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500)
신마의선-500화 (마지막 회)(500/500)
신마의선 (500) (마지막 회)
“소상?”
유부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 탁하게 갈라진 음성.
탁여상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탁여상을 노려보던 사종악이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어째서 그렇게 자꾸 달아나는 거야?”
그의 전신에서 끔찍하리만치 음산한 핏빛 안개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사종악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를 탁여상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종악의 손이 지척에서 뻗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종악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한 줄기 묵빛 섬광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꽈앙!
일대를 뒤흔든 폭음과 함께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사종악이 요란하게 나가떨어졌다.
“쿠에엑!”
한바탕 시커먼 피를 게워 낸 사종악은 자신의 가슴 부근에 작렬한 묵빛 섬광의 정체가 단악선이 휘두른 묵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탁여상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단악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멍하니 단악선을 응시하던 사종악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내 거야…….”
그러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단악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의 소상을 돌려줘!”
그 순간.
사종악의 시간이 멈추고, 그와 단악선 사이의 공간이 지워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던 사종악이 자신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한 줄기 낙뢰를 발견한 건 그 직후였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사종악이 두 손을 휘둘러 단악선의 공격을 걷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단악선이 휘두른 묵룡의 궤적이 그의 가슴을 짓이기며 파고든 뒤였다.
우두둑.
사종악의 가슴에서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종악은 쓰러지지 않았다.
“크흐.”
오히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빗장뼈를 부수며 파고든 묵룡을 덥썩 움켜쥐었다.
단악선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자리 잡았다.
방금의 일격으로 상대의 숨을 끊어 놓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진원진기를 흡수했기에…….”
연정화기(練精化氣)를 통해 연기화신(練氣化神)을 이루고, 거기서 더 나아가 도달할 수 있는 연신환허(練神還虛)의 경지.
그야말로 육신의 모든 제약을 벗어던지고 초월의 경지로 도약하는 궁극의 단계가 바로 연신환허였다.
물론 제대로 된 과정을 밟지 않고 오직 상대의 진원진기를 갈취한 것만으로 만든 불안정한 성취가 완벽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앞의 사종악을 경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과 비교하면 그는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콰득.
전력을 실은 전사경이 사종악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그 충격에 사종악의 신형이 튕겨지듯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데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던 사종악이 돌연 허공에 덜컥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천천히 신형을 일으킨 사종악이 단악선을 향해 히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은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사이 사종악을 에워싼 핏빛 서기가 더욱 짙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피를 머금은 명주실처럼 너울대는 섬뜩한 기운이 일대에 붉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는 사람조차도 아니게 되어 버렸군요.”
비록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종악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르기 어려운,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웃고 있는 사종악을 향해 단악선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기뻐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웃는 거죠?”
방금 전의 일격으로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뜻밖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것도 가능하니까.”
사종악의 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악선의 눈에 은은한 놀라움이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쩌엉!
쇠솥이 깨지는 듯한 충격음과 함께 단악선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채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이미 지척에 이른 사종악은 벌써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다.
꽈앙.
사람과 사람이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두 사람의 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주위를 집어삼키며 세찬 경기가 휘몰아쳤다.
“단 의원!”
뒤늦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범계위가 신형을 날리려 했다.
경력의 폭풍이 만들어 낸 거대한 먼지구름에 삼켜지기 직전.
사종악의 손을 따라 너울거리던 핏빛 서기가 단악선을 휘감는 것을 분명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범계위를 초악량과 한설화가 막아섰다.
“비켜! 이대로라면 단 의원이…….”
버럭 하며 두 사람을 뿌리치려던 순간.
범계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희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 안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단악선만이 지닌 독특한 기파.
위화신공을 기반으로 한 그만의 기운이 급격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빠른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사종악의 존재감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
범계위가 눈을 부릅떴다.
뚫어져라 먼지구름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은 충격과 혼란으로 격하게 흔들렸다.
“왜 저 안에서 천마 그놈의 마기가 느껴지는 거야?”
자신이 직접 종극진의 머리통을 깨서 죽였기에 이 순간 범계위가 마주한 당혹감은 더욱 컸다.
이에 초악량은 담담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보면 안다.”
이윽고 하늘 높이 치솟았던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크큭.”
사종악이 회심의 웃음을 말아 올렸다.
단악선의 전신을 칭칭 옭아맨 서기.
절정에 달한 북명신공 앞에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신공절학도 이처럼 소용없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의식을 회복한 것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처음 격돌했던 이후 그는 항상 단악선이 두려웠다.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결국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를 떨쳐 냈다.
덕분에 지금은 온몸에 넘쳐 나는, 그야말로 주체할 수 없는 내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
돌연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요.”
바로 코앞에서 들려온 태연한 음성.
사종악은 소름이 쭉 끼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종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단악선으로부터 흡수했던 진기가 갑자기 그의 의지를 벗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본래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통제할 수 없는 진신내력이 단악선 쪽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피부에 와 닿는 섬뜩한 무언가를 느낀 것도 동시였다.
무심코 눈을 들어 올린 사종악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
흔들림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
단지 눈빛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사종악은 숨이 턱 막혔다.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끝을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위압감이 전신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단악선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세가 뭉클거리며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종악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털썩.
바람 앞의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 대던 사종악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눈앞에서 너울대는 마기!
그것만으로도 이미 압도적인 폭력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정작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자신을 응시하는 서늘한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체 어떻게……?”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사종악을 내려다보던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북명신공이 진정한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는 의미죠.”
“그게 무슨…….”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끄아아!”
사종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전신을 에워싼 채 꿈틀대던 핏빛 기운이 단악선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흑무(黑霧)에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사종악의 얼굴 위로 경악과 공포, 그리고 불신의 감정이 자리 잡았다.
눈 주위와 볼이 움푹 꺼지고,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해진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영원처럼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이 끝나고.
털썩.
사종악의 신형이 맥없이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런 사종악을 더없이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때.
“단 의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범계위를 발견한 단악선이 빙긋 웃었다.
일대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기세로 사납게 요동치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건 그 직후였다.
그토록 소름 끼치던 가공할 마기를 단박에 갈무리하는 단악선의 모습에 범계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범계위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초 형 좀!”
가뜩이나 단악선이 걱정되어 심란한 마당에 또 의미 모를 말을 늘어놓는 초악량을 향해 범계위가 진심을 담아 역정을 냈다.
이에 초악량이 실소했다.
하긴 범계위가 당나라 시절의 고승이었던 임제가 남긴 법어(法語)를 알아들을 리 없는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진리를 깨닫는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운을 뗀 초악량이 설명을 이어 갔다.
“천마의 철혼유마심공(鐵魂由魔心功)은 마공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닌 지존공(至尊功). 북명신공도 결국에는 마공이니 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다.”
“어? 그럼 단 의원은…….”
“마공을 익힌 자라면 설사 그게 누구라 해도 이제는 단 의원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
비로소 범계위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악선의 진원진기를 갈취하려 했던 사종악은 결국 제 손으로 자신의 무덤을 판 셈.
안도하는 범계위와 달리 단악선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신지에서 진법에 갇혀 천마와 싸웠던 경험.
이후 십 년간의 고행을 통해 무의식중에 체득했던 철혼유마심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 원리를 이해해 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마기를 내부 깊숙이 봉인했다.
그런데 사종악에게 내공을 빼앗기자 금제가 풀린 마기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와 버렸다.
결국 북명신공의 주도권을 놓고 사종악과 싸우게 되었지만, 모든 마공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는 천마의 심공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단악선이 초악량과 한설화, 범계위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세 분이 없었다면, 저도 그와 같은 괴물이 되어 있었을지도 몰라요.”
“에이, 단 의원은 아무리 그래도 단 의원이야. 아무리 나락에 떨어진대도 저렇게는 안 돼.”
“그 말대로다.”
웬일로 한설화가 범계위의 말을 인정했다.
“우리는 너를 믿는다.”
“나 역시 한 누이와 같은 마음이다.”
단악선이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한들 자신을 향한 저들의 믿음이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건 단악선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다 끝났군요.”
“그럼 이제 뭐 하지?”
범계위의 반문에 단악선이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돌아가야죠. 우리들의 집, 신마곡으로.”
그리고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 * *
유난히 볕이 좋은 초여름의 어느 날.
네댓 살 정도 되었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호강을 누리는 것 같은 귀여운 소년을 앞에 둔 소녀가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아명(兒明). 지금부터 내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아주 중요한 이야기?”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는 사내아이의 눈망울이 어찌나 귀엽던지 범려화는 하마터면 그대로 초군명을 덥석 끌어안을 뻔했다.
그러나 올해 열네 살이 된 그녀는 나이만큼 늘어난 인내심으로 그 지독한 유혹을 물리쳤다.
“그래. 이제 너도 네 살이 되었잖아. 그러니까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고민해 볼 때가 된 거야.”
이어진 범려화의 말에 초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네 부모님, 그러니까 초 백부님과 한 백모님은 아주 훌륭하신 분들이야. 우리 아빠도 가끔 이상한 문제를 일으키지만 그래도 나름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하신 분이고. 우리 엄마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응, 나도 알아.”
배시시 웃는 초군명의 모습에 무심코 덩달아 따라 웃던 범려화가 뒤늦게 정색하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 주위를 살피던 범려화가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닮아야 할 사람은 단 오라버니야.”
“악선 형님?”
“그래. 부모님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머지 다른 모든 건 단 오라버니를 따라 해야 해. 그게 내가 십사 년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야.”
“하지만 엄마 아빠가 서운해하면 어떡해?”
“바보야. 그러니까 비밀로 해야지.”
잠시 고민하던 초군명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누나는 예쁘기도 하지만 항상 맞는 말만 하니까.”
“아유, 우리 귀여운 꼬맹이.”
결국 참지 못하고 초군명을 와락 끌어안는 범려화였다.
“그런데 누나.”
“응?”
“우리 아빠랑 누나 아빠는 왜 매일 싸우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범려화가 멈칫하더니 이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두 분이 노시는 거야.”
“진짜?”
“응.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두 분이 사이가 나쁜 줄 알았거든? 근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까 알겠더라. 아, 두 분은 그냥 저렇게 노는 거구나……라는 걸.”
“그랬구나. 역시 누나는 똑똑해.”
“그래도 우리는 그러지 말자. 계속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단 오라버니를 닮아 가는 거야. 알겠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초군명의 머리를 범려화가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범려화가 물었다.
“그런데 너 나중에 의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며?”
“응! 나도 악선 형님처럼 훌륭해지고 싶어!”
“의외네? 무공을 먼저 배우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빠가 그랬어. 의술이 최고라고.”
“왜?”
“몰라. 그냥 최고라고 하던데?”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앗! 오라버니!”
전각에서 나오는 단악선을 발견한 범려화가 초군명의 손을 잡고 날 듯이 달려갔다.
자신의 품에 와락 안겨 드는 두 사람을 단악선이 웃으며 안아 들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네?”
범려화가 해맑게 웃었다.
“오늘 신마의가에 가시는 날이잖아요. 우리도 따라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헤헤.”
“그 전에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는데, 괜찮겠니?”
“그럼요. 오라버니와 함께라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치, 군명아?”
“응!”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단악선이 두 사람을 안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아빠다!”
“엄마!”
이때 범려화와 초군명이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저 멀리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초악량과 한설화, 그리고 범계위와 벽화령 부부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던 그 순간.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등 뒤로 날아들었다.
“많이 늦었어.”
“늦어도 한참 늦었지. 이립을 넘긴 지도 두 해나 지났는걸.”
“천하제일 고수에, 천하제일 의원이면 뭐 해? 나이가 서른둘이나 되어서도 아직 노총각인데.”
“그러니까 제가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천의를 붙잡았어야 한다고.”
“안타깝지만 어쩌겠어? 평생 중원을 떠돌며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악업을 풀겠다는데.”
단악선은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겼지만 어느새 따라붙은 범계위가 불쑥 말을 건네 왔다.
“단 의원. 내가 강하고 멋진 소저를 알아. 철혈문 알지? 거기 문주 딸인데, 이번에 아비 뒤를 이어 문주로 추대된다고 하더라고? 여자인데 대단하지? 무엇보다 걔가 도끼를 아주 기가 막히는 게 쓰거든?”
단악선이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아저씨.”
“응?”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끝낸 거 아니었나요?”
기다렸다는 듯 이번엔 초악량이 나섰다.
“얼마 전 염가 녀석의 소개로 한림원의 대제학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에게 과년한 여식이 하나 있는데, 듣자니 북경제일미로 불린다더구나.”
단악선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종일 네 사람에게 붙들린 채 또다시 잔소리에 시달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신경 써 주시는 건 고맙지만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자연스럽게 인연을 만나지 않을까요? 우리 부모님처럼요.”
범계위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 설마, 자신을 납치해 줄 여자를 기다리는 거야?”
“예?”
“에이, 그런 취향이었으면 진즉에 말을 하지. 내가 당장 철혈문에 연락 넣을게.”
“아니, 제 뜻은 그게 아니라…….”
초악량이 혀를 차며 범계위를 노려봤다.
“당금 강호에 누가 있어 단 의원을 납치할 수 있냐?”
“우리가 좀 거들면 되지 않을까?”
“뭐?”
“단 의원 장가보낼 수만 있다면 그깟 체면 좀 내려놓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초악량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생각 없이 사는 놈 같아도 가끔은 이렇게 예리하게 정곡을 찌를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하긴…….”
초악량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엇! 단 의원 또 달아난다!”
범계위의 경악성에 초악량이 깜짝 놀라 단악선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단악선은 아이들을 데리고 저만큼 멀어진 지 오래였다.
* * *
“야호!”
단악선의 품에 매달린 초군명이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리는 맞바람을 맞으며 한껏 신이 나 소리쳤다.
그 모습에 단악선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어린 시절, 초 아저씨와 범 아저씨도 이렇게 날 태워 주셨어.”
“진짜요?”
“응. 그러니까 너도 언제든지 내게 부탁해. 난 아직도 너희 부모님께 갚아야 할 빚이 아주 많거든.”
“어? 저번에 우리 엄마가 가족 사이에 빚 같은 건 없는 거라고 하셨는데요?”
“하하. 그렇네. 그 말이 맞다. 내가 실언했구나.”
주위를 둘러보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잠시 후 어디선가 나타난 범려화가 쏜살같이 거리를 좁혀 따라왔다.
열네 살이란 나이를 감안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경공 실력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무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경치가 좋은 언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성스레 꾸민 봉분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신의와 마의.
단악선의 부모님 묘소였다.
비록 두 분의 유해는 찾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숨을 거둔 곳의 흙을 퍼 와 이곳에 안식처를 마련한 것이다.
각각 한 대씩의 향을 사른 단악선이 품속에서 두툼한 책자 한 권을 꺼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얼마 전에 완성한 의서예요. 아무쪼록 두 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곤 말없이 묘비를 바라보는 단악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휘잉.
복잡한 마음을 위로하듯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미풍이 단악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잠시 어깨 근처를 맴돌며 단악선의 뺨을 쓰다듬던 바람이 멀리서 들려온 산새 소리를 쫓아 이내 산허리 너머로 사라졌다.
“또 올게요.”
부모님께 절을 올린 단악선이 초군명을 안고 언덕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말없이 그 뒤를 따르던 범려화가 질문을 던진 것도 그때였다.
“오라버니, 근데 왜 우리는 맨날 길이 아니라 이렇게 지붕 위를 넘어 다녀야 해요?”
“이상해?”
“네. 이러면 가두달 아저씨한테 면목이 없잖아요.”
단악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가 아저씨께서 너를 제자 삼겠다고 하셨다지?”
“어휴, 말도 마세요. 그때 엄마가 얼마나 진노했는데요?”
그 때문에 가두달은 당분간 신마곡을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범려화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제가 이렇게 사람들 몰래 지붕을 넘어 다니면 양상군자랑 뭐가 다를까 싶어서요.”
“내가 눈에 띄면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게 되거든.”
물끄러미 단악선을 올려다보던 범려화가 불쑥 물었다.
“억울하진 않으세요?”
“억울해? 뭐가?”
“오라버니는 강호를 몇 번이나 구한 영웅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칭송하는 사람들을 피하느라 숨어 다니니까 억울하지 않느냐는 뜻이에요.”
그 말에 단악선이 웃으며 높은 지붕 위에 멈춰 섰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참 많지?”
고개를 끄덕이는 범려화와 초군명을 향해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저 사람들이 너희만큼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
“어? 왜 그런데 우리만이에요? 오라버니도 같이 행복해야죠.”
범려화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행복해.”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범려화와 초군명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 왔던 삶이 바로 지금이니까.”
《신마의선》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