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74)
신마의선-74화(74/500)
신마의선 (74)
단악선의 여린 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혼자 견디고 버텨 보려는 모습이 새삼 안타까웠다.
동시에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방법을 알 수 없으니.
“에잇.”
범계위가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세 병의 술을 모조리 비운 범계위가 불콰해진 얼굴로 초악량을 불렀다.
“초 형.”
“……?”
“차라리 우리가 떠나는 게 어떻수?”
“뭐?”
“단 의원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 아무래도 우리 때문인 것 같아서 그렇수.”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어디 우리 때문이더냐? 장락방 놈들은 처음부터 단 의원을 노리고 온 것인데.”
“만약 우리가 없었다면? 그래도 장락방 놈들이 단 의원을 노렸을까?”
“그게 무슨 소리…….”
초악량이 말끝을 흐렸다.
범계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림맹에 간 것도, 그것 때문에 신분이 드러난 것도 전부 우리 때문이잖수.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드러날까 봐 이렇게 숨어 지내는 거고.”
초악량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범계위가 다시 물었다.
“만약에 우리가 떠난다면 단 의원은 어떻게 될 것 같소?”
고심하던 초악량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보다는 자유롭겠지.”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의원이 숨어 지낼 이유가 사라지는 거요. 굳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마녀가 있으니 단 의원을 염려할 필요도 없고.”
자신들과 달리 한설화는 십대악인이 아니었기에 강호의 이목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사무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범계위의 반문에 사무심이 우려를 드러냈다.
“초 선배님과 달리 범 선배님은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다.
초악량의 치료는 꽤 진전이 있었다.
내상은 이미 완치되었고 부족한 내공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반면 범계위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곤 하나 신단과 단악선의 도움이 아니면 언제 다시 광증이 재발할지 모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하는 사무심의 눈빛에 범계위가 피식했다.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평생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잘만 살아왔는데, 뭐.”
범계위가 초악량을 향해 씨익 웃었다.
“안 그렇수?”
이때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설화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멍청이.”
한설화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범계위를 노려봤다.
“가뜩이나 사람을 잃어서 슬퍼하는 아이야. 그런데 갑자기 떠나면? 그 아이가 더 힘들어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대신 우리가 떠나면 더 많은 인연을 얻을 수 있겠지.”
“뭐?”
“당장 여기까지 달려온 개방을 봐. 단 의원을 지켜 주러 온 거잖아. 거기에 단 의원에게 신세를 진 무림맹주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거고. 지난번에 보니 화산의 말코들도 단 의원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던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던지라 한설화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우리가 없는 것. 어떤 게 현실적으로 단 의원에게 이익일까?”
“……!”
한설화는 내심 기가 막혔다.
살다 살다 범계위에게 말발로 밀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그때 범계위가 한숨을 터트렸다.
“이러다 없던 병도 생기겠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부근을 가리켰다.
“머리 아픈 건 어떻게 견뎌 보겠는데 여기가 아픈 건 안 되겠어.”
그 말에 초악량이 복잡한 눈빛을 드러냈다. 천하의 악명 자자한 망산초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초 형, 짐 챙기슈.”
“…….”
“우리 떠납시다.”
“기다려라.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뭐가 어렵수? 애초에 우리만 없었으면 단 의원은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능소밀이 한설화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만류해 주길 내심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감에 휩싸였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음처럼 냉랭한 눈빛을 흘릴 뿐, 한설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능소밀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슬픔에 잠길 단악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젠장!’
능소밀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렇게 얼마 후.
능소밀의 이야기를 들은 단악선이 깜짝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다.
“떠나더라도 이렇게는 아니다. 단 의원과 인사는 해야지.”
“그 얼굴을 보면 말을 못 할 것 같수. 그러니 그냥 갑시다.”
대화를 하던 그들은 다급히 달려오는 걸음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범계위가 꾸린 행장을 확인한 단악선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세요?”
“어? 그게…….”
대초자곤까지 챙겨 든 범계위는 할 말이 궁색해졌다.
고민하기를 잠시.
이번 일을 계획한 범계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랑 초 형은 여길 떠날 생각이다.”
단악선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네? 왜요?”
“이렇게 지내는 게 갑갑해서.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쥐 새끼마냥 숨어 지낼 사람들은 아니지 않느냐?”
“그날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앞으로 마음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요.”
범계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를 떠올리자 새삼 울컥해진 것이다. 사부 이후 유일하게 자신을 염려해 주던 단악선이었다.
단악선이 이번에는 초악량을 향해 물었다.
“아저씨도 떠나실 건가요?”
“고민 중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이 다독이듯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생각해 보아라. 우리만 없다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뭐든지 이룰 수 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요?”
“여기서 숨어 지낼 필요도 없고, 네가 바라던 의가를 세울 수도 있다.”
단악선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초악량은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운명에 맞서겠다고 했지? 어쩌면 지금이 그 첫걸음일 수도 있다.”
“…….”
“무공의 기초는 닦아 주었으니 나머지 부분은 한 누이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면 될 것이다. 사실 한 누이의 무공만 익혀도 언젠가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게 될 테지만.”
단악선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자 범계위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초악량 역시 마음이 무거운 건 마찬가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거 알아요?”
단악선이 눈을 들어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사람들 전부 줘도 어떻게 아저씨들과 비교가 되겠어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의아해하던 그들은 이내 한설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단악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 잽싸게 숨는 능소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범계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이?’
그 순간.
“방법을 찾아볼게요.”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단악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제게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초악량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하의 그조차 움찔하게 만들 만큼 강렬한 눈빛.
처음 보는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과 범계위는 결국 뜻을 꺾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남긴 채 단악선이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멍청하긴.”
어느새 다가온 한설화가 초악량과 범계위를 향해 핀잔을 던졌다.
범계위의 눈빛이 대번 사나워졌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그러나 이어진 한설화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 때문에 저 아이가 저렇게 애쓰는지 진짜 모르겠어?”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지던 한설화가 냉랭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 * *
그날 밤.
흔들리는 촛불을 가만히 응시하던 단악선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 걸까?’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방법이 하나 있었다.
다만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 미뤄 두었을 뿐이다. 초악량과 범계위에게 하루의 시간을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단악선이 서재로 걸어가 두 권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성수의록과 생사의록에 각각 딸려 있는 임상 기록서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 단악선의 눈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초악량과 범계위.
두 사람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단악선이 다시 전각을 나선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초악량과 범계위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전각 앞을 서성이며 꼬박 밤을 지새웠다.
두 사람을 마주한 단악선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초악량과 시선을 맞췄다.
“세상에 나가는 것도 좋고, 의가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어딘가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진짜 원하는 건 아저씨들과 계속 함께 지내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단 의원…….”
복잡한 표정으로 초악량이 말끝을 흐렸다.
어젯밤 그가 단악선에게 했던 말.
자신들이 없으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단악선이 이번엔 범계위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숨어 지낼 필요도 없어요.”
“……?”
단악선이 환하게 웃었다.
“방법을 찾았거든요.”
* * *
무위 시장 한편.
오가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거적을 펼친 이립이 그 위에 앉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거, 빌어먹기 딱 좋은 날씨네.”
느긋하게 벽에 기대 나른한 눈빛을 흘리던 이립은 문득 얼굴에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바짝 다가온 홍적문이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또?”
“그런데 진짜 왜 온 거야?”
“왜? 내가 못 올 데 왔냐?”
“방주라는 자리가 그렇게 한가한 자리가 아니잖아.”
“이제 슬슬 방주 자리에 관심이 생기나 보군? 언제든지 말만 해. 바로 후임자로 자네를…….”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평소보다 진지한 홍적문의 눈빛에 이립이 김빠진 듯 피식 웃었다.
“불안해서.”
“……?”
“자네 성격상 사고 하나 칠 것 같았거든.”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야? 내가 사고를 왜 쳐?”
“저놈들 때문에.”
“그게 무슨……. 어?”
이립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홍적문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저놈들이 왜?”
시장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무인들을 발견한 홍적문의 눈에서 살벌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순간 옆에서 날아든 누더기 외투가 홍적문을 뒤덮었다.
그렇게 홍적문을 숨긴 이립이 조용히 웃었다.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배워.”
이립이 기도를 갈무리해 깊은 곳에 감췄다.
순식간에 평범한 거지로 변한 이립은 가만히 자리를 지킨 채 무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들고 있던 바가지를 휙 던졌다.
파삭.
마침 그 앞을 지나던 무인 한 명이 그대로 바가지를 밟았다.
그 위치와 순간이 너무나 절묘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
무인이 당황한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이립이 펄쩍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인정도 없는 놈들! 동냥은 못 할망정 쪽박을 부숴? 에라이,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