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64)
신마의선-64화(64/500)
신마의선 (64)
“자, 잠깐!”
악영기가 황급히 외쳤으나 그때는 이미 얼음장처럼 서늘한 기운이 주위를 에워싼 뒤였다.
서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수하들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얼어붙은 대기에서 나타난 투명한 얼음 칼이 한설화의 의지에 따라 장락방도들의 목을 날려 버렸다.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장락방도는 아무도 없었다. 쏟아지는 혈우를 뒤집어쓴 악영기만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고작 한 호흡.
산서의 지배자라 자부하던 장락방이 강호에서 지워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악영기를 향해 초악량이 물었다.
“신의의 아들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느냐?”
“…….”
악영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공포와 절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초악량이 질문을 바꿨다.
“혼인했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악영기는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처자식도 있겠군?”
초악량의 스산한 음성이 악영기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아비의 과오를 자식이 짊어지는 것이 피로 이어진 업보라 했었지?”
“……!”
악영기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이 네가 말한 강호의 방식 아니던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악영기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털썩.
악영기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흑점! 산서 지부!”
초악량의 눈썹이 꿈틀했다.
흑점(黑店).
장물을 비롯한 온갖 물건과 정보,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거래하는 암거래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점조직 형태로 존재하며 철저한 상명하복의 체계로 운영되는지라 우두머리인 점주를 비롯해 조직 체계 대부분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악영기가 눈을 감았다.
초악량이 어느새 다가온 범계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둑.
범계위의 무자비한 손이 악영기의 목을 꺾어 버렸다.
단악선이 전각에서 걸어 나온 것도 그때였다. 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단악선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싱그러운 꽃과 약초 내음이 가득했던 계곡.
한데 지금은 짙은 혈 향과 죽음의 기운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곡주님.”
능소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저대로 시신을 방치할 순 없잖아요.”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같이 해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단악선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그늘을 마주한 초악량이 가만히 한숨을 흘렸다.
“네 탓이 아니다.”
“알아요. 아는데…….”
단악선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초악량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단악선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은 제가 바란 것이 아니었어요.”
회한마저 느껴지는 단악선의 음성에 모두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단악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도 그랬어요. 그저 사람을 살렸을 뿐인데……. 결국 이곳에 숨어 지내셔야 했어요.”
단악선이 소매를 들어 눈가를 훔쳤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무슨 욕심을 부렸단 말이냐?”
초악량의 물음에 단악선이 처연하게 웃었다.
“의가를 세우는 상상을 했어요. 모두와 함께 사람을 살리는 꿈이요. 이곳을 벗어나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비로소 모두는 이곳 신마곡이 단악선의 안식처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단악선은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아프게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단악선이 다시 움직인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리곤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능소밀이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단악선은 한사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끔찍한 광경에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참혹한 현실에서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후미진 계곡의 절벽 아래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곳까지 시신을 옮기고 합장을 마칠 때까지 단악선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모두와 함께 장내를 수습한 뒤 단악선이 복잡한 눈빛으로 커다란 무덤을 응시했다.
“무공을 배우면 언젠가 저도 사람을 해치게 될까요?”
그 말에 초악량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걱정이 드리웠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악선의 목소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불안함이 느껴졌다.
“법구경에 이런 말이 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눈빛으로 비난하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초악량이 말을 이어 갔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단악선과 시선이 마주치자 초악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의심암귀(疑心暗鬼)에 사로잡히지 마라. 같은 물이라도 사슴이 마시면 약이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는 법. 나는 네가 저들처럼 제 무공과 욕망에 취해 약자를 핍박하는 괴물들과 다르다 믿는다.”
“맞아! 우리 단 의원이 그럴 리 없지!”
확신에 찬 범계위의 음성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혼란스럽고 두려울 테지.”
약간의 시간을 두고 초악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선택하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온화하지만 단호한 음성이었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단악선은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이후 단악선은 두문불출하며 전각 안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안절부절못하는 범계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초악량과 한설화도 단악선이 걱정되어 번갈아 가며 전각 밖을 맴돌았다.
그러나 끝내 전각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여느 때처럼 일찍 눈을 뜬 능소밀은 주변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동이 터 오는 계곡 입구 쪽에서 길게 드리워진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 그림자의 주인이 단악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웃으며 다가가 인사를 건넸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선뜻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단악선 주위를 에워싼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능소밀이 고민하며 망설이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모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러고 서 있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범계위의 말에 능소밀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계곡 입구를 가리켰다.
그제야 단악선을 발견한 범계위가 쭈뼛거리며 단악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를 초악량과 한설화가 뒤따랐다.
“단 의원, 뭐 해? 이렇게 이른 새벽에.”
단악선이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세 사람을 보았다.
“오셨어요.”
얼마나 오래 그 앞에 서 있었는지 머리와 어깨가 내려앉은 밤이슬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야윈 얼굴로 단악선이 대답했다.
요 며칠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은거하신 부모님을 지켜보며 저는 참 억울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오직 사람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두 분이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져서요.”
그렇게 운을 뗀 단악선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이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의 삶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죠. 두 분에겐 의원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단악선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심코 그 돌멩이로 시선을 던진 범계위가 흠칫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새하얀 돌멩이가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단악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입구 근처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
바로 그 옆에 단악선이 서 있었다.
“단 의원! 설마?”
범계위는 언젠가 단악선이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단악선은 저 돌무더기를 통해 절진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했었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초악량의 핀잔에 범계위가 목소리를 높였다.
“단 의원 손을 보슈! 저 돌이 진법을 발동시키는 초석(礎石)이라고!”
“진법?”
그깟 진법이 뭐 그리 대수냐는 표정을 짓던 초악량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그대로 얼굴이 굳어졌다.
“맞아요. 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유산 중 하나죠. 혼천미리암진(混天迷理暗陳)이라 불리는 기환진(奇幻陳)의 일종이에요.”
“……!”
놀란 초악량이 급히 되물었다.
“설마 귀수(鬼手)의?”
귀수는 불가해(不可解)라 불리던 강호의 전설적인 기인, 무불능요(無不能要) 탁요신의 또 다른 별명이다.
시서금화(詩書琴畵)를 비롯해 건축과 기문 둔갑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주가 하늘에 닿아 있다 전해지는 불세출의 천재. 그중에도 혼천미리진은 그가 최후에 남긴 역작이라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전 전대의 기인이 남겼다는 최후의 유산을 이곳에서 조우하게 될 줄이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초악량을 향해 단악선이 빙그레 미소를 건넸다.
“이걸 작동시키면 이곳은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돼요. 더 이상 복잡한 일과 얽히지 않아도 되는 거죠.”
가만히 자신들을 보는 단악선의 모습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너 홀로 이곳에 남겠다는 것이냐?”
초악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계위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남겠다.”
그리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단 의원 혼자 쓸쓸하게 놔둘 수 없지.”
범계위는 초악량과 한설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즐거웠수. 마녀 너도.”
초악량은 어이가 없어 범계위를 노려봤다. 그때 한설화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남겠어.”
“어? 왜?”
범계위의 반문에 한설화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단 의원 곁에 너만 남겨 두는 건 불안하니까.”
초악량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남겠다.”
“저, 저도 함께 남겠습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능소밀도 슬쩍 끼어들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단악선이었다.
“이 진법은…….”
“안다. 한번 발동되면 절대 누구도 깨트릴 수 없다며?”
설명을 자르며 치고 들어온 초악량의 말에 단악선이 멈칫했다.
‘열고 닫을 수 있는 건데…….’
굳이 이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느낀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고마워요.”
지난 시간 동안 고민했던 것. 지금 눈앞의 사람들을 보자 그 결론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욕심을 부려 보려고요.”
남들에겐 평범한 것.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단악선에겐 욕심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범계위가 단악선을 보며 힘을 주어 말했고 한설화는 어느새 다가가 단악선을 꼭 안아 주었다.
“잘 생각했다.”
괴로움과 두려움을 딛고 스스로 일어난 단악선이 그녀는 그저 기특하고 대견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초악량 또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그것이 주어진 운명이라면 최선을 다해 맞설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