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68)
신마의선-468화(468/500)
신마의선 (468)
형산파의 장문인인 진조운과 대화를 나누길 잠시.
단악선이 주변 손님들에게서 벗어나 벽대경을 향해 걸어왔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벽대경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말하지. 고맙네. 자네가 있어 누대에 걸친 본 파의 염원을 내 대에서 이룰 수 있었어.”
“아니에요. 저보다는 범 아저씨의 공이 크죠. 이 장소를 마련하신 분도 범 아저씨고, 해남검파의 정예 전력 육성에 크게 일조하신 분도 범 아저씨니까요.”
벽대경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는 범계위라면 학을 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위에게 애써 공을 넘기는 단악선이 그저 기특할 뿐이었다.
그사이 단악선은 내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해남검파의 고수들 대부분이 보이지 않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걱정을 담은 단악선의 눈빛에 벽대경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본 파로서는 더없이 뜻깊은 자리이니, 이곳을 찾아 주신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그에 걸맞은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선물이요?”
“아! 마침 저기 오는군.”
벽대경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 단악선은 막 대문을 넘어서는 해남검파의 무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단악선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저마다 투지 가득한 눈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옷 곳곳에는 흉험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곳곳이 베이고 찢긴 의복 사이로 입을 벌리고 있는 자상은 둘째 치고, 몇몇은 팔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나 악전고투를 치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곳 해남검파 지부를 찾은 내방객들도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때 선두에서 해남검파의 정예들을 이끌고 있던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한때 벽화령의 수신 호위로 함께 무위를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단악선도 기억하는 인물이었다.
종리추와 장철우.
파랑이검(破浪二劍)이라 불리며 늘 함께 움직이는 그들은 해남검파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자들이었다.
또한 근래 해남검파 무인들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높은 성취를 이뤄 내기도 했다 들었다.
두 사람이 벽대경을 향해 쩌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주님의 명을 받들어 담목채와 위하채(危河砦)의 토벌을 완료했습니다!”
“두 채주 모두 저희가 직접 목을 쳤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잔당들 역시 남김없이 소탕했습니다!”
그 외침에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언급한 두 수채는 최근 사라진 동정호의 충의채와 더불어 이 지역 일대를 오래전에 장악했던 장강수로연맹의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연히 많은 고수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방어도 견고해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충지로 알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수상전에 특화된 그들과 물 위에서 싸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토벌은 그야말로 요원하기만 했다.
한데 그런 그들을 모조리 쓸어 내 버렸다니.
그것도 단악선이나 범계위 같은 고수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해낸 것이라 더욱 놀라웠다.
사람들은 새삼 놀라운 눈으로 벽대경과 해남검파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이 지역을 위협하던 수채 두 곳을 밀어 버리는 것으로 해남검파는 자신들의 역량을 증명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무림에서는 힘이 미덕이요, 지지를 얻어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것이 바다 사나이들의 방식이라오.”
중인들과 시선이 마주친 벽대경의 태도에서 여유가 넘쳤다.
이로써 자신들의 중원 진출을 확실하게 천명한 셈.
그때 부상자들을 유심히 살피던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상, 경상 구분하지 말고 부상을 당하신 분들은 모두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단악선의 말에 종리추와 장철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풍랑에 휩쓸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맞습니다. 침 바르고 좀 쉬면 나을 테니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단악선은 생각이 달랐다.
앞으로 얼마나 더 비슷한 전투를 반복해야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이런 식의 소모적인 전투가 계속 이어지면 누적된 부상이 결국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굳이 입을 열어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대뜸 앞으로 나선 범계위가 살기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나직이 으르렁댔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만들어 줄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차차차착.
어느새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한 해남검파 무인들이 단악선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청했다.
“이렇게 모여 있으면 되는 겁니까?”
거친 바다 사나이들도 때론 더없이 고분고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는 그들이었다.
* * *
자금성의 북쪽 화원.
멀찌감치 호위를 물린 황제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 앞에 부복한 노인을 응시했다.
전 황실을 통틀어 유일하게 독대를 허용한 인물.
바로 자신의 근신환관이자 십만 환관의 수장인 사례태감이었다.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황제가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조금 더 미뤄 줄 수는 없는가?”
사례태감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아뢰옵건대, 빈직의 청을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빈직의 노구로는 이제 폐하의 걸음을 쫓는 것도 벅차나이다.”
간절한 염원을 담은 사례태감의 음성에 황제가 되물었다.
“짐이 부탁을 한다 해도?”
누구보다 오랜 세월 곁에 둔 사례태감이었다.
그만큼 누구보다 신뢰하며 자신의 의중을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한 순간부터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사직을 청하는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몹시 착잡해진 황제였다.
세월의 풍상을 실감하게 하는, 회한 어린 미소가 사례태감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엎드려 고하옵건대, 폐하께서 후하게 중용하시어 이제껏 여러 어진 이들과 더불어 종묘사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으니 이 자리에서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
“다만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처럼 예로부터 고희를 넘기는 이가 드뭅니다. 더욱이 빈직의 나이는 이미 고희를 넘어 팔순을 넘겼사옵니다. 귀는 멀고 눈 또한 어두워져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이제는 폐하께 누를 끼치는 것밖에 할 수 없나니, 이 가엾은 늙은이의 사정을 헤아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고 보니 그대도 많이 연로했구려.”
유난히 오늘따라 새하얀 사례태감의 머리카락과 밭고랑처럼 깊이 파인 주름이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몸 역시 마찬가지.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모든 것이 짐의 손아귀 안에 있으나 사람의 마음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짐이 총애하는 이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짐에게서 벗어나려 하는지 모르겠구나.”
한없이 씁쓸한 표정으로 황제가 허공을 응시했다.
조정의 모든 문무 대신은 고희에 이르면 사직을 청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다만 곡례(曲禮)에 의거해 몸을 지탱하기 위한 지팡이와 떠받치는 의자로 구성된 궤장(几杖)을 하사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거절할 권리 또한 황제에게 있었다.
또한 이런 사궤장(賜几杖)은 공직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영예로 여겨졌다.
하지만 눈앞의 사례태감에게는 이를 적용할 수 없었다.
궤장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삼망자(三望者).
즉 벼슬이 정일품에 이르고, 고희를 넘겨야 하며 국가의 중경사에 관계된 공훈이 있어야 하는 조건을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환관에게는 정식 품계가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늙어서 몸이 아파 쉬고 싶다는데 더 부려 먹겠다는 건 아무리 황제라도 못 할 짓이었다.
“……윤허하노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를 향해 사례태감이 부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런데 평생을 험난한 권력의 가시밭길을 거닐어 왔던 그대가 과연 모든 것을 잊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사례태감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여한을 남기지 않도록 떠나기 전 마지막 춤사위를 펼쳐 볼까 합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례태감이 말하는 춤사위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실로 오랜만에 그대의 칼춤을 보게 되겠군. 그래,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가?”
“동창이옵니다.”
“동창?”
“예, 빈직이 황실을 떠난 이후에도 폐하의 이목이 안개에 가려 흐려져서는 아니 되니까요. 직접 나서 자체 조사를 진행할까 합니다.”
“한동안 내부가 시끄럽겠군.”
“태풍이 몰아쳐야 호수의 물고기가 성하고, 강물이 범람해야 이듬해 풍년을 맞는 것처럼 폐하의 치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옵니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능 도어사(都御司)도 이에 대해 알고 있느냐?”
본래 도찰원의 부도어사였던 능소밀은 최근 장관직인 좌도어사로 영전(榮典)했다.
품계는 정이품.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은 관리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어떻게든 황실을 떠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한 황제 나름의 고육책이었다.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사코 영전을 마다하던 능소밀의 모습을 떠올린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례태감 역시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그에게 날개를 한번 달아 줄 생각입니다.”
“흠……. 오랫동안 별러 왔던 만큼 아주 신이 나서 설치겠군.”
가뜩이나 최근 동창의 행보를 미심쩍어하던 능소밀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손에 칼을 쥐여 준다면 어설프게 휘두르다 그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법.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폐하께서 우려하시는 바를 빈직이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크게 심려치 않으셔도 될 듯싶습니다.”
“어째서지?”
황제의 반문에 사례태감이 묘한 미소를 말아 올렸다.
“능가 그 녀석이 언젠가 빈직에게 자신의 스승이라 하더군요.”
황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조정의 수많은 대소 신료 중 그 누구에게도 마음 한 뼘 내어 주지 않던 그자가 말인가?”
“물론 입바른 소리라는 것을 빈직도 잘 아나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한 번쯤은 진짜 스승답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볼까 합니다. 그것이 비록 제 손과 발을 스스로 끊어 내는 일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으음……. 자네의 충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래도 솔직히 걱정이 되는군.”
“이번만큼은 녀석도 충분히 선을 지킬 것이옵니다.”
“어째서지?”
“휘두르는 칼끝에 빈직의 목도 올려져 있을 테니까요.”
눈살을 찌푸리는 황제를 향해 사례태감이 말을 이어 갔다.
“동창의 먼지를 털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대의를 위해 묻어 두었던 크고 작은 허물들도 딸려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그자를 믿는다는 것인가?”
“능력만큼은 승상(丞相)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사옵니다.”
건국 초기.
중서성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인 승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홍무 연간에 승상이었던 호유용이 모반 혐의로 처형된 이후 중서성을 폐지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벼슬이었다.
누구보다 관리를 평가하는 데 있어 인색했던 사례태감으로서는 더없이 후한 평가였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능소밀은 애초에 앞뒤가 없었고, 저 역시 은퇴 이전에 폐하의 길을 닦기 위해 남은 힘을 쥐어짜 최선을 다해 볼까 합니다. 그러니 부디 재가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