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77)
신마의선-477화(477/500)
신마의선 (477)
“무위의 단가 악선이 화산의 장문인이신 청심홍매 어르신을 뵙습니다.”
“오랜만일세.”
단악선이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자 진현진인도 마주 예의를 갖췄다.
그러다 잠시 물끄러미 단악선을 응시하곤 슬쩍 웃었다.
“오래전 선자의 손을 잡고 산문을 넘던 그 소년이 지금은 헌앙한 장부가 되었군.”
이 순간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는 진현진인이었다.
그리고 단악선을 처음 만난 무한을 떠올렸다.
당시 무림맹주였던 남궁백 여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초빙되었을 당시, 화산의 검수들을 대동해 단악선을 마중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이 던졌던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하던 단악선의 모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바다는 강물을 마다치 않고 받아들인다 했던가.’
바다를 꿈꾸던 그 어린 소년은 이제 중원 무림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 되어 있었다.
“오늘을 위해 기꺼이 장소를 내어 주신 장문인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오히려 빈도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화산을 비롯한 중원의 모든 무림인 중 그대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이번 회합은 더없이 중요한 사안을 다룰 터.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 드려야지.”
그때였다.
“악선아!”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음성에 단악선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날 듯이 달려오는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굉성자 형!”
자신도 모르게 화답하던 단악선이 뒤늦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곤륜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예의를 갖춰 맞이하는 단악선의 모습에 굉성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이곳에 곤륜의 장문인 신분으로 방문했다.
앞선 마교와의 싸움에서 근간까지 크게 흔들린 곤륜이었다.
높은 항렬의 고수들은 천마를 죽이기 위해 폭사했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굉 자 배 이하가 전부.
굉성자의 사형들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폐관에 들어갔고, 누구보다 자질이 뛰어난 그를 장문인으로 추대해 곤륜의 초석을 처음부터 다시 다지기로 결정했다.
곤륜의 재건을 위해 허례허식이나 관습은 모두 내려놓은, 과감한 결정이었다.
굉성자는 한동안 말없이 단악선을 응시했다.
단악선 역시 마찬가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용맹정진의 기세로 자신을 담금질하던 청년 도사는 이제 삽심 대 중반을 넘어 제법 관록 있는 외모와 분위기를 지닌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나 눈빛에서 느껴지는 힘과 패기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었다.
십 년 만에 단악선을 다시 조우한 굉성자 역시 그 나름대로 마음이 복잡했다.
반가운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서로를 둘러싼 상황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길 잠시.
“부탁인데, 우리끼리는 편하게 대화하자.”
약간의 시간이 지나 굉성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 형.”
“많이 변했네. 이렇게 다시 봐서 다행이다.”
굉성자가 단악선의 손을 잡더니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미안하다.”
“……?”
“이렇게 반가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이 곤혹스러운 듯 잠시 말을 흐리던 굉성자가 마음을 굳힌 듯 사과를 건네 왔다.
“이번 수로연맹 토벌에 우리 곤륜은 참여할 수 없다. 그 말을 하러 이렇게 온 거야.”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성자의 수심 어린 표정만 봐도 얼마나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을지 눈에 선했다.
“이해해. 지금의 곤륜은 그 여느 때보다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이렇게 직접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당금의 곤륜은 그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라진 삼성요를 복원하는 것도 몇 해가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선대의 고수들이 사라지며 함께 실전된 무공을 되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성자의 눈빛과 음성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백절불굴(百折不屈), 이환위리(以患爲利). 그게 우리 곤륜의 정신이다.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 모르나 곤륜은 다시 일어설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백 번 부러져도 굴복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해 오히려 위기로 삼는다는 의미.
단악선이 그 말을 받았다.
“복수초라는 꽃이 있어.”
영문 모를 말에 잠시 의아해하던 굉성자는 이어진 단악선의 설명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에서 버티고 버티다 그 위에 쌓인 얼음과 눈을 뚫고 올라와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야. 겨울이 길면 길수록, 바람이 차면 찰수록 유독 선명한 꽃망울을 터트린다고 해.”
“마치 지금의 우리와 같군.”
“언젠가 들려올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니 형도 미안함은 털어 버리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매진해.”
“고맙다. 반드시 그리하마.”
맞잡은 손에 힘을 준 굉성자가 흔들림 없는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화산의 명검이었다.
이 순간 명검은 어째서 단악선이 굉성자를 만나 보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연배였다.
각자 사문만 다를 뿐, 무공에 입문한 시기도 비슷했고 무림에서 활동한 시기도 겹쳤다.
한때는 매화검수를 이끄는 매화총검으로서 더 높은 명성을 구가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굉성자는 일문을 책임지는 장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명검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명검이 굉성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산의 명검이 곤륜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잔의 차를 대접해 올려도 될는지요?”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던 굉성자가 이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좋지요. 당대 매화총검께서 타 주시는 차라니. 분명 그 맛도 각별할 테지요?”
신분을 떠나 기꺼이 자신의 제안에 응해 준 굉성자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명검이 고개를 숙였다.
단악선이 나란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서 도착해 있던 각파의 명숙들이 자신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단악선이 그때부터 열심히 발품을 들이기 시작했다.
안면이 있던 이들과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 한편, 그들이 소개하는 지인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회합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던 그때.
“우리 단 소협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요.”
어디선가 들려온 인자한 음성에 중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오십여 명의 여승을 이끈 채 장내로 들어서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단악선의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세월이 무색하게 주름 한 점 없는 홍안.
체구는 왜소했으나 오랜 수양을 통해 얻은 눈빛만큼은 더없이 시리고 단단한 여승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단악선은 반가운 미소로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아버지 때부터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아미파.
그리고 그곳의 장문인인 정연신니(正然神尼)는 오랜 시간 변함없이 자신을 아끼고 지지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옥체 강녕하셨습니까.”
이제는 훤칠한 청년의 모습을 갖춘 단악선을 정연신니는 잠시 소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리도 늠름해지다니……. 빈니가 알던 십 년 전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구나.”
“덕분에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습니다. 그때 베풀어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호의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을. 우리가 어디 남인가.”
그렇게 말한 정연신니가 가만히 손을 뻗어 단악선을 끌어안았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누. 언젠가 이리 다시 볼 것을 내 믿어 의심치는 않았네만, 그래도 늘 무사하기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네.”
이미 정연신니보다 훨씬 키가 커진 단악선이었다.
그런데도 단악선은 진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가만히 단악선을 올려다보던 정연신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앞으로 우리 아미 쪽으로는 한동안 방문을 자제하시게.”
“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요?”
단악선이 놀라 되묻자 정연신니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우리 같은 할미야 상관없지만, 속세를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린 비구니들이 네 모습을 보고 환속하겠다며 절을 뛰쳐나가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뒤늦게 농담임을 깨달은 단악선이 안도하며 다른 여승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사이 속속 회합에 참석하기 위한 각 지역의 명숙들 방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산도 있었다.
비록 얼마 전에 만났지만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소림이다!”
한눈에 봐도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일단의 무승들.
하나같이 육중한 선장을 지닌 채 산문을 넘는 그들은 소림의 정예인 나한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나한들을 이끄는 승려는 그야말로 왜소해서 훅 불면 그대로 날아갈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온화한 미소와 달리 두 눈만큼은 형형한 안광을 품고 있었다.
이마 위로 자리 잡은 흐릿한 계인만큼이나 온몸으로 세월을 짊어진 노승.
당대 소림의 가장 높은 웃어른이자 소림의 모든 대사를 결정하는 방장, 법연(法然) 대사가 바로 그였다.
명아주 나무를 꼬아 만든 선장으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오는 그의 곁에는 소림의 계율원주이자 천하오절의 한자리를 차지고 있는 법료가 함께 하고 있었다.
범계위의 혼례가 있었던 해남도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법연이었다.
그사이 눈에 띄게 노쇠해진 그의 모습에 단악선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 방소방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의발(衣鉢)을 물려줄 준비를 하신다더니…….’
선종 일맥 대대로 전승되는 의발.
즉, 가사와 바리때를 물려주는 것은 향후 불제자를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자 역할을 맡긴다는 의미였다.
소림을 이끌었던 한 시대의 별이 입적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진현진인이 공손하게 법연과 그 일행을 맞이해 안으로 이끌었다.
단악선을 지나치며 법연이 짧은 인사를 건네 왔다.
법료 역시 마찬가지.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법연에게 상석을 양보한 진현진인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정식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금일 회합을 요청한 것은 제갈세가의 가주님이신 만큼 빈도는 그분께 전적으로 발언권을 맡기겠습니다.”
“장문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저와 뜻을 함께해 이 자리를 빛내 주시는 선배님들과 무림 동도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운을 뗀 제갈산은 현 무림 정세와 사종악을 중심으로 한 수로연맹이 사도련을 결성하기 위해 심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 가고 있음에 주목했다.
또한 사종악이 금기된 무공인 북명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이상 그를 좌시한다면 더 큰 혼란과 피바람을 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이대로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방관하면 우리는 후대에 얼굴을 들지 못할 죄인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수로연맹의 악행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성토한 제갈산이 사종악을 토벌할 것을 천명하자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단악선이 한 가지 제안을 한 것도 그때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뜻을 모으는 단체를 만들면 어떨까요?”
“무림맹을 부활시키자는 말입니까?”
제갈산의 반문에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무림맹과 달리 일시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협의체를 꾸리자는 뜻이에요.”
대부분이 고개를 갸웃하던 가운데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