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2)
신마의선-482화(482/500)
신마의선 (482)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사종악은 속으로 몇 번이고 처절하게 되뇌었다.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진명진인을 쓰러트린 이후 하늘을 뚫을 것 같던 자부심이 단 일격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상을 향한 단 한 걸음.
그 한 발이 부족해서 겪는 좌절이라 더욱 뼈아팠다.
하나 고수들의 생사결이 원래 그렇듯, 상대의 역량을 잘못 판단한 순간부터 죽음은 피해 갈 수 없는 수순.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려던 그때.
슈슈슉!
난데없이 일대를 가득 메운 파공음에 사종악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허공을 빼곡하게 메운 무수한 강전이 그의 망막에 투영된 것도 그때였다.
쇠뇌를 통해 발사된 강전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표는 단악선이었다.
카카카캉.
요란한 폭음과 더불어 단악선을 향해 쇄도하던 강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 것도 동시였다.
어느새 단악선의 전면에는 반투명한 강기의 장막이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려 일 장에 달하는 선명한 벽!
빗방울조차 뚫지 못한다는 성락밀밀(星落密密)의 절학이 그 신위를 드러낸 것이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수십 명의 인영이 단악선을 향해 달려든 건 그 직후였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병장기가 들려 있었는데 저마다 섬뜩한 서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기생형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방증이었다.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한 명 한 명의 무위는 자신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그들의 합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톱니가 맞물리듯 절묘하게 공수가 배분된 일목요연한 흐름.
이를 통해 저들이 처음부터 한 명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대인합격진을 연마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숫자는 오십을 헤아리고 있었다.
‘역시 그랬어.’
단악선은 단번에 저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당금 강호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합격진을 구사할 수 있는 세력은 구파일방 정도.
하지만 저들은 무림인이 아니었다.
몸에 밴 삼엄한 군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저들이 사용하는 초식 역시 구파일방의 절초 중에서 위력적인 것만을 차용해 나름의 변화를 가미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세력은 단 한 곳뿐이었다.
‘동창.’
역시나 능소밀의 경고대로였다.
사종악을 포섭하기 위해 저들은 이만큼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단악선은 주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어차피 저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단악선도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빠악!
묵룡이 턱을 걷어 올리자 흑의인 한 명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우드득.
뒤이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으스러진 흑의인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초악량에게 배운 금나수와 보법.
범계위에게 배운 봉법.
거기에 한설화에게 배운 기공까지.
이미 그 모든 것을 위화신공을 통해 하나로 녹여 완성한 단악선에게 굳이 이 초는 필요 없었다.
단악선은 흑의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한 번씩 손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확실히 흑의인들의 숫자를 줄여 가고 있었다.
가공할 일격일살(一格一殺)의 신위.
멀리서 이를 응시하는 사종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가 덤비건 떼로 덤비건 소용이 없었다.
눈앞에 달려드는 적은 그 수가 얼마가 되었든 무자비하게 격살하는 단호한 손속.
차분한 눈빛으로 묵룡을 늘어트리고 있다가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한 번에 한 명씩, 혹은 몇 명씩 목숨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흑의인들이 죽어 나가자 아무리 냉혹한 사종악이라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유부에서 뛰쳐나온 나찰이 따로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침에는 마귀 삼천 마리, 저녁에는 삼백 마리를 먹어 치운다는 전설 속의 탄사귀(呑邪鬼).
척곽(尺郭)이라는 귀신이 지옥에서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장내는 순식간에 피와 죽음의 냄새로 채워졌다.
하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치 팔부중상(八部衆像) 가운데 아수라(阿修羅)가 속세에 현신한 것만 같군요.”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사종악이 흠칫했다.
언제 왔던 것일까.
어느새 그의 옆에 복잡한 눈빛을 흘리며 좌자가 서 있었다.
“낭보를 기대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요. 그나마 비보를 전해 듣지 않아 다행입니다.”
사종악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제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좋았을 것을.”
짧게 혀를 차는 좌자의 음성이 이 순간 더없이 아프게 사종악의 자존심을 휘저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크헉.”
좌자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자 사종악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온몸에 맺혀 있던 고통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댔기 때문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좌자의 말대로였다.
그 와중에도 또 한 명의 흑의인이 황천행 배에 몸을 싣고 있는 광경이 사종악의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
눈앞의 걸리적거리는 상대를 닥치는 대로 걷어 내는 그 가공할 무위 앞에는 그 어느 것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퍽.
끝까지 달려들던 마지막 흑의인이 가슴이 움푹 주저앉은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단악선이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이미 어디에서도 사종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감을 펼쳐 먼 곳까지 살폈지만 역시나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가 은폐(隱蔽)와 엄폐(掩蔽)에 관한 전문가가 분명한 이상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들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단악선은 그 길로 곧장 무한으로 향했다.
과거 무림맹이 있던 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약조했던 각파의 명숙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종악을 놓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수로연맹의 우두머리를 무력화했으니 이 기세를 몰아 단번에 그들을 쓸어 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속속 합류하기 시작한 광정회의 수뇌부 숫자가 얼추 의결권 안에 들어서자 단악선이 긴급하게 그들을 소집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수로맹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서둘렀으면 해요. 지금과 같은 적기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방금 적기라 하셨습니까?”
제갈산의 반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벌어져도 사종악은 전면에 나설 수가 없을 거예요.”
“어떻게 그리 단언하십니까?”
“한동안 자신의 부상을 수습하기에도 버거운 상태거든요.”
단악선은 사종악과의 대결을 간단히 언급했다.
사종악이 단악선에게 패배해 일패도지했다는 이야기에 중인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단 의원님 말씀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제갈산이 탁자 위에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그 안에는 지금껏 개방과 흑점을 통해 수집한 수로와 지금까지 파악한 수채들의 위치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삼십육계 가운데 진화타겁(趁火打劫)이 이래서 존재하나 봅니다.”
적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기회를 여세로 몰아 승리를 거머쥐는 건 책략의 기본 중의 기본.
제갈산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완전히 저들을 밀어 버리면 사종악이 운 좋게 회복한다 해도 더 이상 그가 발붙일 수채는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단악선의 말에 광정회의 모두가 전의를 불태웠다.
장강수로채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 전례 없는 대규모 토벌전.
그 전투는 그렇게 막 시작되었다.
* * *
한편 그 시각.
혼절해 있던 사종악이 모처의 동굴에서 눈을 떴다.
“깨어나셨습니까?”
“큭.”
반듯하게 누워 있던 사종악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붕대 곳곳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나를 치료한 것인가?”
사종악의 물음에 좌자가 조용히 웃었다.
“언젠가 필요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
의아해하던 사종악은 자신의 옆에 뒹굴고 있는 작은 목갑을 발견하고 씁쓸한 눈빛을 흘렸다.
태청신단이 담겨 있던 목갑이었다.
태청신단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효험을 지닌 치상단.
그나마 이렇게 빨리 운신할 수 있는 것도 그것 덕분이었다.
침울한 눈빛으로 침묵에 잠겨 있는 사종악을 향해 좌자가 위로를 건넸다.
“그리 낙담하실 것 없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다시 주어지기 마련이니까요.”
“기회?”
단악선의 무위를 다시 한 번 떠올린 사종악이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립(而立)도 채우지 못한 새파란 애송이에게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가혹한 법.
끔찍한 패배를 그렇게 곱씹고 있던 그때.
“광정회의 수로연맹 토벌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기세를 탄 이상 수로연맹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힘들게 일궈 놓은 모든 걸 포기하라는 것인가?”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어차피 사라질 자들이었으니까요.”
“뭐라?”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어차피 침몰하는 배. 붙잡고 있어 봐야 함께 수장될 뿐입니다. 더구나 애초에 제가 함께하고자 하는 분은 사 대협이었지 오합지졸의 수적 떨거지들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는 사종악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길 잠시.
좌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저도 사 대협의 대답을 듣고 싶군요. 앞선 세 번의 선물. 그 정도라면 나름 충분한 호의를 보인 것 같습니다만?”
태청신단과 단악선에 관한 정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구해 준 것까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사종악을 향해 좌자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중원 제패도 시간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사 대협께서는 고금제일의 신공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었나?”
“이제 와 숨길 게 뭐가 있을까요. 사실 그것 말고 우리가 사 대협과 손을 잡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인가? 내가 패배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쯧. 이런 한심한.”
“……!”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이 예의 바르게 행동해 오던 좌자가 난데없이 혀를 차자 사종악의 검미가 꿈틀했다.
“본공은 네게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걷어찬 것은 다름 아닌 네놈이니라. 그런데 이제 와 본공을 탓한다고?”
좌자의 입에서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네놈을 구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전력을 그 괴물의 아가리에 처넣었다! 처음부터 네놈이 내 말만 고분고분 들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단 말이다!”
여인이 소리를 지르듯 뾰족한 고성이 몹시 거슬렸지만 사종악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다시금 표정을 수습한 좌자가 한결 나긋나긋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신마의선. 그자의 무공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지만 분명 기회는 있습니다. 사 대협이 그를 넘어설 수 있는 재료가 우리에겐 충분하니까요.”
“재료……?”
좌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자에게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사종악의 눈빛에서 섬전 같은 안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널 어떻게 믿지?”
“믿을 필요 없습니다. 이미 우리 또한 큰 투자를 한 이상 돌이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건 위협인가?”
“저 역시 목이 걸린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