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93)
신마의선-493화(493/500)
신마의선 (493)
창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느끼며 단악선이 눈을 떴다.
새벽부터 일과를 시작하던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꽤나 늦게 일어난 것이다.
마른세수로 마저 잠을 떨쳐 낸 뒤 침상 옆, 탁자 위에 놓인 의서들을 눈에 담았다.
각각 성수의록 요상편과 생사의록 요체편이라 적혀 있는 책자들.
생전에 부모님께서 남기셨던 방대한 임상 치료 기록이었다.
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단악선의 얼굴 위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며칠간 밤을 지새운 보람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석을 달아 보완하고, 잘못된 오류는 바로잡으며 새롭게 집대성하는 작업도 덕분에 이제 마무리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서를 서가에 다시 꽂아 넣은 뒤 단악선이 전각을 나섰다.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신마곡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연못가에서는 범계위와 벽화령이 범려화를 데리고 놀아 주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범려화와 그런 딸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그들 부부의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계곡 입구로 막 들어서고 있는 초악량과 한설화의 모습도 보였다.
산책 삼아 장도 볼 겸 마을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짐이 한가득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무심.
그리고 탁여상은 창고 근처의 텃밭에서는 약초들을 살피며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나날.
그 일상이 주는 따스함을 만끽하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던 그 순간.
서둘러 신마곡 안으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적산이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과거 신마상단에서 몇 번인가 본 적 있었던 상단원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인가 신마곡을 방문해 본 적이 있었던 소적산은 자연스럽게 전각 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반면 소적산의 뒤를 따르던 사내는 별천지를 본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단악선을 발견한 소적산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곡주님, 마침 계셨군요.”
“황실 쪽에서 연락이 왔나요?”
단악선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소적산이 능소밀이 보내온 전서를 건넸다.
편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사이, 일행 모두가 자연스럽게 단악선 곁으로 모였다.
소적산이 다른 이들을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금의위를 포섭해 동창을 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게 뭔데?”
범계위의 물음에 소적산이 한 사람을 바라봤다.
“천의님께서 목격하셨다던 동창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탁여상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진법 안으로 들어서던 사종악과 그를 만류하던 사내를 떠올린 까닭이다.
“일단 용모파기를 작성해 그자를 특정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필요할 경우 직접 황궁에서 증언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진 소적산의 말에 탁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하겠어요.”
탁여상이 단호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자와의 악연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악업의 굴레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사종악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려 냈던 환자들.
더 이상 사종악은 그들을 볼모로 삼아 자신을 협박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반드시 그자를 잡겠어요.”
독하게 마음먹은 탁여상의 눈빛에 소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런 천의님의 의지를 꼭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우선은 그자의 외모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소적산이 자신이 데려온 사내를 가리켰다.
“소싯적 순의방 시절부터 저를 따르던 아우입니다. 그럭저럭 그림 좀 그리는 녀석이라 그자의 용모파기 작성을 위해 데려왔습니다.”
소적산의 소개를 받은 사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양우라고 합니다.”
양우라 자신을 밝힌 사내는 이내 탁여상의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탁여상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럭저럭이라 소개했던 것과 다르게 양우의 그림 솜씨가 매우 탁월했기 때문이다.
“맞아요. 이 얼굴이었어요.”
이윽고 완성된 용모파기를 가리키며 탁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화풍이 어딘가 눈에 익은데?”
가만히 용모파기를 들여다보던 초악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양우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씨 성에 사 자 인 자 쓰시는 분이 제 스승님이십니다. 두 해 전부터 그분께 사사하고 있으니 화풍이 닮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오랜만에 듣는 친우의 소식에 초악량이 빙그레 웃었다.
“염가 그놈이 제자를 들였어? 하긴 그대로 썩히기엔 아까운 실력이긴 하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부님의 친우분이시라고…….”
조심스럽게 건넨 양우의 말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는 사는 게 지겹다더니 그래도 나름 잘 지내고 있나 보군. 이렇게 제자도 들인 걸 보면 말이야.”
“사실 그게…….”
말끝을 흐린 양우가 곤혹스런 눈빛을 흘렸다.
“최근에는 그리 썩 잘 지내지 못하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대답을 망설이던 양우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땅이 꺼져라 푸념하시는 일이 유독 잦아졌거든요.”
의아해하던 초악량은 이어진 양우의 말에 헛기침을 터트렸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놈이 몰래 도둑장가를 가 버렸다고……. 그나마 지금까지는 함께 늙어 가는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데, 이제는 스승님 혼자 남게 되셨다면서요…….”
“거참, 제자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지.”
초악량이 쓰게 웃었다.
투덜대는 염사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 조만간 찾아간다 전하게. 다 늙어 심술만 늘어서 말이야.”
그때 소적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인물의 용모파기를 도찰원에 전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소적산과 양우가 돌아가자 탁여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어지러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던 그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탁여상을 향해 단악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요한 건 미래예요.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지금부터 만들어 가면 되니까요.”
“남은 생을 의원으로서 사람들을 구하며 산다면 이 무거운 죄도 언젠가는 사라질까요?”
“그건 알 수 없죠. 하지만…….”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탁여상은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졌다.
“길을 잃으면 뒤를 돌아보는 것은 옛 성현들의 생각이었고, 길을 잘못 들어도 멀리 가기 전에 다시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옛 경전에서도 높이 여기는 점이니까요.”
단악선의 말에 탁여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잃었다면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은 미도지반(迷途知返)의 고사가 이때만큼 절실히 와닿은 적이 없었다.
* * *
소적산이 보내온 용모파기를 전달받은 능소밀은 곧장 도찰원의 핵심 인사들을 소집했다.
“이자 누군지 알지?”
용모파기를 돌려본 도찰원 소속의 관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동창 내에서도 우두머리인 장인태감(掌印太監)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이인자였기 때문이다.
흠차총독동창관교판사태감(欽差總督東廠官校辦事太監).
줄여서 제독동창(提督東廠)이라 부르는 장인태감은 그 아래로 장형천호(掌刑千戶)라 하는 첩형관(貼刑官)을 두고 있었다.
“유신(劉信)이라는 자입니다.”
첩형관인 그가 거느린 장반(掌斑)과 영반(領斑), 사방(司房)의 직책을 가진 자들은 사십여 명에 달했고, 이들은 각각 현장 책임자인 당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사실상 장인태감은 자신의 의중을 전달할 뿐, 실제로 십만에 달하는 동창을 진두지휘해 움직이는 자는 바로 그자였다.
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자의 신원이 드러났으니 곧바로 동창을 압박하는 게 어떻습니까?”
잠시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능소밀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물러.”
정보 조작에 도가 튼 놈들이니 어설프게 건드리면 빠져나갈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 기회에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단번에 몰아쳐야 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능소밀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걸 이용해 동창 스스로 번강룡이라는 패를 버리게 만들어야 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누군가의 반문에 능소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그러곤 히죽 웃었다.
“그게 내가 칼을 빼 든 이유니까.”
용모파기를 챙긴 능소밀이 곧장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사례태감을 찾아가 독대를 청했다.
“이 시각에 어인 일인가?”
사례태감의 물음에 능소밀은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파기를 탁자 위에 올렸다.
“최근 들어 동창도 예전만 같지 않은가 봅니다? 이렇듯 꼬리를 남기고 다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용모파기를 확인한 사례태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안의 인물이 누구인지 그 역시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런 사례태감을 가만히 응시하던 능소밀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사종악을 데리고 있습니다.”
“확실한가?”
반문하던 사례태감이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소 능소밀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자신감을 내비친다는 건 그만큼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
아니나 다를까.
“곧 이자의 용모파기가 중원 전역에 뿌려질 겁니다.”
사례태감이 능소밀을 노려봤다.
“원하는 게 뭔가?”
“사태가 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동창이 직접 이자를 잡아 제게 데려다주십시오.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능소밀이 섬뜩하게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폐하께서 맘껏 쓰라 제게 쥐여 주신 칼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보게 되실 테니까요.”
사례태감은 능소밀의 말이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방이 나의 은퇴를 앞당기고 싶어 안달인 사람뿐이로고.”
허탈한 웃음을 흘린 사례태감이 능소밀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느 선까지 가야 이 사태를 마무리할 생각인가?”
“적어도 이자의 목은 받아 내야지요. 동창 역시 대거 물갈이가 되어야 할 것이고요.”
“으음…….”
잠시 침음하던 사례태감이 다시금 입을 연 것은 능소밀이 최후통첩을 날린 직후였다.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전 바로 이 일을 시작할 겁니다. 공공께서 하실 일은 스스로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공공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병필태감이 오랜 세월 동안 폐하와 나, 그리고 조정을 위해 헌신해 온 충신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리 말하는 겐가?”
사례태감이 언급한 병필태감은 사례감 내에서의 직책.
즉, 현재 동창의 우두머리인 제독동창이었다.
“물론입니다.”
능소밀은 단호했다.
그가 이번 일을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창을 책임지는 독주(督主)라면 진즉에 나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그의 오른팔인 놈에게서 비롯된 셈이니 팔의 주인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악선, 그리고 중원 무림을 이용해 무언가를 도모해 보려 시도하는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였다.
능소밀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사례태감은 그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왕 칼춤을 추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칼이 내 생살을 도려내는 것도 마다치 않을 것이로다.”
십만 환관의 정점에 있으나 지금껏 관망하는 자세를 취해 온 그였다.
그런데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그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