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3)
신마의선-483화(483/500)
신마의선 (483)
좌자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오월동주(吳越同舟)면 어떻고 동주공제(同舟共濟)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결국 강을 건너기 위해 같은 배를 타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을요.”
“…….”
“그나마 우리는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그래도 서로에게 의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좌자의 화려한 언변에 사종악이 피식 웃었다.
“좋아. 당신과 손을 잡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사종악이 말끝을 흐리자 좌자가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듯 웃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진 사종악의 말에 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채에서 데리고 와야 할 사람이 있다.”
“천의 말인가요?”
“그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서두르도록 하지요.”
이때 문득 생각난 듯 좌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수하들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려 두는 게 어떻습니까?”
“어떤 지시 말인가?”
“결사 항쟁으로 장렬히 옥쇄(玉碎)하라 명하는 겁니다.”
사종악이 일순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히 되물었다.
“시간을 벌자는 뜻인가?”
“그들은 아직까지 사 대협의 상태를 모르니까요. 게다가 서로를 상잔시켜 조금이라도 적의 전력을 소모한다면 이 또한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사종악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 * *
수로연맹과의 전면전을 천명한 직후.
광정회의 선전 포고는 파발과 전서구를 통해 중원 각지로 퍼져 나갔다.
마교와의 일전 이후 숨죽이며 피해를 수습하고 있던 구파일방이 전면에 나섰고, 수로연맹의 패악질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무인들도 정사 구분할 것 없이 속속 광정회의 깃발 아래 결집했다.
동시에 장강 전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장강과 잇닿은 각 주요 나루터마다 진열을 갖춘 선박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섰다.
출전을 앞둔 선박들.
그 배들의 깃대에는 하나같이 광정회를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을 맞이했다.
그 시작은 가장 북단에 위치한 한수채였다.
가장 먼저 출진한 선단의 선두에는 해남검파의 무인들이 승선해 있었고, 그 뒤를 따르는 후속 선단에는 개방의 방도들이 몸을 싣고 있었다.
선두의 해남검파가 주축이 되어 적을 들이받아 무너트리고 곧이어 개방이 합류해 뒤를 받치는 형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당혹성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대의 격렬한 저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느 때보다 단단한 각오와 준비를 마치고 나선 상태였다.
한데 예상외로 단 한 번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저 멀리 한수채가 눈에 들어오는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상대는 잠잠했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다른 개방 방도들과 다르게 해남검파 무인들과 함께 가장 선두에 나선 배에 타고 있던 방소방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완전히 텅 비었잖아?”
이윽고 한수채에 도착한 방소방이 허탈한 눈빛을 흘렸다.
방어 병력은커녕 쥐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한수채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인가?”
뒤늦게 수채 곳곳을 살핀 방소방이 어이없단 눈빛을 흘렸다.
수채에 남아 있지 않은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식량을 비롯한 온갖 물자들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가져가지 못하는 물품들은 모조리 태워 버렸고,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에는 독을 풀어 놓았다.
“감찰당주님! 여기 보십시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에 방소방이 신형을 날렸다.
그렇게 수채의 외진 곳에 도착한 방소방은 코를 감싸 쥔 채 사색이 된 개방 방도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거지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뻔뻔함만큼이나 후각 역시 악취에도 무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방소방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이 개자식들이…….”
깊게 파인 구덩이.
그 안에는 어지럽게 뒤엉킨 수십 구의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썩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시체 썩는 냄새만큼 고약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수적들이 납치해 노역을 시켰던 일반 백성들이 분명했다.
방소방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퇴각할 시간을 끌기 위해 놈들에게 살해로 입막음을 당한 것이다.
잠시 후.
구덩이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방소방의 지시에 따라 시신들 위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것이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길 잠시.
방소방이 깊이 읍을 해 사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염을 해 장례를 치러 주고 싶었지만 당장은 시간이 없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여러분의 원한을 기억해 반드시 그 죄를 묻겠습니다.’
천천히 돌아선 방소방이 해남검파의 무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서두릅시다. 그렇지 않으면 무고하고 죄 없는 희생자들이 더 늘어날지 모르오.”
해남검파의 무인들이 서둘러 배를 돌렸다.
그리고 역시나 방소방의 예상은 적중했다.
“망할!”
와지끈.
한수채를 지나 며칠 정도가 지났을 무렵.
속속 도착한 전서들을 확인한 방소방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이와 같은 일은 수채 한두 곳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보름 정도가 지나자 수로연맹 대부분의 수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곳은 오직 하나.
바로 광성채였다.
광성채로 향하는 지휘선.
그 안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수로연맹의 모든 전력이 이곳에 집결했다면…….”
제갈산의 말에 방소방이 차가운 눈빛을 흘렸다.
“어림잡아도 이만 이상.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선박도 백 척 이상일 겁니다.”
“각개 격파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겠죠?”
단악선의 말에 제갈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최선의 방책일 테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인 점이 있습니다.”
단악선과 시선을 마주한 제갈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저들의 전의가 꺾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종악이 건재하다면 저들이 동요하지 않고 항전을 준비하는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죠. 그들에게도 천의라는 뛰어난 의원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단악선은 내심 반신반의했다.
자신이 나서 치료한다 해도 당장 운신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종악의 부상은 심각하고 깊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우리 쪽 피해도 클 것 같습니다.”
제갈산의 말에 방소방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 정도의 대규모 수상전이라면 정면으로 격돌하는 것 자체가 적아 구분 없이 일단 인명 피해를 입고 시작하는 거니까요.”
“승산은 물론 우리 쪽에 있습니다만……. 역시, 피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승리를 거머쥐더라도 아군의 피해가 속출한다면 과거 신지에서의 결과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서 단악선의 고민은 깊어졌다.
예정대로 각 수채들을 각개 격파 했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였다.
“놈들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선수에서 전방을 확인하던 무인의 보고에 모두가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저 멀리.
단단하게 결집한 대규모 선박이 진열을 갖추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잘 정비된 적들의 대열과 삼엄한 기세를 마주한 단악선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상황이 썩 좋지 않군요.”
제갈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수상전에서는 전력이 비슷할 때 바람을 등진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배의 속도가 월등한 만큼 선박끼리의 충돌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화살도 멀리 나가기 때문이다.
적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서 불화살을 날려 상대의 돛을 태워 발을 묶는 건 수상전의 기본 중의 기본.
“일단 바람이 바뀌길 기다려야…….”
제갈산의 말에 단악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들이 기다려 줄까요?”
아니나 다를까.
수로연맹의 선박들이 일제히 돛을 펴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물 위에서의 싸움에는 이골이 난 자들.
이와 같이 천운이 따르는 호기를 놓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여전히 여유 만만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범계위였다.
“걱정 마, 단 의원.”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지자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나 혼자 가서 다 때려잡고 올게. 단 의원은 그저 멀리서 구경만 하면 돼.”
“아저씨에게 모든 짐을 넘길 수는 없어요.”
“짐은 무슨. 수적들 따위는 나한테…….”
자신만만하게 웃던 범계위가 갑자기 멈칫했다.
“망할!”
갑자기 와락 인상을 찌푸리는 범계위의 모습에 단악선의 의아하단 눈빛을 던졌다.
“왜 그러세요?”
“훼방꾼이 나타났어.”
“훼방꾼이요?”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 나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인간들.”
고개를 갸웃하던 단악선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기감을 최대한 확장해 일대를 살피던 단악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대로 시작하죠.”
“예? 하지만…….”
단악선의 말에 제갈산이 당황했다.
그러나 단악선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유리함만 못하고, 땅의 유리함도 사람들의 화합만 못하다는 말이 있죠?”
“그렇습니다만?”
단악선이 왜 갑자기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를 언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비록 천시와 지리는 저들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인화가 있거든요.”
갑자기 씩씩대는 범계위를 바라보던 제갈산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 인화라는 것이 혹시?”
그때 범계위가 분한 듯 콧김을 뿜어냈다.
“저 인간들은 왜 갑자기 기어 나온 거야?”
그 말에 제갈산은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둥둥.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광성채의 채주인 왕귀엽(王龜燁)의 쩌렁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지금이 기회다! 놈들을 쓸어 버려!”
“와아아!”
우렁한 함성으로 화답한 수적들이 일제히 배를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지휘선 위에서 전황을 가늠하던 왕귀엽이 히죽 웃었다.
마침 다행히 하늘이 도와 바람이 제대로 불어 주었다.
아무리 해남검파의 물귀신들이 대단하다 해도 천리(天理)는 거스를 수 없는 법.
수하들 역시 이를 잘 알기에 그 여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다.
“화전(火箭)을 준비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전한 노궁을 든 궁수들이 선수 쪽에 정렬했다.
이 정도 세기의 바람이라면 놈들보다 두 배 이상 유리한 사거리를 선점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놈들과 거리를 좁혀 가던 도중이었다.
“채주님! 전방 우측의 물 위에 누군가 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왕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일일이 보고한단 말인가.
“저쪽이라고 해서 너 같은 얼간이가 없겠느냐? 허둥대다 물에 빠져 예까지 떠내려왔나 보지.”
“그런데 그게…….”
“그게 뭐?”
“떠 있는 게 아니라 서 있는데요…….”
“뭐?”
수하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진 왕귀엽의 눈 위로 당혹감이 번져 갔다.
수하의 말대로였다.
두 발로 수면을 딛고 서 있는 인영.
‘여인?’
안력을 돋워 자세히 응시하던 왕귀엽은 이내 해연히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고수였다.
그것도 그로서는 감히 측량할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는 고수.
대종사 반열에 도달한 절대고수들은 등평도수(登萍渡水)와 같은, 이른바 수면을 밟고 달리는 수상비(水上飛)의 경공을 쓸 수 있다 들었지만 저렇게 가만히 물 위에 서 있는 무력답수(無力踏水)는 그로서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일위도강(一葦渡江)!’
소림의 초대 조사인 달마.
그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은 노엽달마(蘆葉達磨), 혹은 달마도강(達磨渡江)이라고도 불리는 전설이 떠올랐다.
자신을 추적하는 양 무제의 군사를 따돌리기 위해 갈댓잎 하나에 몸을 실어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소림칠십이절예 중에 아직 달마도강공이라는 경공 수련법이 남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여인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문득 왕귀엽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여인이 서 있는 곳만 유독 강물이 요동치지 않고 잠잠했다.
‘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