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19)
신마의선-419화(419/500)
신마의선 (419)
오대세가는 이번 회의에 그 어느 곳도 참석하지 않았다.
무림맹 사태로 인해 현재 그들 대부분은 봉문한 상태.
그 여파에서 벗어나 봉문의 책임을 지지 않은 곳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향한 강호의 곱지 않은 시선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가급적 대외 활동을 자제하며 굳게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하물며 그 모든 사태의 책임자인 제갈연의 출신 가문인 제갈세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중원 무림의 온갖 지탄에 시달린 제갈세가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단절한 채 스스로를 위리안치(圍籬安置) 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단악선은 일부러 늦은 밤에 제갈세가를 방문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접견 요청을 하면서도 단악선은 내심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가주는 단악선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시 말엽.
이미 사위는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제갈세가에 도착한 단악선은 곧장 깊숙한 내원으로 안내를 받았다.
수많은 전각 중 유일하게 불을 밝힌 서재.
그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제갈경이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단악선과 신마삼존에게 상석을 내어 준 제갈경이 미리 준비한 차를 건넸다.
그간 마음고생이 상당했는지 무척이나 초췌한 안색이었다.
“중원 무림과 역사를 함께해 온 신기제갈. 지자(智者)의 총본(總本)을 방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악선이 건넨 인사에 제갈경이 쓰게 웃었다.
“당금 강호의 중심에 선 신마의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불민한 이 사람은 감히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제갈세가를 괜히 무천종식(貿遷種植)이라 표현할까요.”
말 그대로 음악과 바둑, 서예와 회화, 의술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혜.
당금 강호의 그 누구도 감히 제갈세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특히 귀가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온 의술은 중원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기회가 된다면 귀가를 방문해 보고 싶었고요.”
제갈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의술에 관해서만큼은 당금의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단악선의 위상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악선과 제갈연 사이의 깊은 악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단악선은 제갈연과 세가를 동일 선상에 두지 않고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호의를 지니기에 충분했다.
“차 맛이 좋네요.”
음미하던 차를 내려놓은 단악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먼저 사과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사과라니요?”
당황한 제갈경을 향해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
“제 의술과 인덕이 부족해 지난날 남궁세가의 가주님을 막지 못했어요.”
단악선이 남궁호를 언급하자 제갈경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제갈경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본 가가 쌓은 업보이거늘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겠소이까. 그리 따진다면 의당 폐가가 먼저 신마의선에께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제갈경이 단악선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소. 여식을 잘못 키워 강호를 도탄에 빠지게 했으니 이 못난 사람은 그저 유구무언일 뿐이외다.”
단악선은 흔쾌히 제갈경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제갈경이 멈칫했다.
“모든 제갈세가의 사람이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빠진 중원을 위해 기꺼이 음지에서 자신을 헌신하는 영웅도 계시죠.”
“산이……. 그 아이의 일을 알고 계셨소?”
“최근에 이화궁주님을 만났어요.”
제갈경이 씁쓸하게 웃으며 복잡한 눈빛을 흘렸다.
그러기를 잠시.
“바꿀 수 없다면 나서지 않는다. 하나 제갈의 이름을 걸고 나섰다면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운을 뗀 제갈경이 회한 어린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게 제갈세가의 이념이었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후세에도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전해 주고 싶었지. 오직 민초를 위한 삶. 그것이 제갈이란 성을 물려받은 인간들의 존재 이유라 믿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두 녀석이 그리 극과 극의 다른 선택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가르침이 잘못되었던 모양이오.”
“셋째 아드님의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처음에는 알지 못했소.”
제갈경이 복잡한 눈빛을 흘렸다.
“마교 쪽에서 전언을 보내오기 전까지 말이오.”
단악선이 놀란 눈으로 제갈경을 바라봤다.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주의 혈육을 인질 삼아 제갈세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터.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했소.”
“그렇다면 어째서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으신 건가요?”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서였소. 그 숭고한 뜻을 욕되게 할 순 없는 일이니까.”
누구보다 뛰어난 머리와 신산효재(神算曉才)의 재능을 지녔다 알려진 제갈산이었다.
그런 셋째 아들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면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약 그것이 그토록 무모한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진즉 두 팔을 걷어붙이고 말렸을 것이오.”
단악선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분을 차기 가주로 공표하신 거였군요.”
제갈경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미우나 고우나 자식은 자식인 법이라오.”
제갈경은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제갈세가의 차기 가주라면 아무리 무자비한 마교라도 그 가치를 감안해 섣불리 죽이지는 않을 터.
당시에는 그것만이 아들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주로서는 한없이 냉혹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아비로서 가슴 절절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단악선은 차마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단악선이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큼은 그분의 헌신과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할게요.”
“혹시 만약…….”
무언가 말을 하려던 제갈경이 이내 자조 섞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차마 먼저 꺼내지 못한 그의 마음을 단악선이라 해서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아들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제갈경은 구차한 부탁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것이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듯 싶소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경청하리다.”
“진법에 관한 가르침을 얻고 싶어요.”
제갈경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진법…… 말이오?”
모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한 제갈세가의 지식은 점성술과 천문학, 관상과 공예를 비롯한 원예에도 탁월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른 분야가 바로 진법이었다.
사실 진법이야말로 제갈세가의 그 모든 지혜의 총화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단악선은 제갈세가 안으로 들어서며 내부 곳곳에 설치된 진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온갖 형태를 망라한 진법들은 진법에 대한 그들만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하나 제갈경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법에 관한 지식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어 드릴 수 있소. 하지만 그 진정한 요체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외다.”
무공과 비슷하게 진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 초를 익힌 자는 두려워할 필요 없으나 일 초를 깨우친 자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격언대로, 깊은 깨달음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방대한 지식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지난하다는 것도 무공과 비슷했다.
“대략적인 운용 방법이라면 약간은 알고 있어요.”
단악선의 대답에 제갈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얄팍한 지식에 의지해 그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의 우를 저지르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나 흔했다.
그리고 진법이 대표적인 예였다.
묵묵히 일어선 제갈경이 서가 한 곳에 꽂혀 있던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러자 복잡한 그림과 함께 팔괘를 비롯한 상징적인 기호와 깨알같이 적인 주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 가의 진법 중 가장 기초적인 뼈대가 되는 팔진도(八陣圖)라오.”
제갈세가의 초대 가주였던 제갈량.
그가 사용했단 전해지는 전설전인 진법(陣法)이었다.
본래 그 형태는 태고(太古) 시대로부터 비롯되었으나 풍후(風后)와 손자(孫子), 오기(吳起)와 같은 걸출한 천재들을 거쳐 오다 결국 제갈량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유명한 진법이었다.
실제로 제갈량은 이를 이용해 불리한 전황을 몇 번이나 뒤집어 승리를 거머쥔 적이 있었다.
“아! 이거라면 전에도 본 적이 있어요.”
한때 중원을 유람하던 시절 단악선은 어복현(魚復縣)의 영안궁(永安宮)에 위치한 남강탄(南江灘) 근처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과거 제갈량이 병사들을 훈련했다는 팔진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협(夔峽)에서도 본 적이 있고요.”
기협은 양자강 삼협(三峽) 어귀에 있는 구당협(瞿塘峽)의 다른 이름.
그곳에도 과거의 팔진도의 유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니 설명이 쉽겠구려.”
한 모금의 차로 입술을 적신 제갈경이 눈앞에 펼쳐진 화폭의 곳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팔진은 원래 황제(黃帝)의 신하 풍후가 지은 여덟 가지 형태의 병진(兵陣)이오. 원래는 천(天), 지(地), 풍(風), 운(雲), 호익(虎翼), 사반(蛇蟠), 비룡(飛龍), 조상(鳥翔)으로 구성되어 있었소. 여기에 본 가의 초대 조사이신 무후께서 변형을 가해 동당(洞當), 중황(中黃), 용등(龍騰), 조상(鳥翔), 연횡(連衡), 악기(握奇), 호익(虎翼), 절충(折衝)의 형태로 탈바꿈시킨 것이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은 사기(四奇)와 사정(四正)을 가리키는 것이죠? 네 가지 짐승을 상징하는 것이 사기고, 나머지 네 개의 진형이 사정이고요.”
단악선의 대답에 제갈경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단순히 아는 것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요체를 깨달은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
“그렇소. 천지풍운을 사정으로 삼고 용호조사를 사기로 삼으니, 그래서 여덟, 팔진이오. 늘 두 개의 진(陣)이 서로 상응해 따르는데, 가장 외부의 일진의 안에는 또 두 개의 진이 있어 한편으로는 전투하고 한편으로는 수비하는 식이오.”
“두개의 진법이 서로 상응한다고요?”
단악선은 문득 신지 외부의 진법과 천마가 머물던 전각을 감싸고 있던 이중 진법을 떠올렸다.
“그걸 각각 천지와 풍운이라 하오.”
제갈경이 진법의 운용원리를 최대한 풀어 설명했다.
“정(正)은 적과 대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접전하는 것이고, 기(奇)는 매복하거나 습격하는 등 속임수를 쓰는 것이오.”
유심히 팔진도를 응시하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天陣)은 건(乾)에 해당하는 천문(天門)이 되고, 지진(地陣)은 곤(坤)에 해당하니 지문(地門)이 되겠군요.”
“……!”
제갈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의원인 줄 알았던 단악선이 진법에도 이토록 조예가 뛰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풍진(風陣)은 손(巽)에 해당하는 풍문(風門)이 되고, 운진(雲陣)은 감(坎)인 운문(雲門)이 될 테고요.”
“여기서 한 번 더 변화를 주면 천지(天地)의 전충(前衝)은 호익(虎翼)이 되고, 풍(風)은 똬리를 튼 뱀처럼 사반(蛇蟠)의 형세를 이루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호랑이와 뱀이 서북에 위치하는 거군요? 음(陰)을 우선하여 오른쪽으로 삼아 앞서가고, 또 바람은 호랑이를 따르니까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한 제갈경이 서가에서 한 아름의 두루마기를 꺼내 탁자 위에 와르르 쏟았다.
윤회진(輪廻陣)을 시작으로, 화전기진(花田奇陣)과 만상기연혼무진(萬象起然混霧陣), 거기에 태극건곤환상진(太極乾坤幻象陣)과 대혼천진세(大混天陣勢).
마지막으로 범자연환진(梵字連環陣)과 육합귀문진(六合鬼門陣)까지.
단악선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제갈경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단악선이 진짜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제갈경의 눈빛.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그 안에서 일렁이는 섬뜩한 무언가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