분께서 직접 작성하신 서한이 있소.”
“으음…….”
전굉이 건넨 서신을 받아 진위 여부를 확인한 담가진이 낮게 침음했다.
달리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악호군의 필체가 분명했고, 내용 역시 전굉이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총표파자의 지위는 승계를 통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오. 설사 총표파자께서 전 채주를 지목하셨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소.”
담가진의 반박에 전굉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 역시 우리 녹림의 전통을 무시할 생각은 없소.”
녹림은 산채들의 연합.
따라서 모두를 통솔할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과반이 넘는 채주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전굉이 선뜻 담가진의 말에 동의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미 자신이 과반 이상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진행하는 것이 어떻소?”
전굉이 주위를 둘러보며 재차 물었다.
“혹시 이 자리에 새로운 총표파자 후보로 나설 분이 계시오?”
자신감 넘치는 전굉의 눈빛과 태도에 담가진은 내심 한숨을 흘렸다.
이 자리에서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의 채주는 고작 넷.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다면 선출될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과연 저들이 전굉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할까 싶었다.
무엇보다 보수파와 온건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악호군이 녹림을 다스리던 시절, 가장 차별과 괄시를 받던 자들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악호군이 총표파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지닌 압도적인 무공 때문이었다.
그는 인덕으로 수하들을 다스리는 부류가 아니었고,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그러나 지리적 여건상 다른 산채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와호채를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악호군도 그들을 다룰 때는 나름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온건파는 상대적으로 중원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에 녹림 전체에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다.
이 때문에 항상 불합리한 결정을 떠안아도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손해를 감수해 왔던 역사 때문이라도 그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리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소?”
전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는 나 혼자이니 찬반만 가리면 될 것 같구려. 자, 그럼…….”
“잠깐.”
전굉의 말을 자르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
가장 변방에 위치해 있는 거웅채의 채주, 임철령이었다.
대표적인 온건파인 그가 이처럼 직접 나설 줄은 몰랐기에 전굉조차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찬반을 가리기에 앞서 전 채주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그 말에 전굉은 고개를 돌려 담가진 쪽을 바라봤다.
‘따로 밀약을 나누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처음에는 보수파와 온건파가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저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굉은 잠시 고민했다.
억지로 밀어붙인다면 투표를 강행할 순 있었지만 임철령은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고로 늙은 생강이 매운 법.
변방의 채주라 하나 그는 누구보다 오랜 세월을 녹림에 몸담았다.
총표파자가 세 번 바뀌는 동안 그는 여전히 채주로서 거웅채를 통솔해 온, 살아 있는 녹림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말씀하시오. 내 선배의 말씀을 경청하리다.”
예의를 갖춘 전굉의 대답에 임철령이 물었다.
“전 채주께서 총표파자로 선출된다면 앞으로 우리 녹림을 어찌 이끌어 갈 생각이시오?”
내심 살짝 긴장하고 있었던 전굉이 안도의 웃음을 머금었다.
“현재의 녹림은 예전의 위상을 잃고 명예 또한 바닥을 치고 있소. 나는 더 이상 이를 좌시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녹림의 본모습을 되찾을 것이외다.”
악호군의 결정으로 인해 내심 불만이 쌓여 있던 개혁파의 채주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놀란 눈으로 임철령을 응시했다.
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희생 없이 녹림이 큰 이득을 얻을 제안이 있다 들었소만?”
멈칫하는 전굉을 향해 임철령이 추궁하듯 재차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 사실은 감추는 것이오?”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전굉의 모습에 채주들의 눈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들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신마상단과 표국 연합에서 우리의 영역과 권한을 존중하는 의미로 전보다 더 높은 상납금과 통행세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들었소. 이와 관련해 신마상단 측과 총표파자 사이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이미 오간 걸로 알고 있소. 총표파자께서 후임자로 전 채주를 지목했다면 분명 이 사실도 언급했을 터.”
웅성.
채주들 사이로 번지는 소요에 전굉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건 이 자리에서 언급할 만한 사안이 아니오!”
언성이 높아진 전굉과 다르게 임철령의 음성은 더욱 차분해졌다.
“사전에 이를 알고는 계셨다?”
“……!”
전굉의 눈에서 차가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내 목소리에 힘을 실어 채주들을 향해 외쳤다.
“물론이오. 그러나 언급할 가치도 없었지.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굴종시키기 위한 저들의 간교한 계략이기 때문이오!”
임철령이 피식 웃었다.
“우리는 이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닌 제공받는 위치요. 어딜 봐도 우리가 저들에게 굴종하는 입장은 아닌 것 같소만?”
“아무리 달콤한 말로 포장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요. 임 채주께서는 지금 녹림의 몰락을 부추기고 계시오!”
“대체 뭐가 문제요? 피를 흘리지 않고 녹림이 성세를 구가할 수 있는 방안이 달리 또 있소?”
쾅.
참다못한 전굉이 탁자를 내리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제 보니 당신은 신마상단의 사주를 받고 이 자리에 온 것이군!”
서슬 퍼런 전굉의 기세에 몇몇 채주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임철령은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쓸모없는 아집에 사로잡혀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은 진정 녹림을 위한 길이 아니요.”
“허튼소리! 그깟 돈 몇 푼에 명예와 자존심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녹림이 아니게 된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이오!”
전굉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 저들의 목적은 하나요. 우리를 돈으로 길들여 저들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협조 세력을 구축하는 것. 달리 말하면 그만큼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의미지.”
“확실하오?”
“물론!”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하는 전굉의 모습에 임철령이 희미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그럼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 봐야겠군.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
영문 모를 말에 전굉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회의장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단악선을 위시한 신마삼존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등장에 가장 크게 당황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전굉이었다.
“이곳은 녹림의 채주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요!”
“전 초대를 받고 왔을 뿐인걸요.”
태연한 단악선의 대답에 전굉이 놀란 눈으로 임철령을 노려봤다.
“설마 당신이?”
임철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초대했소. 향후 녹림의 미래를 결정하는 총표파자를 선출하는 자리인 만큼 그 어떤 의혹도 남겨서는 안 되니까.”
“……!”
찰나의 순간에 전굉은 여러 번 표정을 달리했다.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저들 사이에 이미 사전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온건파를 포섭한 것인가!’
설마 녹림 내부의 보수파가 아닌, 온건파를 회유해 포섭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단악선이 채주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친근한 미소를 건넸다.
“이 중에 몇 분은 저와 안면이 있으시네요.”
한때 무위에 머물렀던 채주들이 나직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대놓고 친한 척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몇 명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런 그들의 호의를 확인한 단악선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무위에서 함께 지냈던 동안 제가 여러분을 속이거나 섭섭하게 했던 점은 없다고 자부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에 어느 누구 하나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이 겪은 무위에서의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우리와 녹림이 서로 상생을 모색할 수 있는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예요.”
단악선의 말에 전굉이 실소했다.
“앵속의 판로를 막은 당사자가 우리를 위한다니, 이거야말로 어불성설 아니오?”
“만약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녹림을 근절시키기 위해 출정한 조정의 관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요.”
“……!”
싸늘해진 좌중의 분위기를 읽어 낸 단악선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자리에 모인 채주님들께 저는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해요.”
단악선이 채주들과 한 명씩 시선을 마주했다.
누군가는 불신의 눈빛을, 또 누군가는 기대가 담긴 눈빛을 건네 왔다.
“신마상단은 녹림에게 기꺼이 보호비를 지불할 의향이 있어요. 이전처럼 통행세나 상납금 명목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보호비요.”
“그게 무슨 뜻이오?”
채주들 중 누군가가 묻자 단악선이 대답했다.
“우리 상단이 녹림의 영역을 지나면 직접 나서서 보호를 해 주세요. 출몰하는 맹수, 혹은 폭우로 갑자기 생겨난 물길이나 산사태, 폭설로 인한 고립 등으로부터요. 누구보다 그 지역에 정통하신 분들이니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어요.”
놀란 눈빛을 주고받는 채주들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악선이 말을 더했다.
“야영을 하던 상행단이 산채에 머무는 걸 허락해 주신다면 더 감사할 테고요. 아예 별도로 숙박이 가능한 곳을 만들어 운영하셔도 돼요. 필요한 재원은 얼마든지 저희 쪽에서 지원할 의향이 있어요.”
이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단악선은 녹림이 진행할 수 있는 사업들을 언급했다.
“녹림이 기존에 앵속을 재배하던 땅의 사용을 허락해 준다면 그곳에 약초를 재배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에요. 토지의 사용료를 포함해 험지를 개간한 보상비까지 포함되어 책정될 테니 금액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예요.”
전굉이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단악선이 제시한 파격적인 제안.
여기에 채주들 상당수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무위에서 지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테죠. 사람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흔들리는 채주들의 눈빛을 확인한 단악선이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