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4)
신마의선-484화(484/500)
신마의선 (484)
그녀가 딛고 서 있는 투명한 얼음의 존재를 깨닫는 그 순간.
쩌적.
여인의 발밑에서 시작된 얼음이 그녀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강물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를 목도한 왕귀엽은 황당함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평생 물질을 해 왔던 그들조차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기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강물을 통째로 얼려 버릴 만큼 기경할 빙공이라니!
“채주님!”
점차 범위를 넓혀 어느새 선두의 선박까지 다다른 얼음을 보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에 왕귀엽은 이를 악물었다.
“상관없다! 그대로 밀어붙여!”
아무리 눈앞의 상대가 대단한 고수라 해도 저렇게 얇은 얼음으로는 어차피 육중한 배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콰드득.
적들과의 충돌을 대비해 예리한 금속에 날을 세워 덧씌운 선수.
덕분에 선박은 속도가 조금 늦춰지긴 했지만 그대로 얼음을 부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흥!”
차디찬 냉소와 함께 여인이 힘껏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얼어 있던 강물 위로 예리하기 짝이 없는 수백 개의 얼음 창이 불쑥 솟구쳤다.
우지끈.
새하얀 포말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던 선박들이 덜컥 멈춰 선 것은 그 직후였다.
선수와 선저를 뚫고 파고든 거대한 얼음 창이 배를 지탱하던 용골을 박살 내 버리자 제아무리 단단한 배도 버틸 수가 없던 것이다.
“헉!”
누군가 헛바람을 들이켠 것도 그때였다.
“채, 채주님! 뒤를!”
뒤늦게 왕귀엽이 수하들의 당혹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뜩이나 빠른 속도로 진격하던 배들이었다.
그런데 선두의 배가 갑자기 멈춰 서자 속도를 줄이지 못한 후속 선박이 선회하지 못하고 빠르게 달려들고 있었다.
“노를 써라! 어떻게든 얼음을 부숴!”
왕귀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한번 멈춰 선 배는 요지부동.
그 어떤 수를 써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구멍 난 선저를 통해 이미 한바탕 강물이 쏟아져 들어온 상태.
게다가 그사이에 강물을 뒤덮은 얼음은 더욱 두껍고 견고해져 있었다.
그 바람에 뒤따르던 후속 선단이 잇따라 발이 묶인 선두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쿠웅!
와지끈!
수많은 선박이 순식간에 어지럽게 뒤엉켜 강물 한복판에 멈춰 섰다.
진열이 무너진 선박 곳곳은 이미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이때 왕귀엽을 보좌하던 수하 중 한 명이 뒤늦게 놀라 소리쳤다.
“빙옥선자! 빙옥선자 한설화입니다!”
“뭣? 그 여자가 왜?”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회자되는 여고수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왕귀엽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십 년 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가 왜 하필 이 자리에 뜬금없이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설마 저 사람은……?”
한설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왕귀엽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설화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 곁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오연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왕귀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혈수존자!’
그 순간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
여전히 얼어붙은 강물 한복판에는 한설화만 서 있었다.
처음에는 공포심에 헛것을 보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왕귀엽이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척에서 들려온 폭음과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콰앙!
“크아악!”
“괴, 괴물!”
“으아악!”
고개를 돌린 왕귀엽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폭풍처럼 선미를 휘젓는 가공할 경력.
살점과 피 보라가 난무하는 끔찍한 지옥도 속에서 전율스러운 눈빛을 흘리며 자신의 수하들을 주살하던 초악량과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네가 우두머리로군.”
서늘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 귓전에 날아와 박힌 것도 그때였다.
저벅.
시뻘건 피를 온통 뒤집어쓴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초악량의 모습에 왕귀엽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때.
“마음에 안 들어!”
우지끈!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거대한 인영이 뱃머리를 부수며 왕귀엽 앞을 막아섰다.
“적당히 해! 원래는 내 몫이었다고!”
범계위가 억울한 표정으로 초악량과 한설화를 번갈아 노려봤다.
모처럼 크게 활약할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초를 치는 인간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모두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쏠려 버린 것이다.
“매, 맹주님! 총채주께서는 어디 계시냐?”
뒤늦게 정신을 찾은 왕귀엽이 해연한 얼굴로 사종악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맹주님! 더 늦기 전에…….”
그러나 왕귀엽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시끄러워.”
퍼억.
범계위가 휘두른 대초자곤에 머리가 산산이 박살 나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잇값 못하는 건 여전하구나.”
초악량의 핀잔에 범계위가 어이없단 눈빛을 흘렸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 형이 나한테 나잇값을 논한다고?”
“뭐, 인마?”
“아무리 여자가 궁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 마녀와 연애할 생각을 해?”
“야, 너…….”
“그래도 찔리긴 하나 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컥!”
갑자기 튕겨 나간 범계위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에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얼음 칼 날아온다고.”
범계위가 벌떡 일어나 초악량을 노려봤다.
그러곤 이내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비겁하게 암습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마녀 너한테 따졌냐? 초 형한테 따졌지. 헉!”
범계위가 황급히 고개를 젖혔다.
스악.
그런 범계위의 눈 위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얼음 칼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마녀, 너…….”
으르렁거리던 범계위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살기가 휘몰아쳤다.
초악량이 웃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아무리 너라도 이 대 일은 버겁지 않을까?”
“응?”
잠시 의아해하던 범계위의 얼굴에 당혹감이 자리 잡았다.
“설마……?”
말없이 웃고만 있는 초악량을 향해 범계위가 버럭 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두 사람 정도씩이나 돼서 합공을 한다는 게?”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하지 않느냐.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게 당연하지.”
“이 비겁한…….”
길길이 날뛰려던 범계위는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억울하면 너도 화령이 데려오든가.”
물끄러미 초악량을 응시하던 범계위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쩝. 내가 졌수.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이걸 포기해?”
초악량이 슬쩍 웃으며 농을 건넸다.
“언제는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벌써 결혼 생활이 지겨워진 것이냐?”
이번엔 범계위가 코웃음을 쳤다.
“흥! 한창 달달한 신혼일 땐 이 자유의 소중함을 알 리가 없지. 어디 십 년 후에 두고 봅시다. 그때도 같은 소릴 하는지.”
두 사람의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배 위에 오른 단악선이 미소를 건네 왔기 때문이다.
“제때 와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초악량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모두가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그때였다.
“수로연맹의 악적들을 쓸어 내라!”
“와아아!”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에 고개를 돌린 단악선은 얼어붙은 강물 위를 내달리는 정파 무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수로연맹 측의 선박은 얼음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
무엇보다 강물이 단단히 얼어 있어 수상전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오로지 지닌바 무공으로만 싸워야 하는 상황.
그런 만큼 상대적 우세를 지닌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로연맹 측의 수적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맹주님께서는 아직이더냐!”
“총채주님!”
쉴 새 없이 사종악을 부르짖는 그들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자리 잡았다.
* * *
그 시각 사종악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있었다.
모든 전황을 굽어다 보던 사종악은 한설화와 초악량이 나서는 그 순간 승기가 완전히 저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이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 사종악이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그 모습에 그의 곁을 지키던 수하들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이대로 후퇴하시는 겁니까?”
“패색이 짙긴 하지만 아직 기회는…….”
만류하던 수하들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서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주인을 잃은 머리가 되어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
사종악이 입술을 짓씹었다.
치미는 노여움에 위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사종악은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곧장 천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단악선에게 당한 상처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광성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중지(重地).
그곳에 자리 잡은 전각은 탁여상이 머물며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각으로 쓰인 지 오래였다.
떠들썩한 수채와 다르게 항상 조용한 그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평소와 다르게 탁여상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러기예요?”
자신 앞에 부복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탁여상이 재차 소리쳤다.
“떠나시라고요! 제발 좀!”
사내들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탁여상을 응시했다.
앞서 사종악에게 당한 하불범과 더불어 늘 그녀 곁을 지켜 왔던 매종도라는 사내였다.
“저희들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마지막까지 천의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죽는다 해도요?”
“예?”
탁여상의 손에는 어느새 새파랗게 날이 선 비수가 들려 있었다.
이를 거꾸로 쥐고 자신의 목에 비수 끝을 가져다 댄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시죠? 전 한다면 하는 사람이란 거.”
“천의님!”
황급히 손을 뻗어 비수를 낚아채려던 매종도가 흠칫하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주룩.
이미 반 치 정도 피부를 파고든 비수를 따라 빨간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만큼은 살아야 해요. 지금까지 애써 왔던 그간의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하오나…….”
조심스레 입을 열던 매종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탁여상의 손에 들려 있던 비수는 조금 더 깊이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북명신공에 대비해 심어 두었던 독을 해독하는 방법은 모두 숙지하셨겠죠?”
“…….”
“당신들이 그자에게 인질로 잡히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부탁이에요. 더 이상 제 발목을 잡지 말아 주세요. 이젠 저도 지긋지긋하니까요.”
매몰찬 그녀의 말에 사내들의 눈 위로 진한 아픔이 떠올랐다.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차갑게 군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매종도는 고개를 떨구었다.
“부디 보중하시길.”
매종도가 신형을 일으켜 전각을 벗어났다.
이에 다른 사내들도 마지못해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렇게 자신을 따르던 무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탁여상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목에 난 자상을 지혈했다.
그러고 나서 한 차례 전각을 둘러봤다.
“여기서 끝내는 거야.”
“왜? 자결이라도 하게?”
“……!”
갑자기 들려온 사종악의 음성에 탁여상이 이를 악물었다.
사종악이 히죽 웃었다.
“꿈도 꾸지 마, 소상. 그런다 한들 넌 내 곁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이어진 사종악의 말에 탁여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