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499)
신마의선-499화(499/500)
신마의선 (499)
황제는 못내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홀가분한 표정이로구나? 마치 네가 해야 할 일은 전부 마쳤으니 이제는 묶어 둘 명분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진심이 느껴지는 황제의 눈빛에 능소밀은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애써 흔들리는 결심을 다잡았다.
황제는 본래 이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어영부영 체면 차리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권력의 족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 자부합니다.”
“짐도 그건 부정하지 않노라.”
“그리고…….”
“……?”
“이대로 제가 계속 조정에 몸담고 있게 되면 지금껏 해 온 부패 척결의 의미가 퇴색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옛 성인들께서도 유수불부(流水不腐)라 하지 않았습니까. 권력 또한 물과 같아 빠르게 계속 흘러야만 썩지도, 얼지도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부디 소신을 놓아 본보기로 삼으소서.”
물끄러미 능소밀을 응시하던 황제가 이윽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짐 역시 더 이상 너를 붙잡지 않겠노라.”
남몰래 안도하는 능소밀을 향해 황제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래도 늘 짐의 연락이 닿는 곳에 있으라. 언젠가 짐이 부르면 속히 등청할 수 있도록 말이다. 너는 이미 짐의 사람, 짐 또한 인연의 중함을 아노라.”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법. 혹 아느냐? 너 역시 다시금 이곳이 그리워질지.”
능소밀이 애써 웃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깊이 새겨 잊지 않겠나이다.”
“그리하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는구나?”
“…….”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공로에 대한 마땅한 포상이 있어야 할 터. 원하는 것이 있느냐?”
능소밀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없더라도 늘 존체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입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사례태감의 뒤를 이을 근신 환관 중 너와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구나. 그랬다면 짐의 치세가 한결 수월했을 터인데.”
능소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더구나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사례태감이 그 말을 받자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원한다면 본직 역시 기쁜 마음으로 사례감 안에 한자리를 내어 주마.”
능소밀이 울상을 지었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그 모습을 마주한 사례태감이 비로소 슬쩍 웃었다.
능소밀 덕에 지금껏 고생해 키워 낸 수족들이 날아간 마당에 이 정도 복수는 약과였다.
그렇게 황제가 사직을 허가하자 그길로 능소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위로 내빼 버렸다.
* * *
“형님!”
단악선과 함께 신마곡으로 들어선 능소밀은 자신을 마중 나온 사무심을 대뜸 얼싸안았다.
“허허, 이 사람. 그리도 기쁜가?”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은 미소로 맞이하는 사무심의 모습에 능소밀이 울먹였다.
“아무렴요. 제가 있을 곳이 어딘지 뼈저리게 실감한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황실에서의 일은 모두 마무리 지은 것인가?”
“예! 이제 죽을 때까지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생각입니다!”
“고생했네.”
진심으로 다독이며 위로를 건네는 사무심이 그저 반갑고 고마운 능소밀이었다.
“고생은 형님이 다하셨죠. 어디 신마곡 총관 일이 보통 일입니까? 그나저나…….”
사무심의 눈빛과 얼굴을 확인하던 능소밀이 고개를 갸웃했다.
꼬집어 설명할 순 없었으나 기도나 분위기가 그가 기억하던 사무심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기연이라도 얻으신 겁니까?”
“허허. 곡주님과의 만남 자체가 기연이라 할 수 있지.”
“하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있어 고생한다는 의미로 들리는구나?”
저 멀리 걸어오는 초악량과 한설화의 모습을 발견한 능소밀이 환하게 웃었다.
“하하. 아니라고는 못 하지요.”
“뭐라?”
초악량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능소밀이 곧장 넙죽 엎드렸다.
“두 분 모두 그간 별래 무양(別來無恙) 하셨습니까? 기체후(氣體候) 일향만강(一向萬康) 하신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아울러 두 분께서 귀한 인연을 맺으신 것을 뒤늦게나마 앙축(仰祝)드립니다.”
“황실 물을 먹더니 넉살만 늘었군.”
초악량의 핀잔에도 능소밀은 미소로 화답했다.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이가 바로 초악량이었기 때문이다.
“네놈 인생도 참으로 파란만장하구나. 하오문의 잡졸 출신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동창을 꺼꾸러트리다니.”
게다가 그렇게 거머쥔 권력을 내려놓고 스스럼없이 물러서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도 잠시.
“이제 사종악, 그자만 처리하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겠군요.”
단악선의 말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탁여상이었다.
“저도 돕게 해 주세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탁여상이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미끼가 될게요.”
“하지만…….”
우려를 담은 단악선의 눈빛에 탁여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좋아 산이지, 오태산은 육십 리에 걸쳐 있는 방대한 곳이에요. 마음먹고 숨어 버린다면 그자의 행적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어떤 식으로든 틀림없이 반응할 거예요. 저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으니까요.”
심지어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 안에 들어서려 했을 정도였다.
탁여상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 갔다.
“부탁드려요. 더 이상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혀 있고 싶지 않아요.”
사종악과 얽힌 악연을 하루라도 빨리 일소하고 싶은 그녀였다.
능소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놈이 순순히 나타날까요? 물론 천의님 말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가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정상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겠죠.”
탁여상이 설명을 덧붙였다.
“북명신공을 이용해 마기를 흡수하면서 그의 정신은 어딘가 크게 망가졌어요. 언젠가 단 의원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공이 괜히 마공이라 불리는 게 아니더군요.”
그나마 지금까지 사종악이 미쳐 날뛰지 않았던 건 지속적인 치료가 병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종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완전히 마기에 잠식당해 미쳐 날뛴다면 애꿎은 이들이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
지금쯤 그 광기가 극에 달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단악선의 경고에도 탁여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그렇게라도 제가 책임을 다하게 해 주세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의지를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단악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가시죠. 이 모든 걸 끝내러.”
* * *
오태산이 그리 불리는 것은 동서남북과 중앙에 자리 잡은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 때문이었다.
단악선 일행은 그중 중태(中台)로 불리는 취암봉(翠岩峰)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최고봉은 북태(北台)인 엽두봉(葉頭峰)이었지만, 중앙에 자리 잡은 취암봉이 산세 전체를 굽어보기에는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제 놈을 어떻게 꼬셔 내지?”
범계위의 물음에 초악량과 한설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악선에게 향했다.
이에 단악선이 머쓱하게 웃었다.
“오면서 계속 생각해 보긴 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저도 생각해 내지 못했어요.”
그건 초악량이나 한설화도 마찬가지였다.
“인원을 나누어 각각 봉우리 하나씩을 맡아 그곳을 중심으로 수색해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초악량의 제안에 한설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탁여상도 의견을 내놓았다.
“무림에는 천라지망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곳은 녹림의 영역이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대를 포위하고 수색을 좁혀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번엔 단악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자 역시 경시할 수 없는 고수예요. 마음만 먹는다면 녹림의 이목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어요. 만약 운 좋게 발견한다 하더라도 희생이 클 테고요.”
더구나 사종악은 북명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어설픈 전력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괴물의 아가리에 먹잇감만 던져 주는 셈이었다.
이후로도 네 사람은 여러 방안들은 주고받으며 사종악을 찾아낼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뭘 그리 어렵게들 고민해?”
자신만만한 범계위의 표정을 마주한 초악량과 한설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냥 가만히 있지?”
그런 두 사람의 핀잔에 범계위가 코웃음을 쳤다.
“흥! 왜 이래? 나 범계위야. 강호 제일의 해결사 범계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계위가 냅다 손을 뻗어 탁여상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앗!”
놀란 탁여상이 자신도 모르게 범계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범계위가 신형을 날렸다.
내공을 꾹꾹 눌러 담은 쩌렁한 음성이 일대를 뒤흔든 것도 동시였다.
“으하하! 사종악! 천의는 내가 데리고 있다! 천의를 살리고 싶거든 당장 튀어나와라!”
만류할 틈도 없었다.
탁여상의 뾰족한 비명이 긴 메아리를 남기며 어느새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초악량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놈이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저렇게 얕은 수작에 놀아날 정도로…….”
초악량은 말을 맺지 못했다.
웃고 있던 단악선이 갑자기 정색하며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시선을 따라 초악량과 한설화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포효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서쪽 주봉인 괘월봉(挂月峰) 방향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이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물씬 느껴지는 마기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범계위 역시 이를 느꼈는지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묘한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서너 채는 족히 들어갈 만큼 널따란 분지.
하나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시야를 차단하는 지형과 약간의 진법이 더해져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눈에 띄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훼손된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핏물에 잠긴 시신은 어림잡아도 서른 구 이상.
‘동창!’
단악선은 단번에 그들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내를 떠도는 비릿한 혈 향과 향낭에서 흘러나온 냄새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옥 중앙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종악이었다.
그는 머리칼을 온통 산발한 채 귀기 어린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은 한 사람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단악선은 바로 그자가 동창 소속의 첩형관, 유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강호 전역에 뿌려진 용모파기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얼굴 가득 거미줄처럼 돋아난 푸른 핏줄.
실핏줄이 터진 흰자위는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도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진원진기를 갈취당한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간헐적인 경련과 함께 버둥대던 그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대체 어쩌다…….”
하지만 유신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우두둑.
가공할 악력에 의해 결국 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을 보아 짐작하건대, 무언가를 획책하다 어그러진 모양이었다.
뒤늦게 범계위와 함께 장내에 도착한 탁여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소…상…….”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탁여상이 흠칫하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자신을 응시하는 한 쌍의 눈.
흰자위 없이 온통 시커멓게 물든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