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
신마의선-48화(48/500)
신마의선 (48)
사흘 후.
사무심은 드넓게 펼쳐진 초원으로 들어섰다.
장성을 지키는 관군과의 마찰을 피해 옥문관 방향으로 크게 돌아온 길이었다.
황량한 풍경과 메마른 먼지 바람.
과거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기에 익숙한 느낌이었다.
사무심이 경공을 펼쳐 초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던 사무심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저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서부터 달려오는 일단의 기마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도 공청석유의 효능인가?’
이처럼 먼 거리에서 상대의 기척을 감지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예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심이 품속에서 깃발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다소 빛바래고 오래되었지만 날아오르듯 날개를 편 매 문양만큼은 여전히 선명한 깃발이었다.
“……?”
사무심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였어야 할 기수들이 더욱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오십 장 남짓 남았을 때.
“허허.”
사무심은 내심 어이없어 웃음을 흘렸다.
온몸에서 내뿜는 상대의 노골적인 적의!
뒤늦게 기수들의 붉은 옷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혈운사(血雲沙)!’
피를 몰고 다니는 죽음의 모래.
운 나쁘게도 초원에 들어서자마자 악명 높은 마적단과 조우한 것이다.
개개인의 무위가 금의위의 정예 장수들과 필적한다는 무귀(武鬼)들.
중원인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동족조차 약탈하고 살해하는 악랄함으로 악명 높았다.
오죽하면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초원을 휩쓰는 메뚜기 떼인 비황(飛蝗)과 견줄까.
게다가 그 숫자만 무려 기백을 헤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눈앞의 기마는 고작해야 열 기 남짓.
아무래도 정탐을 위한 선발대인 듯싶었다.
문득 오래전에 저들과 얽혔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무모했지.’
십오 년 전.
혈운사와의 첫 조우를 떠올린 사무심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제아무리 새외에서 악명 자자한 혈운사라 할지라도 당시에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창술과 기마술을 지니고 있다 한들 무림의 고수인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망설임 없이 놈들에게 달려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 얼마 안 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일반적으로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무심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한데 아니었다.
말은 병기였다.
말과 기수의 중량, 거기에 달리는 말의 속도가 더해지면 그것만으로도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웬만한 무림 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한 기의 기마병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특히나 창을 내찌르는 순간은 그로서도 포착이 불가능했다.
말 위에서 찍어 내리듯 떨어지는 창의 궤적을 도저히 눈으로 좇을 수가 없었다.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만큼 상대의 공격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인마일체를 이룬 기마의 힘은 그만큼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어 마치 잘 정비된 군대 조직 같았다.
말을 이용한 신속한 추격, 그리고 머릿수를 이용한 차륜전 앞에서는 제법 명성 높은 고수였던 그조차 손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사무심은 등을 돌려야만 했다.
적 앞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이 밀려들었지만 메마른 황무지에 시체로 남겨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더구나 당시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줄줄이 딸려 있는 어린 목숨들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살아야 했다.
마침 근처에 무너져 가던 고성(古城)을 발견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곳곳에는 아직도 무너진 성벽이 즐비했고, 이를 이용해 말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었다.
사무심은 그 안에서 놈들이 스스로 지쳐 물러날 때까지 농성을 이어 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니, 지났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언제 해가 뜨고 해가 지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놈들은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결국 사무심은 끝까지 버텨 냈다.
그리고 초원에 왔던 목적을 완수할 수 있었다.
북벌 과정에서 사로잡혀 노예로 팔린 아이들을 그들의 부족에게 무사히 인계한 것이다.
그 인연의 상징이 지금 손에 든 깃발이었다.
당시의 북원(北元)을 이끌던 우두머리 대족장, 한(汗).
달연(達延) 한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던 것이다.
‘하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지.’
사무심이 투지를 끌어 올리며 전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달려오던 기마 무리에서 기마 한 기가 필마단기(匹馬單騎)의 기세로 치고 나왔다.
쉬익.
아슬아슬한 거리를 스치듯이 지나가며 벼락처럼 휘두른 창날이 사무심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무심은 이를 받아치지 않고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과거와 달리 상대의 동작과 창날의 궤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주화입마를 벗어나고 내공이 일취월장하면서 감각 또한 예리해진 것이다.
덕분에 결정적인 순간에 반걸음 물러서며 살짝 상체를 트는 것만으로도 창날을 피할 수 있었다.
“차아와스!”
목표를 놓친 상대가 대번 욕설을 터트리며 기수를 돌렸다.
반면 그가 한 말을 이해한 사무심은 슬쩍 웃음을 말아 올렸다.
‘진짜 빌어먹을 상황은 이제부터다.’
멀리서 왁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혈운사의 무리들을 뒤로한 채 사무심이 달려오는 기마를 향해 마주 달리기 시작했다.
“……!”
예상치 못한 사무심의 대응에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싶었지만 이내 악독한 눈빛을 흘리며 재차 창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새파란 불꽃을 튀기며 바닥을 긁어 낸 창날이 그대로 사무심을 쫓아왔다.
사무심이 이를 피하지 않고 마주 손을 내밀었다.
십성 전력을 담아 실어 낸 혼신의 일장이었다.
꽈앙!
창과 맨손이 부딪쳤음에도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세찬 경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손과 팔목에서 시작된 충격이 어깨까지 묵직하게 올라왔지만 사무심은 곧장 눈앞의 자욱한 먼지구름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바닥에 넘어져 버둥거리는 말과 그 아래 다리가 깔려 낑낑대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사무심과 눈이 마주친 상대가 황급히 단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사무심이 조금 더 빨랐다.
빠악!
달리던 기세 그대로 사무심의 무릎이 상대의 턱을 걷어 올렸다.
그 일격에 상대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널브러졌다.
‘이래서 공청석유, 공청석유 하나 보다.’
이 순간 사무심은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약에 매달리는 이유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청석유를 괜히 천고의 영약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토록 고전을 면치 못했던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결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넓고 넓은 강호에서 공청석유 같은 영약의 효험을 보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초악량과 범계위 같은 고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악선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한 번 가슴을 채웠다.
그런데 그 순간.
‘이것 봐라?’
주위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챈 사무심이 말에 깔린 채 혼절한 혈운사의 무인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막상 잡고 보니 이제 막 성인이 된 듯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정작 특이한 점은 따로 있었다.
평소라면 인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려들었을 혈운사의 무리들이 당황한 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인질로서 가치는 충분해 보이는군.’
사색이 된 저들의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희뿌연 먼지구름과 함께 얼추 봐도 이백 이상을 헤아리는 기마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를 본 혈운사가 이를 갈며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몰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무심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기마를 향해 다시 한 번 깃발을 높이 흔들었다.
다행히 그들은 사무심을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놀라 저들끼리 수군대더니 주인 없는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한 마리는 사무심이 타고, 다른 한 마리에는 기절한 혈운사 애송이를 실었다.
그리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에 도착했다.
저들 말로 ‘게르’라 부르는, 이동식 천막집이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사무심이 말에서 내리자 입구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던 장대한 체구의 청년이 덥석 그를 안았다.
사무심은 세월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예전에 그 꾀죄죄하고 말라 있던 아이가 지금은 이처럼 장성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놈은 뭡니까?”
청년의 물음에 사무심이 웃으며 저들의 언어로 대답했다.
“선물.”
* * *
사무심이 신마곡에 돌아온 것은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높게 뜬 밝은 달을 벗 삼아 신마곡에 들어선 사무심은 자신을 기다리는 단악선을 발견했다.
“오셨어요?”
하늘의 달보다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는 단악선의 미소에 사무심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절 기다리셨던 겁니까?”
“산책 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곤 곧장 사무심에게 다가와 진맥부터 하는 단악선이었다.
그런 단악선의 모습에 사무심이 멋쩍게 웃었다.
“저는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딱히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단악선이 비로소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욕심을 줄일게요.”
“네?”
“총관님이 안 계시는 동안, 많이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 없이 영약을 사는 바람에 우리 재정이 많이 힘들어졌죠?”
단악선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치료에 필요했다고는 하지만, 제 욕심이 지나쳤던 건 사실이에요. 이제 자제할게요.”
사무심이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오히려 곡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결국 그 말씀이 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진심이 느껴지는 단악선의 염려에 사무심은 가슴 한편이 따듯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열심히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그럼 쉬세요.”
“네,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인사를 나눈 사무심은 단악선의 모습이 전각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신형을 돌렸다.
그 순간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선을 돌리니 언제 왔는지 범계위가 지척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무심이 경계심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전혀.”
“네?”
범계위가 억울한 표정으로 씩씩댔다.
“네가 사라지는 바람에 청소부터 빨래, 심지어 비둘기 모이 주는 것까지 전부 내 몫이었거든.”
“허허, 저런.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저런?”
범계위가 황당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냐? 그 해탈한 땡중 같은 말투는?”
“제가 그랬습니까? 불경스럽게 느껴졌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어쩌다 허드렛일을 모두 떠안게 되신 겁니까? 세 분이 적당히 일을 나누었다면 훨씬 수월하셨을 텐데요.”
범계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제비뽑기에서 졌어.”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초악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무덤을 판 게지. 먼저 한 사람에게 일을 몰아주자고 제안한 사람이 그 녀석이었거든.”
초악량이 삐죽거리는 범계위를 무시한 채 사무심을 향해 걸어왔다.
“갔던 일은 잘됐고?”
“다행히 무사히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사무심이 품속에서 몇 개의 깃발과 서한을 꺼냈다.
“새외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부족을 상징하는 문장과 신원을 보증한다는 내용의 친필 서한입니다.”
“그 두 개가 통행증을 대신하는 셈이군?”
“한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친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것입니다.”
초악량의 얼굴 위로 감탄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발이 넓은 건 알았지만 새외의 이민족들과도 교류가 있을 줄이야.”
사무심이 머쓱하게 웃었다.
“오래전 구해 줬던 아이가 지금은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북원(北元)의 한(汗)이었던 달연한의 후계자와 친분이 매우 두텁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그와 ‘안다’를 맺었다고 합니다.”
“안다?”
“저들 말로 의형제를 뜻합니다.”
그때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단을 꾸리려면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로 선배님께 따로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나한테?”
고개를 갸웃하던 범계위가 이어진 사무심의 말에 탄성을 흘렸다.
“아! 걔네가 있었지.”
범계위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써. 만약 녀석들이 뻗대면 나한테 말하고.”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모르면 몰랐을까 범계위를 겪고도 그에게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
“그럼 세 분 모두 쉬십시오.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쉬어라. 응? 근데 왜 셋이야?”
반문하던 범계위가 깜짝 놀라 뒤쪽을 바라봤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설화를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넌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
“…….”
모처럼 느끼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사무심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드러내 놓고 내색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반겨 주는 저들 나름의 환대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오랫동안 떠돌이로 지내 왔던 그가 비로소 돌아올 곳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