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88)
신마의선-488화(488/500)
신마의선 (488)
“어? 왜요? 저분들이 바로 초 백부님과 한 백모님 아니신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범려화를 향해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긴 한데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어.”
“하지만…….”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던 범려화가 초악량과 범계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초악량이 어이없단 눈빛을 흘렸다.
“넌 왜 오자마자 또 시비냐?”
한설화도 지그시 범계위를 노려봤다.
그래도 범려화가 함께 있어 평소와 다르게 날 선 핀잔은 애써 속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 눈빛만큼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범계위는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을 마주 쏘아봤다.
“흥! 난 또 어디 여행이라도 갔나 싶었지.”
“뭐?”
“아니, 그렇잖수. 단 의원 지키라고 붙여 뒀더니 엉뚱하게 두 사람이 붙어 버리고 말이야.”
“뭐, 인마?”
초악량은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비란 작자가 딸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점점 얼어붙기 시작한 한설화의 발밑을 눈치채지 못한 채 범계위가 따지듯 말을 이어 갔다.
“어디 그뿐이야? 단 의원이 이번 일 해결하기 위해 발바닥에 땀 나게 무림을 뛰어다닐 때 연애에 눈이 멀어 나 몰라라 하다가 막판에 겨우 나타나 생색만 잔뜩 내고서는 뭐? 시비?”
“너 이…….”
끓어오르는 노기를 애써 참는 초악량과 달리 한설화는 굳이 참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사 총관.”
이어질 상황을 짐작한 사무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범려화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저쪽으로 갈까요? 저 폭포 아래 연못에 화리(火鯉)들이 사는데, 먹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정말요?”
선뜻 사무심을 따라나서는 범려화의 모습에 한설화가 천천히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범계위는 눈치도 없이 그런 그녀에게 되지도 않는 비난을 퍼부었다.
“마녀 너도 그래. 너 때문에 장강에 물고기가 안 잡혀서 어부들이 울상이래.”
“무슨 헛소리야?”
“몇 달 전에 그 난리를 치는 통에 죄다 얼어 죽었다던데?”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대단해도 장강 전체를 얼릴 수는 없었다.
괜히 시비 걸 게 없으니 아무 말이나 주워 담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그렇듯 천적은 존재하기 마련.
막무가내로 떠들어 대는 범계위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벽화령이다.
그 모습을 일별한 초악량이 슬쩍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렇다니 어쩔 수가 없군.”
“응? 뭐가 말이유?”
무심코 반문하던 범계위가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피식 웃었다.
“모처럼 려화를 보게 되어 선물 삼아 무언가 한 수라도 전해 줄까 싶었는데, 애써 고민한 보람도 없게 되었어.”
“훗.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 걱정 마슈. 내가 가르쳐 주면 되니까. 어차피 초 형의 조잡한 무공보다야 내가 훨씬 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던 범계위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갑자기 옆구리 부근이 따끔해지나 싶더니 그 고통이 점차 배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벽화령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가가?”
자신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으며 미소 짓는 그 모습에 범계위가 흠칫했다.
“설마 우리 아이에게 그 흉측한 대초자곤을 물려줄 생각은 아니시죠?”
“어? 그, 그게…….”
“지금은 어리지만 몇 해만 지나면 려화도 꽃다운 나이가 될 거에요. 그런데 가시 비죽한 대초자곤을 끼고 있으면 참 보기 좋겠다. 그죠?”
마른침을 삼키는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쐐기를 박았다.
“적어도 부모라면 딸자식 혼삿길을 막지는 말아야죠. 안 그래요? 가가?”
꿩 잡는 건 매라더니, 딱 그 말대로였다.
미소 너머로 도사리고 있는 아내의 살벌한 눈빛에 범계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알았어. 내 여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시겠네요?”
범계위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되잖아. 하면…….”
범계위가 범려화를 손짓해 불렀다.
“딸아! 와서 인사 올려라! 정 내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괜찮겠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범려화가 가던 길을 멈추고 쪼르르 달려왔다.
“헤헤, 백부님. 그리고 백모님. 두 분 다 정말 많이 뵙고 싶었어요.”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오는 범려화의 모습에 초악량과 한설화도 마주 미소 지었다.
봄날의 햇살 같은 구김살 없는 미소를 마주하고 있자니 얼음장처럼 식었던 마음이 어느새 눈 녹듯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범려화를 빤히 응시하던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네? 뭐가요?”
“엄마를 닮아서.”
범계위가 순간 발끈했지만 때마침 자신의 팔을 감싸 안는 벽화령 때문에 눈썹을 부들대며 애써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범계위만 제외하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범려화의 말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기를 잠시.
떠드느라 배가 고팠던지 범려화가 간식을 베어 문 틈을 놓치지 않고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단 의원은?”
“탁 소저와 이야기 중이다.”
“탁 소저?”
“천의 말이다. 최근 들어 부쩍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치료는 다 마쳤다 하지 않았수?”
“진즉에 끝났지.”
“그럼 왜?”
“근래 들어 의술과 진법을 두고 의견을 자주 나누곤 한다. 곧 끝날 테니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라.”
내심 탁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범계위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툴툴댔다.
“난 걔가 영 내키지 않아.”
“아서라.”
“뭐가 말이유?”
“괜히 단 의원 앞에서 그런 이야기 꺼낼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범계위도 뒤늦게 아차 싶었다.
“단 의원도 이제 삼 년만 지나면 이립이다. 저러다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쳇. 누가 뭐랬수?”
괜히 멋쩍어진 범계위가 애꿎은 하늘만 노려보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한편 같은 시각.
단악선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탁여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뜨겁던 찻잔이 식어 갈 무렵, 탁여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도 그렇게까지 제게 광적으로 집착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운을 뗀 탁여상이 한 모금의 차로 입술을 축인 뒤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마공을 괜히 마공이라 부르는 게 아니더군요.”
북명신공을 익힌 뒤 사종악은 예전과 같은 사람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
“지금 와서 아무리 후회한다 해도 저로 인해 이 모든 비극이 벌어졌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걸 안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는 같은 선택을 내릴 거예요.”
그때까지 말없이 듣고 있던 단악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라도 많이 고민했을 테죠. 죽어 가는 환자들을 보고도 의원으로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은 저 역시 몇 번이고 겪어 봤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성급했어요.”
“하지만…….”
단악선이 손을 들어 탁여상의 말을 제지했다.
“철혼유마심공(鐵魂由魔心功)이라는 심공이 있어요. 대대로 천마만이 익혀 온 일종의 지존공(至尊功)이죠.”
잠시 의아함을 드러내던 탁여상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 자체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신공절학은 아니에요.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정신과 의지에 관한 공부에 가깝죠. 마치 소림의 역근경을 뒷받침하는 세수경처럼요.”
천마는 비록 마공을 익혔다 하나 나름 대종사다운 품위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종악은 아니었다.
힘에 심취한 나머지 더욱 큰 힘을 갈구하게 되었고, 결국 그 힘에 집어삼켜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양심마저 내던지고 북명신공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마교 내에서도 오직 천마만이 북명신공을 익혀 왔던 건 그만큼 위험한 무공이기 때문이에요. 정신적인 토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명신공을 익히는 건 불장난을 좋아하는 아이 손에 화약을 올려 준 것과 다름없죠.”
“전…… 그것까진 몰랐어요.”
“그러니 더 신중했어야죠.”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탁여상이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단악선은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기에 멈추지 않았다.
“탁 의원님도, 그리고 저도 의원이에요. 그렇죠?”
“……?”
“우리처럼 행림에 몸담은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누구일까요?”
“글쎄요? 돌팔이 가짜 의원?”
말해 놓고도 탁여상은 아차 싶었다.
천하의 단악선이 이런 시시한 답을 원하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뜻밖에도 단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실 단악선은 처음부터 그녀가 내놓을 답에 따라 각기 다른 답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당황한 탁여상을 향해 단악선이 재차 물었다.
“만약 어떤 의원이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치료법으로 섣불리 환자를 치료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환자가 죽었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그야…….”
무심코 대답하려던 탁여상이 아미를 찡그렸다.
“설마 제가 돌팔이란 말씀이신가요?”
“뭐가 다르죠?”
다른 건 몰라도 돌팔이라는 말에는 그녀도 발끈했다.
“당신!”
“분명 방금 전에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것까진 몰랐다고.”
“……!”
할 말이 없어진 탁여상이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
“알아요.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당시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걸. 그래도 사종악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당사자로서 그 책임마저 회피할 순 없어요.”
“…….”
“의원으로서 우리는 항상 선택을 내려야 해요. 그리고 매번 그 선택이 옳을 수는 없죠. 다만 계속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쓸 뿐. 하나 그것이 우리의 면죄부가 되어 주진 않아요.”
그 말에 탁여상은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전……, 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것도 잠시.
퐁.
탁여상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찻잔 위로 떨어졌다.
눈앞의 단악선은 그 무서운 사종악조차 패배시킨 엄청난 고수였다.
한데 무공을 드러내 겁박하거나 협박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시종일관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유책 사유를 조목조목 정확히 짚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차분한 목소리가 대놓고 두들겨 패는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철이 들고 나서 이렇게 자신을 통렬하게 꾸짖어 준 이가 과연 있었던가.
그렇게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출 수가 없었다.
“흐윽.”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오열이 새어 나왔다.
의지를 벗어나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탁여상이 다탁에 엎드려 흐느꼈다.
“잘못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사종악의 악행.
그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향한 사죄였고 눈물이었다.
이를 알기에 단악선은 더없이 마음이 착잡해졌다.
만약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지 선뜻 자신할 수 없었다.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다만 그녀와 자신의 차이라면…….
‘나는 운이 좋았구나.’
초악량과 범계위.
그리고 한설화.
기꺼이 자신을 위해 마음의 자리를 내어 준 그들을 만났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