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20)
신마의선-420화(420/500)
신마의선 (420)
“후우…….”
이 순간에 심취한 나머지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가던 제갈경이 힘에 부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세 시진이 지난 뒤였다.
다양한 온갖 진법의 구조와 운용 원리를 하나씩 설명해 나가던 제갈경은 금세 이해하고 따라잡는 단악선의 비범한 재능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 과정 자체가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고 심력을 소모하는 터라 몹시 지치고 피곤했다.
하나 당장 느끼는 놀라움과 희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수집해 온 방대한 자료와 이를 통해 갈고닦아 얻은 지혜가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보다는 보람이 더욱 컸다.
그만큼 진법은 가르치고 싶다 해서 가르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서로의 재능과 인연이 뒷받침되어야 전수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렇게라도 강호 무림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단악선이 잠시 눈을 감았다.
제갈경에게서 전수한 진법 이론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뜨고 제갈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혹시…….”
제갈경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어질 단악선의 말을 기다렸다.
“이런 형태의 진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단악선이 붓을 들어 특정 진법의 대략적인 형태를 그려 나갔다.
“이건……?”
단악선이 그려 나가는 그림을 응시하던 제갈경의 눈빛이 어느 순간 격하게 흔들렸다.
비록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변화의 현묘함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설마 이건 무불능요(無不能要) 탁요신의?”
시서금화(詩書琴畵)를 비롯해 건축과 기문 둔갑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주가 하늘에 닿아 있다 전해지던 불세출의 천재.
그중에도 혼천미리암진(混天迷理暗陳)이라 불리는 기환진(奇幻陳)은 그가 최후에 남긴 역작이라 알려져 있었다.
“역시 비슷한가 보군요.”
단악선은 신지에서 경험한 진법 역시 탁요신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신지에 설치되어 있던 진법이에요.”
단악선은 그 안에서 직접 겪었던 바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처음으로 제갈경이 난색을 드러냈다.
진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계산하길 잠시.
제갈경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본래의 형태를 뒤집은 역괘(易卦)의 흐름을 지닌 것이 아닐까 싶네만.”
함께한 시간이 제법 길었던 만큼 제갈경은 이미 단악선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역괘요?”
“그조차도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이 아닐 수도 있네.”
“그렇다면 이 부분의 변화를 유도해 진법의 성질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가요?”
“……그리하면 생문 자체가 사라질 터인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군요.”
여러 가능성을 상정해 두고 대화를 이어 가길 한참.
“귀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단악선의 인사에 제갈경이 머쓱한 웃음을 건넸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덕분에 나 역시 새롭게 개안을 하게 되었으니까.”
말없이 서재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설화가 어딘가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단악선은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범계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어나.”
그 말과 함께 한설화가 팔꿈치로 범계위의 옆구리를 찍었다.
퍽.
화들짝 놀란 범계위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호랑이는 대가리를 깨 버리고 뱀은 푹 고아 먹어야지! 어?”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범계위의 모습에 단악선이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 팔진도를 설명할 때부터 이미 졸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며 단악선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에 제갈경은 안타까운 눈빛을 흘렸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방문해 주시게.”
“저 또한 그날을 고대하고 있을게요.”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순간.
제갈경은 결국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의원이 어떻게 이토록 진법에 박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의원이니까요.”
“……?”
“의술에 있어 오행의 흐름과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거든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제갈경이 이내 조용히 웃었다.
분명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갈산 역시 언젠가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의술이야말로 무천종식(貿遷種植)의 극의(極意)가 아닐까 싶다는.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닐세.”
제갈경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아들과 단악선이 만난다면 나이를 떠나 필시 좋은 친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 * *
야심한 밤.
짙은 어둠을 이용해 은밀하게 이동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흑의를 갖춰 입은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런 그를 향해 맞은편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급히 부복했다.
“무위를 떠난 놈들이 속속 난주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척후의 보고에 적발의 사내, 마영기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일렁였다.
“규모는?”
“약 이천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영기가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들이 노리는 곳은 필시 본교의 신지겠지?”
흑의인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좌군과 우군.
각각 백 명으로 이루어진 일 개 대를 이끌고 있던 다른 마존들이었다.
권마 척대광이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덕분에 일이 쉬워지겠군.”
도마 혁련호 역시 자신의 짧고 뭉툭한 칼을 고쳐 쥐며 하얗게 웃었다.
“드디어 이 칼에 피를 먹일 수 있겠어.”
비록 이 자리에 사마존 전부가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전의가 높았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조음서를 본단에 남겨 두고 왔지만 어차피 구대문파 중 그 어느 곳도 자신들의 현재 전력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자신들의 목적은 놈들의 허를 찔러 혼란을 야기하는 것.
무엇보다 이번 계획에는 그들만이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자들은?”
마영기의 물음에 부복해 있던 척후가 급히 대답했다.
“이미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영기가 서늘한 미소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성 너머, 변방의 새외무림(塞外武林).
달리 변황오세(邊荒五勢)라고 부르는 다섯 곳의 세력 중 북해빙궁이 무너지고 살막의 후예인 흑야벌과 혈운사가 궤멸했지만 아직 두 곳이 여전히 건재했다.
바로 야수궁이라고도 불리는 남만의 절대자인 만수산장과 천축유가의 상징인 소뢰음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놈들이 허둥대는 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비웃음 가득한 마영기의 눈빛에 다른 두 마존 역시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 * *
난주에 속속 집결하는 중원의 정예 무인들은 최대한 신속하게 대오를 정렬해 진영을 구축했다.
마교와의 일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주변에는 더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중원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같이 화려한 면면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구파일방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
거기에 사파 고수들의 명성도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나 그들을 이끄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무려 천하오절이었다.
권절이라 불리는 혈수존자 초악량.
살아 있는 소림의 전설인 계율원주 법료.
거기에 적벽화산의 장문인인 화산신검 진명진인과 주광도귀 강위룡까지.
비록 이화궁주인 연옥상은 이 자리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전력만 해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영의 선두에는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초악량이 있었다.
번거로운 자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천하오절이 한자리에 모인 이상 그 또한 얼굴을 비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충 건성으로 대화를 받아넘기던 것도 잠시.
초악량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늘 함께 있어 눈치채는 것이 늦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넌 여기 왜 있냐?”
초악량의 물음에 범계위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저기 마녀도 있잖아.”
“한 누이는 화산파 장문인이 직접 초빙한 손님이고.”
“그럼 난 초 형 손님 하지, 뭐.”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마침 무료하던 찰나에 잘됐다 싶었다.
“내가 왜?”
“뭐?”
당황한 범계위를 초악량이 긁기 시작했다.
“네가 뭐라고 초빙씩이나 하느냐는 거지.”
“……!”
“솔직히 네가 천하오절 사이에 낄 급은 아니잖아?”
결국 범계위가 폭발했다.
“에이 씨! 빌어먹을 천하오절! 이 자리에서 다시 가려!”
그러나 상대는 초악량이었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누구보다 범계위의 약점에 정통한 그였던 것이다.
“맨손으로?”
그 말에 범계위가 움찔했다.
단악선의 묵룡이라도 빌리기 위해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단악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쳇, 별수 없나.”
한숨을 내쉬는 범계위의 모습에 초악량이 슬쩍 웃었다.
이쯤에서 포기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웬걸.
와지끈.
범계위가 갑자기 근처의 수레 하나를 걷어차 박살 냈다.
그러곤 그 잔해 속에서 수레바퀴를 연결하는 거폭(車輻)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런 예상 밖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몇 번 쇠몽둥이를 휘둘러 손안의 느낌을 가늠하던 범계위가 초악량을 노려봤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초악량이 내심 어이없어하던 그 순간.
“범 아저씨!”
귀에 익은 음성에 고개를 돌린 범계위가 반색했다.
“단 의원!”
단악선을 향해 달려가던 범계위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단악선 뒤쪽에 서 있는 사무심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위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긴 왜 왔어?”
범계위의 말에 사무심이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쿠웅.
제법 육중해 보이는 상자를 두드리며 사무심이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넸다.
“그럼 이건 다시 가져갈까요?”
단악선이 환하게 웃으며 범계위를 재촉했다.
“어서 열어 보세요.”
“응? 그래.”
콰직.
범계위의 주먹질 한 번에 상자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툼한 가죽에 쌓여 있는 기다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범계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의 성명병기.
대초자곤이었다.
지금의 망산초자를 존재하게 한 그의 애병이 돌아온 것이다.
대초자곤을 덥석 움켜쥔 범계위가 잠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대초자곤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짤그락.
한적한 곳으로 걸어 나간 범계위가 대초자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콰콰!
난데없는 굉음에 놀란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아졌다.
요동치는 경력을 따라 대기가 울부짖고 땅이 비명을 질러 댔다.
용권풍처럼 휘돌며 일대를 완전히 집어삼킨 거대한 경기의 폭풍.
그 어마어마한 위용에 중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중원에서 죄다 한가락 하는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범계위가 지닌 진정한 실력을 목도하자 모두 질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는 천하오절에 이름을 올린 진명진인도 있었다.
“허……. 망산초자의 무공이 이 정도였다고?”
탄성을 흘리는 그와 달리 나한당주 법료는 일찌감치 예상했다는 듯 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그 순간.
쩔그럭.
범계위가 대초자곤을 들어 초악량을 가리켰다.
“초 형, 덤벼.”
“끄응.”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초악량과 달리 자신감을 회복한 범계위는 벼르고 벼르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늘 이후 천하오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야. 오직 나, 천하일절만 존재할 테니까.”
범계위의 시선이 진명진인과 법료를 지나 강위룡에게 머물렀다.
“이 자리에서 무림의 서열을 다시 정리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