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7)
신마의선-487화(487/500)
신마의선 (487)
콰드드득!
가뜩이나 왜곡되고 뒤틀렸던 시야가 더욱 크게 요동치나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일대는 혼돈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단악선의 눈이 차갑게 번뜩인 것도 그때였다.
온통 암흑뿐인 공간을 더듬던 기감의 그물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한 명.’
사종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물은 하나뿐.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위화신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채 단악선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꽈직.
그 와중에도 연신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외부에서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진기와 진법의 기운이 충돌하며 빚어진 현상이었다.
실제로도 어지간한 고수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압력이 사방에서 들이치고 있었다.
단악선이 이를 악물었다.
정작 자신조차 이처럼 버거운데 하물며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여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쩌적.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억눌리고 뒤엉킨 진기들이 날뛰기 시작하던 그때.
단악선의 신형이 한 줄기 빛살처럼 전면을 향해 쏘아졌다.
저 멀리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흐릿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덥석.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단악선이 쓰러지는 인영을 붙들었다.
한눈에 봐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게다가 코와 입에서는 쉬지 않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법이 뒤틀리며 발생한 압력에 의해 내부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단악선이 급히 상대의 맥문을 통해 위화신공을 흘려 넣었다.
잠시 후.
한 차례 파르르 몸을 떤 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지독한 인간.”
“……?”
“진짜 따라왔네?”
잠시 의아해하던 단악선은 비로소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사종악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탁여상의 물음에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원래 그녀가 고안한 진법은 진입한 사람의 감각을 무력화해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시키는 목적일 뿐, 지금과 같은 살상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결과는 진법 자체를 파괴하면서 빚어진 부작용인 셈이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이걸로 당신의 악행도 끝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스르르 눈을 감는 탁여상을 단악선이 흔들어 깨웠다.
“정신 차리고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곧 진법이 무너질 거예요.”
그렇게 말을 건네는 한편, 단악선은 탁여상의 몸에 흘려 넣은 위화신공으로 그녀의 진탕된 기맥을 단단히 붙들었다.
다시금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탁여상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 나왔다.
“누구……?”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예요. 머지않아 충격파가 들이닥칠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초점 없이 흐릿하던 탁여상의 눈동자가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예상치 못한 낯선 이의 얼굴을 마주한 탁여상이 흠칫하며 굳어졌다.
“어떻게 여길?”
“실수로 휩쓸린 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부드러운 미소와 차분한 음성.
그리고 맥문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따듯한 기운에 탁여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손을 떨쳐 낼 수도 없었다.
온몸이 젖은 종이처럼 무거워 제대로 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옵니다.”
그 말과 함께 단악선이 탁여상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드드드.
대지가 요동치며 비명을 질러 대나 싶더니 이내 하늘까지 주저앉으며 일대의 공간 자체가 송두리째 붕괴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끔찍하리만치 사나운 기파의 칼날이 사정없이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강기에 버금가는 경력의 소용돌이.
그 앞에 버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풍경을 마주한 단악선이 곤혹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실로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마삼존에 천하오절 두 명이 가세해 전력으로 쏟아붓는 경력은 탁여상이 설계한 진법의 위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계산 착오였다.
진법이 지닌 힘을 너무나 높게 상정한 것이 실수였다.
두 힘이 어느 정도 상쇄된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 들이닥치는 충격파는 단악선조차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단악선이 더욱 세게 탁여상을 끌어안았다.
상황이 이리된 이상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버티는 것만큼은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쿠웅.
귀가 먹먹해질 만큼 육중한 압력이 전신을 찍어 누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 *
콰콰콰콰콰!
천지를 송두리째 날려 버릴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반경 이십 장 안의 공간이 그대로 움푹 주저앉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먼지구름.
그 사이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조각의 비를 맞으면서도 범계위는 뚫어져라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괜찮을까?”
범계위의 물음에 초악량이 대답했다.
“무사할 게다. 아마도…….”
그러나 말과는 달리 초악량의 눈빛과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는 한설화나 법료, 강위룡 역시 마찬가지.
단악선의 지시를 철저하게 이행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진법이 빨리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자신들의 합공이 이 정도로 전율스러운 위력을 끌어낼 줄은 정작 손을 쓴 당사자들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전각이 위치해 있던 곳을 주시하던 것도 잠시.
그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단악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 의원!”
가장 먼저 범계위가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이던 단악선이 창백한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범계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그 말대로였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한 흰자위는 말할 것도 없었고, 갈가리 찢겨 넝마처럼 변한 의복 사이로 드러난 맨살 위로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내상도 입었는지 입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은 지금도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치료부터 하자꾸나.”
어느새 지척에 도착한 한설화가 단악선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단악선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잠시만요. 저보다 치료가 시급한 환자가 있어요.”
그제야 한설화는 단악선 뒤쪽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계집애가 천의야?”
어딘가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한 범계위의 음성에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는 그인 만큼 이 고생을 하게 만든 당사자가 달가울 리 만무한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단악선은 떨리는 손으로 탁여상의 몸 곳곳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힘을 쥐어짜 가까스로 응급 처치를 마친 단악선이 길게 바닥에 누워 버렸다.
그러곤 한 차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저와 이분을 신마곡으로 데려다주세요. 아무래도 성수신단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게 단악선이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 * *
광정회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된 장강수로연맹과의 일전은 무림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 놓았다.
기존에 사종악과 수로연맹을 따르던 무리들은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간의 악행으로 원한을 샀던 이들 중 몇몇은 살아남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렸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대부분은 봉문을 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광정회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더불어 각 위소에서 파견되었던 군 병력도 속속 철수하며 강호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제갈산은 광정회의 이름으로 전 무림에 승리를 선포하며 한 가지 선언을 더 했다.
향후 광정회는 본래의 취지에 걸맞게 마교 토벌과 수로연맹 토벌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지원에 집중할 것이며, 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력 단체로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무림 위에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중원의 맹약에 따라 광정회와 다시 마주하리라!
제갈산의 선언에 무림인들은 다시 한 번 환호했다.
이미 앞서 폐해를 겪어 봤기에 구파일방의 결집된 무력이 기존의 무림맹 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따라서 권력을 강화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은 광정회의 행보를 무림인 대다수가 크게 반겼다.
막혀 있던 물길을 확보한 신마상단은 남쪽으로 대규모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잃었던 상권 대부분을 빠르게 회복했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해남검파의 위상은 그 여느 때보다 크게 높아졌다.
세가 기운 곤륜을 대신해 해남검파가 새로운 구대문파 중 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문주인 벽대경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문파의 명예나 번영도 중요하지만 중원 무림의 결속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해남파의 결정을 높게 평가했다.
덕분에 해남검파는 성공적으로 중원 진출을 인정받게 되었다.
중원 각지에 뿌리내리고 있던 표국과 연계해 장강의 물길을 수호하는 무림문파로서 그 위치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 * *
광정회와 수로연맹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진 지 세 달이 지났을 무렵.
누군가가 신마곡을 방문했다.
“단 의원!”
계곡에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쩌렁한 목소리로 단악선을 찾는 음성에 미리 전갈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사무심이 환하게 웃으며 범계위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범 선배님.”
“잘 지냈냐, 돈 귀신?”
“하하. 언제 적 말씀을…….”
손사래를 치던 사무심이 범계위 뒤를 따라오던 벽화령과 범려화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벽화령은 오래전 이곳을 방문해 본 적이 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범려화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선경을 방불케 하는 신마곡 곳곳을 둘러보며 연신 탄성을 흘리고 있었다.
“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신마곡이군요?”
기뻐하는 딸의 모습을 본 범계위가 한껏 으스댔다.
“어때? 아빠 말대로지?”
“아뇨.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요.”
“하하.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면 돼.”
사무심이 벽화령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뒤 범려화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나란히 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사무심과 눈이 마주친 범려화가 쪼르르 달려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려화예요, 범려화. 사 총관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헤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서일까.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범려화였다.
그 해맑은 미소에 사무심은 신마곡 전체가 더욱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무심이었다.
그런 만큼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일찌감치 통달한 그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심이 등 뒤에서 슬쩍 꺼낸 당과를 발견한 범려화가 뛸 듯이 기뻐하며 이를 덥석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기뻐하는 범려화의 모습에 사무심도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때였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돌린 벽화령이 빙긋 웃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
초악량과 한설화의 손에도 온갖 간식이 담긴 광주리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벽화령이 건넨 미소에 한설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초악량이 대신 입을 열었다.
“이제 제법 엄마 같구나. 보기 좋다.”
“두 분도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초악량이 머쓱하게 웃었다.
“축하는 무슨. 다 늙어 주책이라는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이지.”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던 범려화가 재빨리 앞으로 나선 것도 그때였다.
“안녕하……. 헙! 왜 그래? 아빠!”
범려화가 자신의 입을 막는 커다란 손을 떼어 내며 귀여운 아미를 한껏 찡그렸다.
그러나 정작 범계위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 딸. 저 사람들한테는 인사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