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60)
신마의선-460화(460/500)
신마의선 (460)
“제가 흑점을 구속한 적이 있었나요?”
단악선의 물음에 엽단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그러신 적은 없으시죠. 다만 사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칼자루를 쥔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턱밑에 비수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축되기 마련이죠.”
“…….”
“제가 흑점주가 된다 한들 지부장들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흑점을 운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만큼 솔깃한 제안이 필요하지요.”
엽단영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앞서 언급한 조건을 허락하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다른 지부장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물끄러미 엽단영을 응시하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예?”
엽단영은 당황했다.
이렇게 선뜻 단악선이 자신의 제안에 응할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사이 단악선이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권의 작은 책자였다.
엽단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까닭이다.
비록 제목도, 그 어떤 특징도 없는 평범한 책자였지만 이를 작성했던 당사자인 그가 몰라볼 수 없었다.
바로 점조직으로 구성된 흑점의 조직 체계와 구성원의 정보가 기재된 책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르륵.
“……!”
엽단영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돌연 단악선의 손에서 새하얀 화염이 솟구치나 싶더니 그대로 책자를 집어삼킨 것이다.
단악선이 일으킨 삼매진화(三昧眞火).
그 아래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책자를 멍하니 보고 있던 엽단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단악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순간 엽단영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단악선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두 번은 없어야 할 거예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눈치 빠른 엽단영은 곧바로 그 의미를 깨달았다.
“적어도 제가 흑점주로 있는 한 흑점이 단 의원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엽단영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 자리에 흑점의 명부 책을 가지고 왔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내 단악선이 먼저 보여 준 신뢰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저희가 제일 먼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단악선이 대답했다.
“소문이 필요해요.”
“소문 말입니까?”
“네. 제가 범 아저씨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야 해요.”
“그 목적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삼몰쌍괴, 그 두 분이 우리를 찾아오게 만들려고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엽단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혹시 천의에 관한 것입니까?”
단악선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과거 능소밀이 그를 높이 평가했던 데에는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개방과 하오문은 장강을 장악한 수로연맹으로 인해 발이 묶여 있는 상태.
그나마 장강 이남에서 정보 활동을 이어 가는 곳은 흑점이 유일했다.
“그럼 저희도 독자적으로 천의와 관련한 정보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엽단영 입장에서는 흑점을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 소문을 크게 퍼트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때 무언가를 떠올린 엽단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멀지 않은 곳에 거산방(巨山房)이 있습니다.”
“거산방이요?”
“일찌감치 장강수로연맹에 합류한 흑도방파입니다. 거산패력(巨山覇力)이라는 명호를 지닌 반여금이라는 자가 그곳의 방주인데, 사종악의 큰 신임을 얻고 있다 들었습니다. 수로연맹 측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인 만큼 그곳을 흔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흐흐. 그 정보 참 마음에 드네.”
범계위가 매우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산방과 관련된 자료들을 취합해 단악선에게 건넨 엽단영은 두 사람이 떠나기 무섭게 수하들을 소집했다.
“전체 회의를 열어야 하니 당장 지부장들에게 연락 돌려. 우리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잡았다는 것도 반드시 전하고.”
* * *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무렵.
거산방에 도착한 범계위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단악선을 바라봤다.
“단 의원은 나서지 마.”
“네? 하지만…….”
“험한 일은 나한테 맡기라고.”
행여라도 단악선이 만류할까 싶어 범계위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산방의 대문을 걷어찼다.
꽈앙!
굉음과 함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간 대문 사이로 범계위가 신형을 날렸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거산방 안에서 비명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소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잠시 후, 거산방 안에서 쩌렁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 머시기라는 놈이 누구냐?”
범계위였다.
그제야 단악선은 박살 난 대문을 넘어 거산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방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사내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중에 두 다리로 온전히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들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범계위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저놈이 여기 방주라고?”
“그, 그렇습니다.”
“…….”
범계위가 어이없단 눈빛을 흘렸다.
거력패왕이라는 거창한 명호를 지니고 있어 그래도 제법 한 수를 지닌 놈이라 예상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나름 손맛을 기대했건만 설마 주먹질 한 방에 피를 토하며 죽어 나자빠진 놈일 줄이야.
이때 단악선이 반여금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가 맞는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게, 흑점에서 제공한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럴 리가……. 이놈 고수라고 하지 않았어?”
여전히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범계위의 모습에 단악선이 실소했다.
“그만큼 아저씨가 너무 강하신 거죠.”
“아니야. 어딘가에 이놈보다 더 대단한 고수가 숨어 있을 지도 몰라.”
화등잔 같은 눈으로 주위를 쓸어 보는 범계위의 시선에 그나마 숨이 붙어 있던 거산방의 생존자들이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몸을 떨어 댔다.
그 모습에 범계위도 흥이 식었는지 한 차례 입맛을 다셨다.
“쩝. 대체 이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길래 이딴 놈이 고수라는 소문이 나는 거야?”
고작 이딴 놈들에게 설레었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범계위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쓸어 봤다.
“저놈들은 어떻게 할까? 다 죽여?”
“그냥 보내 주죠.”
“왜?”
“저들이 증인이 될 테니까요.”
자고로 소문을 퍼트리려면 떠드는 입이 많을수록 유리한 법.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산방의 생존자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앞다투어 밖으로 달아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때였다.
“다행히 건물들은 모두 멀쩡하네요.”
거산방은 장강수로연맹의 손발을 자처하던 문파였다.
무엇보다 장강과 인접해 있었고 교통로가 뻗어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어 거점으로 삼기에 여러모로 유리했다.
“이곳을 해남파의 지부로 쓰면 될 것 같아요.”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범계위가 눈을 껌벅이다 히죽 웃었다.
“이걸 감안하셔서 일부러 부수지 않으신 거죠?”
“어? 음……. 그렇지?”
내심 살짝 켕겼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범계위였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듣는 단악선의 칭찬은 그만큼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 * *
“실패했다고?”
실내를 울리는 한 사람의 음성에 조용히 어둠을 밀어내던 대황촉의 불꽃이 거칠게 흔들렸다.
태사의에 앉아 팔걸이를 두들기던 사내가 서늘한 눈빛을 흘렸다.
하오문을 압박하기 위해 파견했던 채주들.
특히 노룡채의 채주였던 단홍도 조귀의 죽음은 실로 뜻밖이었다.
‘혹시 몰라 혈사마편도 함께 보냈건만.’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실력만큼은 쓸 만한 자였다.
게다가 나름대로 추린 고수들과 거액을 들여 구입한 당가의 암기까지 딸려 보냈건만…….
개방의 신진고수인 방소방을 제거해 본보기를 보이고, 하오문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요음난희를 포섭하려던 계획은 이로써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쓴 입맛을 다시기 위해 술잔을 집어 들던 사종악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로 쩔쩔매는 수하의 모습 때문이었다.
조신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나름 그에게 장자방 역할을 하는 채주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해야 할 것이 더 있나?”
“그, 그것이…….”
마른침을 삼키는 조신의 목울대를 노려보던 사종악이 이어진 보고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형산파를 치러 갔던 혈염방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했던 창랑대(滄浪隊)가 전멸했습니다.”
“뭐?”
“게다가 충의채마저 형산파 놈들이 점거를……. 커헉!”
보고를 하던 조신이 피 기침을 토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전면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가공할 기파가 심맥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콰직.
사종악이 움켜쥔 태사의 손잡이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번에도 신마의선……. 그놈이겠군?”
사종악의 눈 위로 자욱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형산을 치기 위해 투자했던 전력.
무엇보다 서른 명에 달하는 창랑대(滄浪隊)를 잃은 것만큼은 그로서도 매우 뼈아픈 손실이었다.
거기에 핵심 요지 중의 한 곳인 동정호의 수채인 충의채도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니.
그때였다.
“매, 맹주님!”
허겁지겁 내전으로 뛰어든 또 다른 채주의 모습에 사종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또 뭐냐?”
“거산방이 무너졌습니다.”
“하…….”
사종악이 실소했다.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정도였다.
“또 단악선이라는 그 애송이 짓이냐?”
“아닙니다.”
“그럼?”
“최근에 그자와 합류한 망산초자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사종악의 눈에 이채가 자리 잡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사종악이 독한 화주를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범계위인가……. 예전부터 한번 붙어 보고 싶긴 했지.”
“설마 직접 나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아니다. 우선은…….”
말끝을 흐리던 사종악의 눈 위로 더없이 착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복잡하게 꼬인 관계부터 풀어야지.”
“천의, 그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지?”
“그게……, 망산초자 그자가 여전히 거산방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듣자니 그곳을 해남검파의 지부로 쓸 거라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고 합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사종악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과연 망산초자. 과연 소문대로 보통 미친놈이 아니군.”
이때 입가에 피를 훔치며 자세를 바로 한 조신이 우려를 드러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사종악이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쳤다.
“상황이 심각한 건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지. 네놈들의 무능함에 질려 버린 지 오래니까.”
조롱에 가까운 노골적인 비난에 조신의 얼굴에 자괴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수습했다.
그보다 당장은 우선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거점으로 해남파가 세를 펴기 시작한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겁니다. 그들 또한 수상 전투에는 우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니까요.”
못마땅한 눈빛을 던지는 사종악을 향해 조신이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해남도까지는 우리의 정보망이 닿지 않아 놈들의 전력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거기에 망산초자까지 가세한다면…….”
“쯧.”
결국 사종악이 짜증 섞인 눈빛을 흘리며 혀를 찼다.
“여차하면 장강으로 끌어 들여라. 내가 처리할 테니. 천하오절에도 못 들어간 놈이 뭐 그리 무섭다고 그리 쩔쩔매는 것이냐?”
원하던 대답을 들은 조신은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그가 천하오절 중 한 명인 진명진인을 쓰러트리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기에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무공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 술잔 위로 술병을 기울이던 사종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술 한 병을 다 비워 버린 것이다.
지그시 술잔을 응시하던 사종악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어찌하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