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91)
신마의선-491화(491/500)
신마의선 (491)
한설화가 돌아간 뒤.
그녀와 관련된 지금까지의 진료 자료들을 정리한 단악선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밤은 깊어, 저만치 기울어진 호젓한 달빛이 신마곡 전체를 모로 비추고 있었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폭포와 연못 속에서 흔들리는 별빛을 눈에 담길 잠시.
천천히 눈을 감은 단악선이 인기척을 깊이 갈무리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서 모처럼 느긋하게 평화로운 밤의 정취를 만끽하던 그때.
어디선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바로 벽화령과 탁여상이었다.
서먹했던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진 분위기였다.
‘하긴.’
범려화의 벌모세수를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던 것에는 탁여상의 공도 적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행림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여의원.
부인과 증상과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보다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나 아무래도 사내인 자신보다는 같은 여인인 탁여상이 대화하기 수월할 터.
가급적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단악선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이미 두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터라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고스란히 단악선에게 들려왔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요?”
벽화령의 물음에 탁여상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앞으로 죗값을 치르며 살아가야겠죠. 사종악이 저지른 만행은 제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네?”
“단 의원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단악선이 깜짝 놀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엿들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대화의 방향이 예상 밖으로 흐르고 있었기에 마냥 무시할 수 만도 없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홍조를 머금고 있는 탁여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에 마의께서 신의를 납치하셨다죠?”
그녀가 왜 갑자기 부모님 이야기를 언급하는지 단악선이 의아해하는 사이.
탁여상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의 마음을 저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벽화령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단악선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길을 걷는 의원으로서였지, 미래를 함께하는 관계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곤란해지기 전에 단악선은 이쯤에서 자리를 떠야겠다 마음먹었다.
비록 벽화령도 충분히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자신의 성취가 더욱 높은 상태.
다행히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이곳을 벗어나려던 그때.
중얼거리듯 입을 여는 탁여상의 음성이 단악선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자를 세상과 떼어 놓기 위해 전 목숨을 던졌어요. 그러나 정작 그자는 절 포기해 버렸죠.”
“사종악 말이군요.”
“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사람이 그 목숨을 주웠네요.”
잠시 머뭇거리던 탁여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목숨……. 주운 그 사람에게 줄까 싶어요.”
단악선은 당황해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 * *
한편 무림이 안정을 찾아 가던 그 시각에도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능소밀이었다.
인적이 끊긴 늦은 밤.
은밀하게 사례태감의 방에 방문한 능소밀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사종악이 사라졌습니다.”
“그런가?”
“예. 흔적도 없이 그냥 증발해 버렸습니다. 개방과 흑점, 그리고 모든 정보단체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그 상황에서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씁쓸하게 웃는 사례태감을 향해 능소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바닥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 조직이 관여해 있다는 뜻이지요.”
그 조직이 어디를 말하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창이 타 정보 기관을 압도하는 저력을 지니게 된 이면에는 그의 공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공공께서 직접 나서 주십시오.”
물끄러미 능소밀을 응시하던 사례태감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사종악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안에 동창이 관여했다는 확실한 증좌가 있나?”
“확실한 증좌가 있었다면 이리 공공께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을 테지요. 다만 믿을 수 있는 증언은 있습니다.”
“그 증언을 한 사람은?”
“단 의원이십니다.”
사례태감의 얼굴에 당혹감이 자리 잡았다.
아무리 단악선이 무림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일개 자연인.
지금은 자신조차 그 저력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고 깊어진 동창이었다.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동창을 들쑤시기에는 그 역시 부담스러운 사안이었다.
그런 그에게 능소밀이 말을 이어 갔다.
“번강룡이 도주할 당시, 단 의원님을 공격해 퇴로를 확보한 자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얼굴을 지져 놓아 용모 자체를 알아볼 수 없게 했더군요. 한데 그들은 하나같이 양물(陽物)이 없었습니다.”
“…….”
“동창 내부에서 비밀리에 환관으로 구성한 특임대를 양성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듣자니 엄시교위(閹侍校尉)라 불린다는 것 같던데…….”
“이는 어디까지나 황실에 떠도는 풍문일 뿐, 그들을 동창에서 훈련 시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네.”
“발뺌하시는 겁니까?”
“쯧!”
한 차례 혀를 찬 사례태감이 우려를 담아 능소밀을 바라봤다.
“자네야말로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이렇게 나를 찾아와 사종악을 내놓으라는 건 평소 알던 자네 모습과 거리가 멀군.”
“왜 마음이 급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고마워하는 분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는데요.”
“단 의원의 목숨이라면…….”
“그분이 아닙니다.”
“……?”
“제가 걱정하는 분은 공공,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황한 사례태감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능소밀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동창이 사종악을 손에 넣어 조종한다면 그 칼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향할 것 같습니까?”
보검을 손에 넣었다면 휘두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
하물며 그 보검의 주인이 권력을 탐닉하는 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공공께서는 권력의 균형을 위해 은퇴라는 용단을 내리셨지만, 공공께서 내려놓은 그 권력을 순순히 다른 이들에게 양보할 동창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린 지 오래니까요.”
괜히 권력 싸움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도박판에 빗대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낙장불입(落張不入).
이미 주사위를 던진 이상 이를 돌이킬 방법은 전무했다.
하물며 이 바닥에서 개평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미 단 의원님께 칼을 향한 그 순간부터 동창은 제게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능소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저는 어떻게든 공공께 살길을 열어 드리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
“공공께서 명예로이 은퇴하셔서 여생을 즐기고 싶으시다면 지금처럼 동창에 선을 긋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무척이나 거셀 테니까요.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공의 안전을 저 또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경고한 능소밀이 휙 돌아섰다.
“으음…….”
홀로 남은 사례태감이 나직하게 침음성을 흘렸다.
“엄시교위 중 삼분의 일이 날아가 버린 것인가.”
단악선을 저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 숨겨 두고 있던 동창의 전력이 드러난 것은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황궁이 꽤나 시끄러워지겠어.”
심상치 않던 능소밀의 눈빛을 떠올린 사례태감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폭풍이 몰아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없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음 날 아침.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황실을 둘러싸 살얼음판 같던 그때.
새벽부터 불을 밝히고 있던 도찰원은 날이 밝기 무섭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엄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흘리며 일제히 어딘가로 달려가는 도찰원 소속의 관리들.
하나같이 엄중한 그들의 모습을 일별한 사람들은 드디어 능소밀이 동창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짐작했다.
그리고 이는 보고를 들은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능소밀이 드디어 도찰원을 움직였다지?”
“예, 폐하. 그렇사옵니다.”
“동창은 어찌 대응하고 있느냐?”
“위사들을 소집해 동안문을 폐쇄하였나이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창은 그 이름 그대로 설립 초기부터 동안문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을 폐쇄한 이상 도찰원이 뚫고 지나갈 방법은 없었다.
무공을 지닌 동창 위사들이 마음먹고 방벽을 친다면 대부분이 문관 출신인 도찰원의 관리들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보여 주기식 엄포인 건가? 능 도어사가 나름 고수라 하나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터인데…….”
황제는 당최 능소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폐하, 어림친위 소속 독고진이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밖에서 들려온 보고에 황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교대 근무를 마치고 퇴청해야 했을 이가 왜 아직까지 이곳을 서성이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 온 그였다.
그런 그가 이유 없이 알현을 청해 오지는 않았을 터.
“안으로 들라 하라.”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자 한 사람이 대전 안으로 들어와 오체투지 했다.
“신 독고진이 삼가 아뢰옵나이다.”
“듣고 있노라.”
“현 시각 능 도어사를 위시한 도찰원의 관리들이 일제히 지휘동지(指揮同知)가 머물고 있는 대내친군도독부(大内親軍都督府)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뭐라?”
뜻밖의 소식에 황제가 깜짝 놀랐다.
대내친군도독부는 금의위와 어림친위를 아우른 금군의 지휘소.
‘동창이 아닌 금의위를 목표로 움직였단 말인가?’
비록 근래에는 동창에 밀려 그 권위가 다소 밀린다 하나 금의위는 금의위.
실제로 동창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감찰 기구였다.
홍무제에 의해 처음 설립된 특무 기관인 금의위는 태생부터가 오직 황제를 위한 칼이었다.
동창과의 차이라면 금의위는 내신이 아닌, 무관인 외신이 수장을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명을 건국한 태조 홍무제(洪武帝)는 천민에서 탁발승, 홍건적을 거쳐 황제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주씨(朱氏)의 핏줄에 천하를 물려주기 위해 흔들리지 않을 황권 구축에 물심양면 힘을 쏟았고, 그 일례로 잔인하리만치 신하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특히 시의심(猜疑心) 강했던 그는 한신(韓信)을 숙청했던 한 고조처럼 개국 공신인 호유용(胡惟庸)과 남옥(藍玉)에게 누명을 씌워 구족(九族)을 멸해 버렸다.
이후로도 호람지옥(胡藍之獄)이라 불리는 개국 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십 년 넘게 이어졌다.
그 선두에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던 금의위(錦衣衛)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홍무 이십 년.
황권 강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홍무제는 직접 금의위를 해산시켰다.
금의위에 감금된 죄수들을 형부(刑部)로 이관시키고, 고문 기구들과 관련 서류를 모조리 불태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한 세대를 건너뛰어 금의위가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바로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조카인 건문제를 쫓아내고 황위에 오르면서였다.
앞서 홍무제가 그랬든 영락제 역시 같은 목적으로 금의위를 활용했다.
그의 제위 찬탈에 불만을 품은 반대 세력이 많았던 만큼 철저하게 그들을 탄압해 황권을 공고히 다진 것이다.
주황색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제기(緹騎)라고도 불린 금의위 위사들은 그야말로 공포의 상징과도 다름없었다.
“의외로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