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71)
신마의선-471화(471/500)
신마의선 (471)
환관 대부분이 향낭을 지니고 다닌다곤 하지만 신분과 능력에 따라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었다.
당귀나 천궁, 박하처럼 짙은 향기가 나는 한약재를 섞어 만든 향낭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더 신분이 높거나 재력을 지닌 자는 값비싼 사향(麝香)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 사향보다 수십 배는 비싼 용연향이라니.
환관 중에서도 이 정도 재력을 지닌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마도 동창의 우두머리인 병필태감.
혹은 그에 준하는 지위를 지닌 고위 환관이 분명했다.
스스로 제갈세가의 가주와 비교하는 자신감 역시 동창이라는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 터.
“황실의 가장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비루한 족속이 감히 내 안전에서 가소롭게도 천하 대사를 운운해?”
모욕적인 사종악의 언사에도 좌자라는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말없이 좌자를 노려보는 사종악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뭉클거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겐 무슨 볼일이지?”
“말씀드렸을 텐데요. 선물을 드리러 왔다고.”
“선물?”
좌자가 빙긋 웃으며 앞으로 내민 손 위에는 작은 목갑이 올려져 있었다.
좌자의 손바닥 위에서 떠오른 목갑이 느리게 사종악을 향해 움직였다.
사종악의 눈썹이 꿈틀했다.
보기와 다르게 이처럼 진기를 운용하는 방법은 매우 고절한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저 안에 실려 있는 막대한 경력은 둘째 치고 섣불리 힘으로 응수하면 목갑 자체가 으스러져 버릴 수 있었다.
“같잖은 짓을.”
상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종악이 차가운 웃음과 함께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손에는 이미 목갑이 들려 있었다.
좌자의 눈에서 한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태산 같은 경력이 어느 찰나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시…….”
뜻 모를 탄성을 흘린 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목갑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사종악은 사종악대로 놀라고 있었다.
“이건?”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하나의 영단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무당의 보물인 태청신단이었다.
소림의 대환단, 화산의 자소단과 더불어 무림에서는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의 가치를 지닌 영단이었다.
좌자가 웃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다행히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묘한 눈빛을 흘리는 사종악을 향해 좌자가 말을 이어 갔다.
“조만간 긴히 쓰일 곳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지?”
“머지않아 귀하의 목숨은 경각에 처할 테니까요.”
멈칫하는 사종악의 모습에 좌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건넸다.
“정도 무림 전체에게 싸움을 건 귀하의 배포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한 법. 귀하 혼자서는 곧 들이닥칠 위기를 넘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잡자?”
“우리는 서로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까요.”
“…….”
“당장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테니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천천히 돌아서던 좌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시죠?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만은 않습니다.”
표표히 실내를 떠도는 향기를 뒤로한 좌자의 신형이 어느 순간 어둠 속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홀로 남은 사종악은 자신의 손에 올려진 영단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할 뿐이었다.
* * *
해남검파의 중원 지부.
한때 거산방이었던 이곳의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상당한 규모의 인파가 연이어 밀려들었다.
신마상단에 소속되어 있는 상인들과 이들의 호위를 전담한 개방의 무인들이었다.
수레 위에는 온갖 물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상인들도 저마다 상당한 양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악선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장강 길이 다시 열려 다행이에요.”
최근 서쪽의 수채들이 정리되면서도 안전한 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덕분에 발이 묶여 있던 물자들도 다시 이 지역으로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신마상단의 지원은 고사해 가던 문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다름없었다.
“악선아!”
단악선의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가 호들갑스럽게 달려온 것도 그때였다.
“어서 와, 소방아. 고생 많았어.”
“흐흐. 본래 협객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것. 협의 하면 개방! 개방 하면 의리! 그리고 개방에는 나 풍운쾌걸 방소방 어르신이 계시지. 괜히 내 이름에 방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겠어? 그게 바로 다…….”
쉬지 않고 떠들어 대던 방소방이 갑자기 멈칫했다.
돌연 목덜미 부근이 서늘해지면서 무인의 감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알려 왔기 때문이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것도 잠시.
저 멀리.
벽에 기대어 가만히 자신을 노려보는 범계위를 발견한 방소방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본 방에 딱 둘밖에 없는 청의빈객 범 선배님 아니십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범계위에게 다가섰다.
“어쩐지 어젯밤 꿈이 길하더라니……. 이게 다 우리 범 선배님과의 만남을 예지한 것이었군요. 정말이지 영광…….”
그러나 방소방은 특유의 너스레를 이어 갈 수 없었다.
범계위가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기 때문이다.
“너냐?”
“예?”
“단 의원 꼬드긴 놈이 너냐고.”
“그게 무슨…….”
“그게 아니면 왜 단 의원이 나를 여기 남기고 떠난다는 건데?”
험악한 범계위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낀 방소방이 황급히 단악선에게 간절한 도움의 눈빛을 던졌다.
단악선이 웃으며 범계위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이곳을 지켜 주셔야 해요. 수로연맹이 반격을 한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노릴 것이 분명하니까요.”
사종악 입장에서도 이곳은 핵심적인 요지인 만큼 반드시 되찾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곳은 아저씨의 가족도 계시는 곳이잖아요.”
해남검파의 문주인 벽대경은 이곳 지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한동안은 이곳에서 함께 지내기로 결정했다.
장인어른 역시 가족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범계위는 이마저도 마뜩지 않았다.
“에잇! 왜 하나같이 죄다 약골밖에 없는 거야?”
들으라는 듯 대놓고 투덜대며 주위를 훑어보는 범계위의 눈빛에 바쁘게 오가던 해남검파의 문도들이 흠칫하며 시선을 회피하기 급급했다.
졸지에 약골 신세를 면치 못한 벽대경 역시 마찬가지.
머쓱하게 헛기침을 터트리며 애먼 수염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방소방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약골은 좀 아니죠. 근래에 해남검파가 장강 일대에서는 흠포사신(欽怖死神)으로 통하는걸요.”
그래도 문주인 벽대경도 함께 있는 자리인 만큼 방소방은 해남검파를 띄워 주려 노력했다.
목숨만큼이나 자신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 무인들이었고, 특히나 평생을 절해고도에서 바다와 싸워 온 해남검파의 무인들은 그 어떤 곳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시 빈말도 아니었다.
수상전에서는 상대가 없다 자부하던 수로연맹의 수적들을 연이어 격파하며 해남검파는 가히 그 위상을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해남검파 특유의 피풍의 역시 그들의 인기에 힘입어 새로운 유행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갈 정도였다.
반대로 수로연맹 소속의 수적들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강적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상황.
그런데 그때.
“……?”
문득 방소방은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바로 자신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내젓는 해남검파의 문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사색이 된 채 애원하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붙이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흠포사신? 저놈들이?”
피식 웃은 범계위가 주위를 스윽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불 만난 메뚜기처럼 화들짝 놀란 해남 문도들이 황급히 흩어져 자리를 피했다.
방소방이 언급했던 흠포사신이라는 별명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흥! 네 말대로라면 단 의원이 나더러 여기 있으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범계위가 버럭 했다.
“하는 것도 없이 매일같이 칼만 휘둘러 대면서 왜 대체 강해지지 않는 거냐고!”
쩌렁한 범계위의 음성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담벼락 너머, 혹은 전각 뒤쪽에서 범계위의 눈을 피하고 있던 해남도의 무인들은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애초에 범계위가 정해 놓은 기준이 높아도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이 다른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가 벽화령 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번 중원행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자신들이 수장시킨 배가 몇 척이고 물귀신으로 만든 수적들이 대체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덕분에 자신들을 바라보던 중원 무림인들의 시선도 많이 바뀌었다.
한데 이번 중원행을 통해 기껏 회복한 자신감이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번 기회에 미뤄 두었던 지옥 훈련을 시작해야겠어.”
얼굴이 허옇게 뜬 해남 문도들을 대신해 벽대경이 황급히 범계위를 만류했다.
“커험, 사위도 알고 있다시피 아직도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훈련은 일단 미루는 게…….”
“괜찮습니다. 전투는 전투고 훈련은 훈련이니까요.”
“훈련으로 녹초가 되어 버리면 정작 실전에서는…….”
벽대경이 정색하며 이유를 댔지만 이번에도 범계위의 말에 가로막혔다.
“여기 단 의원은 실전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수련을 계속했습니다. 그치? 단 의원.”
“그랬었죠.”
단악선의 대답에 벽대경은 그만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런 벽대경을 곤경에서 구해 준 사람도 단악선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경우가 좀 다르죠. 저야 범 아저씨가 집중적으로 저만 지도해 주셨으니까요.”
힘들었지만 새삼 돌이켜 생각하니 그 시절이 그리워진 단악선이었다.
“초 아저씨도, 한 아주머니도 훌륭한 스승이셨지만 범 아저씨의 가르침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시종일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던 범계위가 비로소 씨익 웃었다.
“그치? 역시 나밖에 없지?”
“그럼요. 아저씨는 항상 최고였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기분이 좋아진 범계위가 싱글벙글하는 사이 단악선이 벽대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벽대경은 그런 단악선에게 새삼 고마웠다.
일단 기분이 풀린 이상 당장은 지옥 훈련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야, 너.”
“네. 선배님!”
즉각 대답한 방소방이 쪼르르 범계위에게 달려갔다.
“앞으로 한동안은 너와 단 의원이 함께 움직일 테니 내가 몇 수 가르쳐 주지.”
“예? 갑자기요?”
갑작스레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방소방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위험하다!’
범계위가 훈련을 언급했을 때 학을 떼던 해남 문도들의 반응을 본 이상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방소방이 표정을 달리했다.
“네가 단 의원과 동행할 자격이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괜히 단 의원에게 짐만 될 것 같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소방이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 악명 자자한 범계위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두려움을 넘어선 열망이 방소방을 지배했다.
어린 시절에는 나름 무재를 타고났다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단악선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늘 부족함을 느껴 왔던 그였다.
실제로도 수련에만 매진했던 자신과 달리 단악선은 늘 험난한 사지를 넘나들며 마교와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 왔었다.
도움이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는 무력감.
그 더러운 기분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신 전대 개방 방주였던 사부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라도 현재 수준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당당히 친구로서 나란히 함께 단악선 곁을 지켜 주고 싶었다.
씨익 웃은 범계위가 턱 끝을 까닥였다.
“좋아. 그럼 들어와, 후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