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83)
신마의선-383화(383/500)
신마의선 (383)
“…….”
능소밀이 곤란한 눈빛을 흘렸다.
이 순간만큼은 영순 공주의 호의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황제는 결코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인물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따라붙는 것이다.
그렇게 능소밀이 고심을 거듭하는 사이.
황제의 행렬이 신마의가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외유하는 동안 황제가 정무를 돌보는 행재소(行在所)로 쓰일 신마상단.
신마의가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신마의가의 정문 앞에는 어느새 단악선이 황제를 기다리며 부복하고 있었다.
단악선을 발견한 황제가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짐이 머물 행재소로 오라. 내 너에게 따로 전달할 휘음(徽音)이 있노라.”
휘음은 황제가 내리는 지시 사항인 전교(傳敎)를 달리 이르는 말.
“그리하겠나이다.”
단악선의 대답에 황제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신마상단의 본단에 도착한 황제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근신 환관에게 바람개비를 건넸다.
“잘 보관하도록.”
이를 공손히 받아 들고 물러서던 사례태감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로서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적으로 각국에서 진상하는 온갖 보화 앞에서도 시큰둥하던 황제가 일개 어린 백성의 선물 하나에 이토록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황제의 표정이 밝으니 그 역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영순 공주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천자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격앙가(擊壤歌)로구나.”
영순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로 회자되는 태평성대의 시절.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시찰을 나선 요 임금을 알아보지 못한 백성이 그 앞에서 막대기로 땅을 치며 불렀다는 노래였다.
짐짓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지만 오히려 요 임금은 안심했다고 한다.
그만큼 백성들이 자신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상께서는 요 임금보다 나으세요. 이 땅의 모든 백성으로부터 이렇게 존경을 받고 계시니까요.”
물끄러미 영순 공주를 응시하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대놓고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필시 내게 부탁할 것이 있는 게로구나?”
정곡을 찔린 영순 공주의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가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너라도 조만간 하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영순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됐다. 그래서 언제쯤 황궁으로 돌아올 것이냐?”
잠시 머뭇거리던 영순 공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좀 더 이곳에 머물고 싶어요.”
“그럼 내가 또 이곳을 찾게 될 텐데? 괜찮겠느냐?”
멈칫하던 영순 공주는 이내 황제의 눈에 떠오른 장난기를 읽어 냈다.
“오늘 보셨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무위의 백성 모두에게 영광이에요.”
“궁궐 밖을 벗어나 세상 좀 겪었다고 이제는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생글거리며 웃던 영순 공주는 이어진 황제의 질문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나저나 원하던 것은 얻었느냐?”
“네?”
“네가 마음에 둔 그자 말이다. 그자의 마음은 얻어 냈느냐 묻고 있다.”
“……!”
“그것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것 아니냐?”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어요.”
“……?”
“이곳 무위가 좋아졌거든요. 아이들을 가르치며 얻는 보람도 무엇보다 견줄 수 없는 기쁨이고요.”
의외의 대답에 황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기를 잠시.
“많이 달라졌구나.”
어린 시절 갑자기 달라진 환경은 그녀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고작 열다섯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오라비의 흠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스스로를 제약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원하는 걸 직접 표현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당황한 누이를 향해 황제가 부드러운 눈빛을 건넸다.
“칭찬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구나.”
“황상…….”
그때였다.
“백성 단가 악선이 폐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귀에 익은 근신 환관의 보고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이르라.”
황제가 영순 공주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너를 위한 선물이다.”
“예?”
황제의 의중을 파악한 영순 공주가 얼굴을 붉히는 사이, 단악선이 안으로 들어섰다.
“만세! 만세! 만만세! 미천한 백성 단가 악선이…….”
“되었다. 그저 차나 한잔하려는 것이니 편히 앉도록. 황실의 예법은 잠시 잊으라.”
손을 들어 단악선을 제지한 황제가 영순 공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네가 우린 차를 맛보고 싶구나.”
영순 공주가 차와 다기를 준비하는 동안 황제가 단악선을 향해 물었다.
“최근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자들을 소탕했다지?”
“네. 모르면 몰랐을까, 저들의 패악을 알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까요.”
“짐이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했구나. 혹 원하는 바가 있느냐?”
“포상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닌걸요. 그저…….”
“그저?”
“의원으로서…… 아니, 의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에요.”
말없이 단악선을 응시하던 황제가 슬쩍 입매를 말아 올렸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소년이었다.
황태후께서 그토록 칭찬하는 데에는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끼는 혈육의 배필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상대는 찾아보기 어려울 터.
“그럼 이건 어떠냐?”
황제의 눈짓을 받은 사례태감이 품속에서 봉서 하나를 꺼내 단악선 앞에 내려놓았다.
“내용을 확인해 보라.”
황제의 지시에 단악선이 봉서를 열어 그 안에 곱게 접혀 있던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단악선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봉서 안에 담겨 있던 서류는 하나같이 일관된 내용이 적힌, 일종의 진술서였기 때문이다.
“그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와해된 흑암방의 잔당들을 추포하는 과정은 관이 담당했다.
그리고 그들을 심문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문제 하나가 불거졌다.
진술서의 내용을 확인한 단악선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자리 잡았다.
“남궁세가에서 앵속분을 구입했다고요?”
황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사 결과에 확신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단악선 역시 달리 반박하고자 물은 것이 아니었다.
황제 직속 특무 기관인 금의위와 동창.
그들이 지닌 다양한 심문 기술과 정보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듣자니 남궁가와 인연이 있다 들었다.”
황제의 말에 단악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관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고 이처럼 언질을 주는 것만으로도 단악선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을 위한 황제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때마침 영순 공주가 우려낸 차를 따라 황제에게 올렸다.
“좋군.”
잠시 다향을 음미하던 황제가 한 모금의 차로 입술만 축인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먼 길을 왔더니 피곤하군. 나는 좀 쉬어야겠다.”
“벌써요?”
당황한 영순 공주를 뒤로한 채 황제가 단악선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 누이가 정성을 다해 우린 차이니, 그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자네라도 남아 좀 더 마셔 주게.”
이후 황제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자리를 떠 버렸다.
황제가 사라지자 영순 공주가 단악선을 향해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차 맛이 기대되는걸요.”
영순 공주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단악선과 따로 자리를 가지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식의 만남을 바란 건 아니었다.
황실의 권위를 빌리고자 했다면 그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단악선의 말에 영순 공주가 살짝 눈을 흘겼다.
“무심했던 건 아시나 봐요?”
“그게…….”
“질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미소 지으며 차를 따라 단악선에게 건네는 영순 공주였다.
“잠시 차를 즐기는 동안만이라도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세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영순 공주는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노력은 단악선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차를 음미하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훌륭해요.”
이후 몇 번이나 이어진 칭찬에 더욱 신이 난 영순 공주는 환관들을 닦달해 온갖 명차들을 가져오게 했다.
덕분에 단악선은 중원 전체에서 생산되는 명차들을 한자리에서 맛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신마상단 건물 밖에서는 묘한 대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단악선과 함께 온 신마삼존.
그 맞은편에는 황실 내 최고 고수로 손꼽히는 다섯 명의 어림친위가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눈빛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게 눈에 힘주면 없던 내공이라도 생기나?”
기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농담을 건네는 범계위의 모습에 무관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계위가 히죽 웃으며 그들을 도발했다.
“왜? 열 받아? 그럼 이 자리에서 한판 붙든가.”
보다 못한 초악량이 범계위를 제지했다.
“적당히 해라.”
“걱정 마슈. 절대 내가 먼저 손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계위가 진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난데없이 들이닥친 어마어마한 기파.
이를 정면에서 맞닥뜨린 어림친위들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반사적으로 무기를 움켜쥐는 순간.
“……!”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자리 잡았다.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 오던 기파가 돌연 종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흐흐. 왜 그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얄밉게 이죽거리는 범계위의 도발에 비로소 놀림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무관들의 눈빛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그중 선두에 선 사내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 번은 넘어가 주지. 하나 명심하도록. 두 번의 자비는 없다.”
“안 그래도 되는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상대를 향해 범계위가 살살 꼬드겼다.
“솔직히 니들도 한판 붙고 싶잖아. 아니야?”
그들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호승심을 읽어 낸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건물 내부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와 범계위와 대치하고 있던 어림친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한 차례 범계위를 노려보던 어림친위들이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황제가 자리를 옮겼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서둘러 지정된 위치로 각자 흩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범계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쩝. 아깝네. 조금만 더 긁으면 넘어올 것 같았는데.”
초악량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요새 대체 왜 이러냐? 왜 보는 사람마다 시비를 못 걸어 안달이야?”
“에이 씨! 몰라, 나두!”
벌컥 역정을 내는 범계위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한설화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화령이 때문이군.”
그 말에 범계위가 움찔했다.
“화령이랑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어진 초악량의 물음에 범계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영문을 모르겠수.”
풀 죽은 표정으로 괜히 애꿎은 바닥만 걷어차던 범계위가 재차 한숨을 터트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요즘 나를 멀리한단 말이야.”
“잘못한 거 없는 게 확실해?”
초악량의 반문에 범계위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은 너도 자신 없지?”
이어진 초악량의 다그침에 범계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서 물어봐. 괜히 엉뚱한 데 화풀이하지 말고.”
“그럴까? 그게 낫겠지?”
“애초에 그랬어야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이던 범계위가 신마곡 쪽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