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59)
신마의선-459화(459/500)
신마의선 (459)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벽대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로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해남검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마교와의 일전을 통해 상당한 피해가 누적된 구파일방과 다르게 해남검파는 아직까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문파의 숙원을 이룰 절호의 기회.
이를 걷어차는 건 머저리나 할 짓이었다.
열망이 담긴 장로들의 눈빛에 벽대경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해남검파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자네와 뜻을 함께할 걸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 전에…….”
말끝을 흐린 벽대경이 창해각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벽화령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우려하던 것과 달리 벽화령은 미소와 함께 선뜻 범계위의 강호행을 지지했다.
“우리 가가, 실로 오랜만의 강호행이군요. 짐은 제가 꾸려 드리죠.”
출정이 확정된 범계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 몇 년 동안 벽화령이 마주했던 그 어떤 웃음보다 더없이 환한 표정이었다.
* * *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
호남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장사는 남쪽으로는 형산을 끼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인 만큼 수많은 전설과 명승지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상강(湘江) 근처에 자리 잡은 악록산은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악록서원 앞에는 수많은 객점과 다루가 즐비했다.
그리고 그 무수한 다루 중에는 조향루(調香樓)도 있었다.
일견하기에는 매우 낡아 볼품없어 보이는 외관.
그러나 목조 누각에는 차를 즐기는 온갖 손님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고아한 운치를 유독 더 선호하는 다객들의 취향이 완벽하게 반영된 결과였다.
등에 봇짐을 한가득 짊어진 사내 한 명이 조향루 안으로 들어선 것도 그때였다.
매일같이 중원 각지에서 공수한 차를 이곳에 공급하는 도매상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후원의 창고로 향했다.
한 차례 주위를 살펴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 그가 창고의 벽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덜컹.
그러자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나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나타냈다.
지하 통로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 밖으로 나서자 청죽(靑竹)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는 곧장 정원 중앙에 위치한 정자로 향했다.
그 안에서 눈앞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을 확인하던 중년인이 눈을 들어 막 정자 위로 오르는 사내를 응시했다.
“직접 보고라니, 흔치 않은 일이군. 그래, 무슨 일이지?”
사내가 곧장 대답했다.
“지금까지 단독으로 움직이던 신마의선에게 망산초자가 합류했습니다.”
“뭐?”
수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사람의 명호에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언제?”
“정보 자체는 사흘 전에 입수하였으나,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은 한 시진 전입니다.”
“어리석은! 신중한 것도 좋지만 신속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정보라고 몇 번을 말해?”
중년인의 꾸짖음에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망산초자다, 망산초자! 그 명호가 튀어나온 순간 바로 보고했어야지.”
수하를 향해 일갈하는 중년인은 한때 흑점의 섬서 지부를 책임지고 있던 자였다.
“큰일 났군. 이거 큰일 났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좌불안석하는 엽단영의 모습에 방금 보고를 올린 그의 수하가 입을 열었다.
“위기는 오히려 기회란 말도 있습니다.”
“뭐?”
“비록 우리 흑점이 마교의 농간에 당해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고는 하나 지부장님과 신마곡의 친분을 이용한다면…….”
“허.”
엽단영이 어이없단 웃음을 흘리며 수하를 노려봤다.
“친분? 너는 그게 친분으로 보였더냐?”
오래전 기억을 더듬던 엽단영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사색이 되었다.
‘아뿔싸!’
현재로서는 범계위가 자신을 찾아올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의 조직도를 단악선이 꿰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 흑점은 마교에게 놀아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단악선에게 납작 엎드렸다.
그 과정에서 각 지부장들의 성명과 용모파기를 소상히 보고해 깡그리 쓸려 나가는 화를 간신히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단악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쉽게 자신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불길해.’
그런데 그때.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우지끈.
거대한 무언가가 정자의 지붕을 산산이 박살 내며 떨어졌다.
“여어, 잘 지냈어?”
자욱한 먼지와 건물의 잔해 사이로 태연히 걸어 나오는 범계위의 모습을 확인한 엽단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불길하다 싶더라니,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아끼던 정자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인사해야지?”
엽단영의 허리가 곧바로 꺾였다.
“그간 별래 무양하셨습니까. 흑점에 몸담고 있는 후배 엽 모가 존귀하신 망산의 종주(宗主)를 배알합니다.”
“또 어려운 말 쓴다. 죽을래?”
엽단영이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망산초자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악록서원 근처에 이런 비경(祕境)이 감추어져 있을 줄은 몰랐네요.”
죽림을 헤치며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을 발견한 엽단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역시 나름대로 정보 단체를 이끄는 사람.
단악선이 강호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후 꾸준히 이와 관련한 정보들을 수집해 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단악선의 외양에 대한 보고도 있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렇게 멀쩡히 들어오셔도 되는데 왜 항상 지붕을 부숴 대시는지…….”
혼잣말로 툴툴대는 엽단영을 향해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지금 그거 나 들으라 하는 소리지? 못 보던 사이에 간이 좀 커졌나 보다?”
“지붕 하나 고칠 돈도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뭐? 천하의 흑점이 지붕 고치는 돈이 아깝다고?”
“예전의 저희가 아니니까요.”
풀 죽은 눈빛으로 엽단영이 울상을 지었다.
“최근에는 애들 활동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엽단영을 향해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많이 어려운 모양이죠?”
엽단영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뭐, 저희들의 업보니 어쩔 수 없지요. 유기진, 그자가 수보의 하수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흑점주로 앉힌 책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단악선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것 치곤 꽤나 수려한 풍광을 지닌 곳에 지부를 설립하셨군요.”
“좋아서 이곳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의아해하는 단악선을 향해 엽단영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현재로서는 장강 북쪽으로는 우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이곳이 우리에게는 기회의 땅이나 다름없지요. 사종악 무리가 장강 이남까지 집어삼키기 위해 미쳐 날뛰고 있으니까요.”
이 지역의 수많은 무림인이 그의 행보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정보의 가치는 높아지는 법.
흑점은 그런 그들에게 수로연맹의 동향에 관련된 정보들을 비싸게 팔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엽단영 역시 마찬가지.
어떻게든 가치 있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을 박박 긁어 이곳으로 왔다.
“그래 봐야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이할 수준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엽단영의 푸념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단악선이 뜻밖의 제안을 한 것도 그때였다.
“사종악과 그 휘하의 세력들을 정리할 때까지 전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전적이라 하심은……?”
“말 그대로 다른 곳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우리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엽단영이 피식 웃었다.
비록 부탁의 형식을 빌렸지만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자신들의 목줄은 단악선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지부장들과 하부 조직원의 명단을 단악선이 모두 파악하고 있는 이상 거부권 따위는 감히 행사할 수도 없었다.
“처지가 처지인 만큼 그 말씀을 따르겠으나,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
“정보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연락망 역시 예전만 못합니다. 게다가 구심점이었던 흑점주가 사라진 이후 각 지부장들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활동하고 있는 터라 정보를 하나로 취합하는 과정도 수월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흑점주가 죽은 지 언젠데 왜 아직까지 공석이야?”
“서로 나서길 꺼리는 거죠. 전임자가 어떤 말로를 맞았는지 잘 알고 있는 데다 아무리 권력이 탐난다 한들 목숨은 한 개뿐이니까요.”
당장 조정의 동창만 해도 흑점을 향한 감시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환관은 속이 좁고 원한을 잊지 않기로 유명했다.
마교의 수보와 흑점주였던 유기진이 음모를 꾸며 그들의 수장인 사례태감을 실각시키려 했고, 때문에 흑점은 제대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흑점주가 된다?
차라리 비상을 삼키고 죽는 것이 나았다.
동창의 조옥에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고문을 맛보는 것보다는 깔끔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뭐야, 난 또 뭐라고. 고작 그런 것 때문이었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은 범계위가 손가락을 들어 엽단영을 가리켰다.
“네가 해.”
“예?”
“흑점주. 네가 하라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색이 된 엽단영을 향해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네가 흑점주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잖아?”
“하지만 그건…….”
“선택해.”
“네?”
“나야? 아니면 동창이야?”
“……!”
외통수에 몰린 엽단영의 낯빛은 그야말로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엽단영이 단악선을 향해 간절한 도움의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단악선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범 아저씨는 천재예요.”
엽단영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단악선을 바라봤다.
범계위야 원래 막 돼먹은 괴물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설마 단악선까지 이렇게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단악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신 신변의 안전은 보장해 드릴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단악선은 언젠가 사례태감에게 받았던 신패를 언급했다.
한 쌍의 해와 달, 그리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금패.
당시 사례태감은 각 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동창의 제기를 비롯해 위소의 병력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신패라 설명했다.
그리고 황제의 재가를 얻어 두었으니 언제든지 필요할 때 쓰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재 능소밀이 이것을 지니고 있었으니 서한을 통해 동창이 흑점의 행사에 관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뿐인 것이다.
단악선의 설명이 끝나자 엽단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다시 무위에 흑점 지부를 만드는 것을 허락해 드릴게요. 나아가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때까지 필요한 자금은 신마상단에서 지원할 거고요.”
“……!”
눈빛을 반짝이길 잠시.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심하던 엽단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무언가를 원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세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단악선과 범계위의 눈치를 살피던 엽단영이 결의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