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57)
신마의선-457화(457/500)
신마의선 (457)
하루가 멀다 하고 거의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
그것도 십 년쯤 되다 보니 이제는 해남도의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이가 대다수였다.
반면 범계위는 그런 해남 문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옥 훈련을 한 번 더 해야겠어.’
당사자들이 들었다면 학을 떼며 거품을 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해남 문도들은 자신들을 지그시 노려보는 범계위의 눈빛에 외면할 뿐이었다.
“험험. 그럼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할까.”
“동작 그만.”
괜히 불똥이 튈까 싶어 슬그머니 연무장을 벗어나던 해남 문도들이 범계위의 한마디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범계위가 나직이 으르렁댔다.
“수련을 한 지가 몇 년짼데 아직도 그 모양이야? 어? 이렇게!”
콰앙!
범계위가 주먹을 휘둘러 허공을 후려치자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화염이 번쩍였다.
“이런 식으로 파바박! 하는 식으로 힘을 쓰란 말이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해?”
해남 문도들이 하나같이 곤혹스런 눈빛으로 울상을 지었다.
하늘은 범계위에게 일대종사만이 지닐 수 있는 무공의 재능은 허락했지만 가르치는 재능은 내려 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무공 재능을 선사한 만큼 그 부분은 빼앗아 간 건지도 몰랐다.
아무리 하늘이 늘 공평하다지만 이런 식의 공정함은 바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곤란한 건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또 경치는 거 아냐?’
게다가 상황이 이쯤 되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명을 하다 답답해지면 몸으로 체험하게 해 준다며 상대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를 이미 무수히 목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범계위의 딸이었다.
“아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응? 뭐를 말이냐?”
“그런 식으로 설명하신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요?”
“그럴 리가. 우리 단 의원은 바로 이해해서 곧잘 따라 하던걸?”
“전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린애가 아니에요.”
“설마 이 아비가 우리 소중한 딸에게 거짓말을 할까.”
범계위는 불현듯 단악선이 그리워졌다.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단악선.
굳이 언어라는 수단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악선만이 유일했던 것이다.
어느새 아련해진 범계위의 눈빛에 소녀가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좋아요. 단 오라버니는 천재라 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쳐요.”
어린 시절부터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단악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던 그녀였다.
그러다 보니 만나 본 적 없는 생면부지의 인물임에도 친근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저분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다그치시면 안 되죠. 저마다 주어진 재능은 다른 법이니까요.”
“설마 지금 쟤들 편 들어 주는 거냐?”
“방금 표현도 그래요! 쟤들이라뇨?”
“려화야?”
“왜요?”
“이 아비는 슬프구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왜 내 편은 안 들어 주는 거냐?”
려화라 불린 소녀가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생각해 보세요, 아빠. 저기 동명 아저씨는 저보다 나이 많은 아들이 있어요. 그리고 필중 아저씨는 막내딸이 저랑 동갑이고요! 그런데 아빠 때문에 그 친구들 볼 면목이 없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인지라 범계위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 다르게 그의 딸은 해남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딸은 어쩜 이렇게 똑똑하지? 말로는 당해 낼 수 없구나.”
“엄마 닮았으니까요.”
“…….”
금세 시무룩해지는 범계위의 모습에 범려화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언변 빼고는 전부 아빠를 닮았죠.”
“역시 그렇지?”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순식간에 밝아지는 범계위였다.
천하의 망산초자를 몇 마디 말로 쥐락펴락하는 그 모습에 해남 문도들은 그저 내심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약속하세요. 앞으로 저분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끄응.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저놈들만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서…….”
“또!”
“……저 친구들만 보면 열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다.”
“그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저를 아끼고 보살펴 주신 분들이에요. 아빠가 그럴 때마다 제가 저분들께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한지 아세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지금까지 받아 온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는 게 사람이잖아요.”
“안 그렇던데?”
“네?”
“난 너를 사랑하지만 보답은 바라지도 않았거든.”
예상치 못한 말에 범려화가 크게 당황했다.
“어……. 으음…….”
결국 할 말이 궁해진 범려화는 마지막까지 미뤄 두었던 최후의 절초를 사용했다.
손을 뻗어 와락 범계위의 얼굴을 감싸 안은 것이다.
까칠한 수염에 피부가 쓸려 따가웠지만 범려화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얼굴을 비비며 무서운 애교 공세로 범계위를 흔들어 댔다.
“그냥 제 부탁 들어주시면 안 돼요? 응? 아빠아…….”
온몸을 던진 딸의 부탁에 결국 범계위가 백기를 들었다.
“좋다. 그러마.”
“정말이죠?”
반색하던 범려화는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딸 앞에서는 안 할게.”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때였다.
“려화 너 또 아빠한테 투정 부리는 거니?”
“엄마!”
“아빠는 엄마와 해야 할 용무가 있으시니 그만 놓아주지 않을래?”
장내로 들어서는 벽화령의 모습에 범려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엄만 치사해! 맨날 엄마 혼자 아빠 독차지하고.”
“이미 말했다시피 가가는 엄마 거란다.”
“너무해!”
“억울하면 너도 너만의 가가를 구하려무나. 이 엄마가 네 아빠를 얼마나 힘들게 손에 넣었는지 아니?”
범려화가 발끈했다.
“자꾸 이러면 나도 오늘부터 엄마 아빠랑 함께 잘 거야.”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파고드는 딸을 향해 벽화령이 빙긋 미소지었다.
“그러려무나.”
“……?”
“대신 넌 그토록 바라던 동생을 얻지 못할 테니까.”
“어? 그렇게 마음대로 약속을 번복하시면 어떡해요?”
“아빠 엄마는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런데 네가 그걸 방해한다니 어쩔 수 없지 않겠니?”
“제가 언제 방해를…….”
“너 빼고는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던 범려화는 뒤늦게 난감한 웃음을 흘리며 애써 시선을 회피하는 해남 문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범계위가 범려화를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앉혔다.
“흐흐. 걱정 마, 우리 딸. 아빠가 꼭 이쁜 동생 만들어 줄게.”
“아이참, 아빠두. 저 이제 열 살이란 말이에요. 자꾸 이렇게 어린애 취급하시면 곤란해요.”
“으하하. 그냥 열한 살까지는 어린애 하자.”
“여섯 살 때부터 계속 그렇게 일 년씩 미루셨잖아요.”
정겹게 옥신각신하는 부녀의 모습에 해남 문도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리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망산초자도 하나뿐인 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비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웃기냐?”
범계위의 한마디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아빠…….”
“아차! 버릇이 돼서 그만……. 조심하마.”
그때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무장 안으로 헐레벌떡 달려온 사내를 발견한 범계위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습격이냐? 또 어떤 정신 나간 왜구가 선박이라도 턴 거야?”
그것 말고는 산꼭대기 망루에서 먼 바다를 감시하던 녀석이 이렇게 서둘러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근래에 씨가 말라 몇 년째 종적을 감춘 왜구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이왕이면 좀 제대로 된 놈이 왔으면 좋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범계위가 초병을 다그쳤다.
“누구냐? 어떤 놈을 죽이면 되지?”
“다, 단 의원님!”
“그래. 단 의원이라는 놈을 죽이면……. 어?”
초병의 대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범계위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누구라고?”
“단 의원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멀리서 접근하던 선박이 깃발을 이용한 신호로 전달해 온 내용이었다.
“꺅!”
범려화의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 건 직후였다.
갑자기 아래쪽이 허전해지나 싶더니 강한 바람에 밀려나 엄마의 품에 떨어진 것이다.
“우리 딸, 괜찮니?”
벽화령의 말에 범려화가 울먹였다.
“힝. 아빠가 날 버렸어.”
그러나 이미 그녀의 투정을 받아 줄 범계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파도를 가르며 해남도로 향하던 쾌속선.
선수에서 전방을 응시하던 선원의 입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방에 물기둥! 모두 배를 단단히 붙잡아!”
“뭐라!”
선미에서 조타를 하던 선장이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십 년 넘게 배를 몰아 온 수하였기에 헛것을 보았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타를 꺾었다.
쾌속선이 휘청이며 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 와중에도 연이어 솟구치는 물기둥을 보며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대체 왜 해남파가 자신들에게 화포를 쏘아 대는지 알 수 없었다.
삐걱.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처럼 삐걱대는 쾌속선의 비명을 뒤로한 채 선수에서 전면을 응시하던 단악선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안심하세요.”
멀리 솟구친 물기둥만 보고 포탄이 떨어진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선원들은 비로소 연이어 솟구치는 물기둥이 점차 자신들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빠르게 접근하는 인영을 발견한 건 그 직후였다.
그가 해수면을 박찰 때마다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물기둥에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쿠웅.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쾌속선이 반쯤 물에 잠겼다가 급격히 튀어 오른 것도 그때였다.
쏴아아아.
뒤늦게 쏟아진 엄청난 물벼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인영.
“단 의원!”
성큼 다가선 범계위가 단악선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범계위의 품에 안긴 단악선은 새삼 놀라웠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였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단악선이었지만 범계위에게 안기자 두 발이 바닥에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저씨.”
비로소 안도한 선원들 역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단악선과 범계위가 탄 쾌속선이 해남도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단 의원님을 뵙습니다!”
단악선을 기억하고 있던 해남파의 인물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네 왔다.
“정말 많이 달라지셨네.”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못 알아볼 뻔했어.”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해남 문도들을 향해 범계위가 아니꼬운 눈빛을 던졌다.
“뭐가 달라져? 키 좀 큰 거 빼고 완전 그대로인데! 그렇게 보는 눈이 없으니 발전이 없지.”
단악선이 웃으며 범계위를 만류했다.
“절 한눈에 알아본 건 범 아저씨가 유일해요.”
사실 풍진성도 자신을 곧바로 알아보긴 했지만 살짝 반신반의했었다.
범계위가 더없이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우리 단 의원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왜냐고? 단 의원은 내게 있어 가족 그 자체니까.”
“역시 범 아저씨가 최고예요.”
“으하하. 역시 그렇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남 문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 의원님이셨어.”
“하긴,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칭찬으로 저렇게 통제하셨던 것 같아.”
“어쩐지. 그래서 단 의원님이 곁에 계실 때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때였다.
“어서 와요, 단 오라버니.”
단악선이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다가서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요.”
한눈에 봐도 열 살 남짓한 소녀.
그런데 그 앙증맞고 귀여운 소녀가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오라버니라 부르니 단악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저 려화예요. 범려화.”
“……?”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전에 직접 진맥도 해 주셨잖아요.”
단악선은 몹시 당황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능청스럽게 다가선 범려화가 단악선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물론 그때는 엄마 배 속에 있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