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03)
신마의선-403화(403/500)
신마의선 (403)
만년설을 이고 길게 늘어선 산맥.
그 장엄한 경관을 뒤로한 채 우뚝 서 있는 포달랍궁은 더없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장엄한 노을이 아닌, 흥건한 피가 붉은 석벽을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달랍궁은 달리 납살성(拉薩城)이라 부를 만큼, 궁전보다는 실제로도 요새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어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마교의 전력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습격을 인지하자마자 라마승들이 황급히 성문을 닫아걸었음에도, 마인들은 순식간에 해자를 넘어 벽을 타고 올라왔다.
하나같이 소름 끼치는 마기를 흘려 대며 닥치는 대로 살수를 펼치는 백여 명의 마귀들.
난데없는 기습에 성지(聖地)를 유린당한 라마승들이 곳곳에서 분전해 맞섰다.
그러나 한번 기울어진 전세를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보고를 받은 달뢰라마가 수좌승들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섰을 때는 이미 눈앞에 거대한 지옥도가 펼쳐진 뒤였다.
“……!”
달뢰라마의 눈 위로 진한 아픔이 번져 갔다.
비단 이곳 포달랍궁에는 라마승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녀자를 비롯해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노인들도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피에 굶주려 살의에 몸을 내맡긴 악귀들에게는 이를 구분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닥치는 대로 눈앞의 생명을 도륙하며 아비규환의 참극을 빚어낼 뿐.
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마른 짚에 불이 옮겨붙듯 순식간에 피해가 불어나고 있었다.
“옴 마 흐리히!”
달뢰라마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쩌렁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마귀들은 참회하라는 의미가 담긴 창노한 꾸짖음이었다.
“큽!”
“컥!”
달뢰라마를 향해 달려들던 몇몇 마교도가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웅혼한 내력이 담긴 사자후(獅子吼)가 통렬하게 내부를 진탕시키고 기맥마저 뒤흔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마인들은 그저 잠시 멈칫하며 눈살을 찌푸렸을 뿐, 이내 계속해서 피의 축제를 이어 갔다.
달뢰라마의 전신에서 황금빛 서기가 뿜어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나 달뢰라마의 이름으로 금일 살계(殺戒)를 허하노니!”
곳곳에서 진언으로 화답하는 라마승들을 향해 달뢰라마가 호령했다.
“지장보살조차 고개를 돌려 외면할 저 마귀들을 억만 겁 윤회의 길로 인도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뢰라마 뒤에 시립해 있던 수좌승들이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당혹감에 더해진 공포.
이에 내몰려 달아나듯 연신 물러서던 라마승들의 눈빛이 어느 순간 달라졌다.
패색이 짙던 그들의 눈빛에 결연한 각오가 자리 잡은 것이다.
밀교 금강종의 비전 절예.
용상반야공(龍象般若功)이 담긴 달뢰라마의 항마진언(降魔眞言)이 일대에 울려 퍼진 것도 그때였다.
“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게송(偈頌)의 형태를 빌린 보회향진언(普廻向眞言).
모든 악한 마귀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는 뜨거운 울림에 라마승들도 화답했다.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바탁.”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게송에 힘을 얻어 위축되었던 기세가 살아났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
달뢰라마의 존재 유무는 그만큼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열세를 뒤집고 팽팽하게 맞서는 라마승들.
이를 확인한 달뢰라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포달랍궁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공 자체가 마공의 상극인 반마공(反魔功)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교가 감히 이곳을 넘볼 수 없던 이유이기도 했다.
저들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크게 흔들렸을 뿐.
더구나 이곳에 상주하는 무승들은 팔백여 명에 이르렀다.
마교가 총력을 기울여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소수의 인원만을 동원했다면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대응하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크아악!”
처음으로 마인들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를 확인한 달뢰라마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옴 이데리니 사바하!”
답살무죄진언(踏殺無罪眞言).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허락이었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마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꽈앙!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포달랍궁을 뒤흔든 것도 그때였다.
단단히 닫아걸었던 포달랍궁의 정문이 경첩째로 뜯기며 갈가리 찢겨 나갔다.
사방으로 튀어 오른 나뭇조각과 못이 암기처럼 일대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를 목도한 달뢰라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대체 무슨 심산으로 고작 백 명 남짓한 인원으로 쳐들어왔나 싶었는데, 저들에게도 무리를 이끄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달뢰라마의 신형이 곧장 그곳으로 쇄도했다.
우두머리를 쓰러트려 상대의 전의를 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달뢰라마는 상대가 결코 얕볼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을 응시하는 상대의 눈빛.
그 안에서는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달뢰라마가 극한까지 용상반야공을 끌어 올렸다.
몇 겹으로 중첩되어 더욱 짙어진 금광이 그를 에워쌌다.
하나의 거대한 강기 덩어리 자체로 화한 달뢰라마가 그대로 상대를 들이받았다.
꽈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금빛 편린.
그 사이로 무언가를 발견한 달뢰라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천마?”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상대였지만 그 이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인세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이질적인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강마벽(天降魔壁)!’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흑색 강기 벽은 천마의 독문무공이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상대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강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것도 잠시.
말없이 달뢰라마를 응시하던 종극진이 조용히 웃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활불(活佛)이라 불린다지?”
달뢰라마의 눈 위로 충격이 번져 나갔다.
전력을 기울이는 자신과 달리 상대는 말을 건넬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더구나 반마공의 성질을 지닌 자신의 황금빛 강기가 반투명한 묵빛 장막에 가로막혀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달뢰라마가 탄식을 삼켰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실로 간단한 이치였다.
한 바가지의 물로는 산불을 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제아무리 마공의 상극인 반마공이라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위력을 지닌 마공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강기 벽 너머에서 돌연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
마치 검은 불꽃처럼 허공에서 일렁이던 아지랑이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타오르는 악귀의 형상으로 현현했다.
치이익!
자신의 금빛 강기 벽을 뚫고 천천히 파고드는 악귀의 손을 목도한 달뢰라마가 필생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푸욱.
한순간 형태를 달리한 악귀의 손이 살아 있는 촉수처럼 꿈틀대더니 그대로 달뢰라마의 가슴을 꿰뚫었다.
주룩.
달뢰라마의 입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어떻게……?”
“그동안 우리도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니까.”
달뢰라마의 경악성에 종극진의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반선공(反仙功). 아니, 반선공(反善功)이라 해야 할까?”
“……!”
“사실 뭐라 부르든 상관없지. 중요한 건 도가와 불문에 기반한 정종무공과 상극이라는 점이니까.”
종극진이 더없이 흡족한 눈빛을 흘렸다.
마침 좋은 본보기가 눈앞에 있었다.
콰악.
사방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강기가 달뢰라마의 전신을 관통한 건 그 직후였다.
종극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크흑!”
전신의 요혈을 관통당한 달뢰라마의 신형이 허공으로 들려 올려졌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오장육부를 지져 대는 끔찍한 고통에도 달뢰라마는 정신을 집중해 어딘가로 전음을 날렸다.
종극진이 불쑥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궁금하군.”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종극진이 싸늘하게 웃었다.
“과연 눈앞에서 사지가 찢겨도 저들이 여전히 당신을 활불로 칭송할지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종극진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달뢰라마의 몸을 꿰뚫은 채 너울대던 강기가 한 차례 꿈틀하는 순간.
달뢰라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누따라삼약삼보디…….”
불가에 귀의한 이래 끊임없이 추구해 온 지고한 가치, 보리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짧게 읊조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달뢰라마의 신형이 자욱한 피 안개로 화해 흩어졌다.
달뢰라마의 목숨을 거둔 종극진이 오만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서 정신적 지주를 잃었기 때문일까.
충격으로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하게 불호를 외는 라마승들의 모습과 그런 그들을 너무나 손쉽게 베어 넘기는 교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극진은 크게 관심 없다는 듯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청해성 방향이었다.
“다음은 곤륜이군.”
종극진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그들을 지워 내면 놈들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겠지.”
* * *
“지독하군요.”
발밑에 널브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마인.
이를 내려다보던 단악선이 짧게 진저리를 쳤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마교의 동귀어진 수법인 역혈대공(逆血大功)을 펼친 상대였다.
그리고 이제는 역혈대공을 사용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역혈대공은 진기를 역행시켜 선천지기와 잠력을 동시에 격발하는 수법.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내력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시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결국 이렇게 주화입마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윽고 눈앞의 마인이 숨을 거두자 단악선이 말없이 상대의 백회혈에 꽂혀 있던 침을 회수한 뒤 신형을 일으켰다.
“가죠.”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는 단악선의 차가운 눈빛에 가두달이 움찔했다.
반면 한설화는 그런 단악선의 모습에 내심 우려를 금치 못했다.
천천히 단악선 곁으로 다가선 한설화가 진기를 끌어 올렸다.
갑자기 전신을 뒤덮는 냉기에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어진 한설화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을 다스려라. 머리도 좀 식히고.”
단악선이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봤다.
달리 지친 기색은 없었지만 오랜 여정으로 상당히 꾀죄죄했다.
그나마 한설화만이 처음 그대로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일행은 마교의 거점들을 하나씩 무너트리며 조금씩 신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목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마인들의 무공이 높아지고 있었고, 반격도 격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쪽에 녹주(綠州)가 있던데, 좀 씻고 갈까요?”
“그럴까?”
단악선의 말에 범계위가 반색했다.
이곳은 대부분이 사막 지대였지만 저 멀리 보이는 녹주처럼 드물게 지하수가 고여 형성된 못도 존재했다.
녹주에 도착한 직후.
갑자기 범계위가 단악선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곤 그대로 신형을 날려 녹주 안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높이 솟구친 물보라 사이로 흠뻑 젖은 단악선이 당황한 눈으로 범계위를 올려다보았다.
“왜 갑자기?”
“으하하! 시원하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단악선이 이내 범계위를 따라 웃었다.
“네. 무척이나요.”
“걸리적거리는 옷은 다 벗어 버려. 내가 나중에 다 말려 줄 테니까.”
“네? 하지만…….”
한설화 쪽을 힐끔한 단악선이 뭐라 하기도 전에 이미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는 범계위였다.
그 모습에 한설화가 한껏 아미를 찡그렸다.
“저 미친놈이?”
쩌적.
“으헉! 야! 마녀! 멈춰!”
순식간에 녹주를 뒤덮는 얼음을 발견한 범계위가 당혹성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단악선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초악량의 얼굴 위로도 비로소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신마곡을 나선 이후.
무심한 표정 너머로 애써 감추고 있었을 뿐, 단악선의 본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