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75)
신마의선-75화(75/500)
신마의선 (75)
난데없이 욕설을 뒤집어쓴 무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예 한술 더 떠 눈앞의 거지가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내 바가지 물어내라! 증조부 시절부터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져 온 우리 집안 보물 물어내라고!”
“이 미친 거지가?”
무인 한 명이 위협적인 태도로 이립에게 다가섰다.
보통은 그 기세만으로도 꼬리를 말기 마련.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거지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떨쳐 내려 했으나, 이게 웬걸. 아무리 흔들고 용을 써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나와 보시오! 이 불학무식한 놈들이 불쌍하고 가엾은 거지를 괴롭힌다오!”
“……!”
무인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놈이 하도 악을 써 대는 통에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그만.”
무인들 가운데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오른쪽 이마에서 시작해 콧잔등을 가로질러 반대편 턱까지 길게 이어진 칼자국.
그래서 절로 섬뜩한 느낌을 지닌 사내였다.
짤랑.
그가 바닥에 은자가 담긴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소리로 보아 들어 있는 금액이 적지 않아 보였다.
“바가지값이다. 그러니 그만 물러나라.”
이립이 재빨리 주머니를 낚아채더니 입구를 열어 금액을 확인했다. 그리곤 품속에 집어넣더니 씩 웃었다.
그 모습에 무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소란을 일으켜 좋을 것이 없으니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나으리들.”
이립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돈이 모자라는뎁쇼.”
“뭣?”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무인들을 향해 이립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보라니까. 무려 십오 대에 걸쳐 내려온.”
“거짓말하지 마라! 조금 전에는 증조부 시절부터 물려받았다 하지 않았느냐!”
“아, 그 십오 대 조상님 성함이 증조부요. 증 자 성에 조 자 부 자 쓰시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무인들은 기가 막혔다.
대낮에, 그것도 무림맹의 파사단원들을 상대로 대놓고 사기를 치려 들다니!
칼자국을 얼굴에 지닌 사내.
왕곤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살기 실린 스산한 음성에 이립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저 눈 치켜뜬 것 좀 보소? 이러다 사람 잡겠네?”
“감히…….”
왕곤의 손이 검파를 붙들었다.
그러나 검이 뽑히는 일은 없었다.
유령처럼 나타난 손 하나가 검을 뽑으려는 왕곤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
왕곤은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고수.
그것도 자신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뒤집어쓴 더러운 누더기를 뚫고 나온 가슴 서늘한 눈빛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사위를 찍어 누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대로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왕곤은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를 본 이립이 약 올리듯 웃으며 말했다.
“에헤이, 눈에 힘 빼라니까? 자꾸 그러면 얘랑 눈싸움 시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립이 홍적문에게 씌웠던 누더기를 잡아챘다.
“……쾌수여의!”
왕곤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사람의 명호에 파사단원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다는 건……?’
왕곤은 비로소 이립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젠장!’
개방 방주를 바로 눈앞에 놓고도 몰라보다니.
상대가 하도 정신을 사납게 흔들어 놓는 통에 이목이 흐려진 것이다.
“어디 이것도 깨 보시지?”
이립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몽둥이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개방의 권위를 상징하는 방주의 신물.
타구봉.
왕곤이 재빨리 허리를 꺾었다.
“무림맹 소속 파사단 구 조장 왕곤이 개방 방주님을 뵙습니다.”
그 말에 파사단원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황급히 예를 갖췄다. 인사를 받기 싫다는 듯 이립이 손을 내저었다.
“아, 됐고. 바가지값이나 얼른 내놔.”
왕곤이 이를 악물었다.
“……얼마면 됩니까?”
“어디 보자, 한…… 천만 냥?”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하던 왕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제야 이립이 웃음을 거두고 왕곤의 눈을 응시했다.
“돌아가.”
“네?”
“젊은 사람이 벌써 가는 귀가 먹었나? 그대로 돌아서 나가라고.”
“하지만 저희는 무림맹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무슨 명령?”
“그건…….”
“또 누가 자네들 맹주를 험담했나? 아니면 십대악인이라도 나타났어?”
“…….”
“그쪽에는 내가 따로 연락을 취할 테니 돌아가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왕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개방 방주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무림맹과 뜻을 같이하는 그가 축객령을 내리는 상황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립의 표정이 싸늘해진 것도 그때였다.
“예전에 파사단에서 신의의 아들을 붙잡아 심문했다지?”
그 말에 왕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그건…….”
“보아하니 맹주는 아직 그와 관련한 보고를 듣지 못한 모양이던데? 아마 자네들끼리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가 봐?”
“…….”
“맹주가 그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자신의 딸을 구해 준 의원을 독하게 심문했다니. 아, 참! 그 이유가 진성의가를 겁박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이립의 추궁에 왕곤은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자네, 내 말이 우습지?”
“아, 아닙니다!”
이립이 홍적문을 가리켰다.
“여기 이 사람 보이지?”
왕곤이 움찔하자 이립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 정도나 되니 말로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친구라면…….”
이립이 말끝을 흐리자 왕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검파를 움켜쥔 그의 손을 감싼 손아귀의 압력이 갑자기 높아졌기 때문이다.
손가락뼈가 으스러지기 직전 왕곤이 외쳤다.
“그만! 그마안!”
이립이 손을 젓자 살기등등하던 홍적문이 거짓말처럼 물러섰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손을 문지르던 왕곤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귀 방이 본 맹을 적대한 사실을 반드시 보고할 것입니다.”
“내 소중한 바가지를 먼저 깬 것은 자네야.”
억울한 표정으로 이립을 노려보던 왕곤이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홍적문이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자네 팔 하나 정도 잘라 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쾌수여의라고 하면 제법 먹어 주니까.”
“내 팔이 잘리기 전에 방주 머리통이 먼저 깨지지 않을까 싶어서 묻는 말이야.”
이립이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
“지금 무림맹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것 같나?”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 쪼개지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 뜻이야.”
이립이 설명을 이어 갔다.
“애초에 마교를 몰아내고 나서 무림맹은 그 역할을 다했어. 온갖 명분을 만들어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른 상황이지. 예를 들어…….”
이립의 시선이 저자 어딘가로 향했다.
“화산파가 이곳에 있는 것도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파사단을 별도로 투입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홍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백대악인 토벌을 선언한 이후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문파가 있었던가?”
오대세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파가 소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다.
“무림맹, 아니 무림맹주는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이에 홍적문이 아는 척을 했다.
그 역시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긴 무림맹주가 무림맹을 자신의 사병처럼 움직여 댔으니…….”
“천이단도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네. 맹주의 개인적인 비리 조사를 시작했다더군.”
“천이단의 책임자가 제갈가의 그 살쾡이 같은 계집애 아니야?”
“맞네. 괜히 지낭리(智囊狸)라 불리는 게 아니지. 보통 교활한 게 아니야.”
이립이 눈을 들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궁백은 이미 신뢰를 잃었어. 그리고 머지않아 분열이 시작될걸세.”
“그래도 순순히 당할 인간이 아닌데?”
이립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확실히 남궁백이 대단한 인물인 건 확실했다.
“어쨌거나 우리 개방은 무림맹과 노선을 달리할 걸세. 언제까지 그들 장단에 맞춰 줄 수만은 없지.”
“명분은 있고?”
“가만히 있어서 그렇지, 찾아보면 많지.”
“예를 들면?”
“백대악인 토벌.”
무림맹이 추살령을 내린 명부에는 악인으로 분류하기 애매한 이가 상당수였다.
사파라곤 하나 개중엔 인망을 얻은 자도 있었고, 개방과 친분을 지닌 자도 적지 않았다.
“대력귀(大力鬼) 맹염 같은?”
“그래. 지금은 사천 지부가 그를 보호하고 있지. 그리고 그런 일이 어디 우리 개방뿐일까.”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은원으로 얽히고설킨 곳이 바로 강호다.
세가와 사이가 나쁘지만 다른 문파와는 친분이 있는 무림인 상당수가 백대악인에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 명단을 작성하는 데 사적인 감정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거지.”
무림맹은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무리수가 된 셈.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 개방 방주님이시죠?”
“응?”
고개를 숙여 말을 건네 온 상대를 확인한 이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는……!”
“안녕하세요. 저는 단악선이라고 해요.”
“오! 소문 많이 들었네. 자네 춘당(椿堂)께는 본 방이 많은 신세를 졌지.”
반색하며 다가선 이립이 단악선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반갑게 흔들었다. 그런데 뒤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헉!”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비척거리며 물러서는 홍적문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래?”
홍적문은 대답 대신 창백한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누가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설마?’
갑자기 이립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왜 거지들은 씻지를 않는 거지?”
“……!”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이립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시 후 천천히 돌아선 이립은 단악선 뒤쪽에 서 있는 한설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립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설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사방에 진동하던 악취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이립이 재빨리 홍적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에 홍적문도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한설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매를 들어 코를 가린 채 지그시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를 감싼 어색한 침묵에 두 사람이 버거워할 때 한설화가 물었다.
“대답은?”
“예?”
반문하던 이립이 뒤늦게 한설화가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씻지 않으니까 거지지요.”
홍적문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면 동냥질이 안 됩니다.”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웃었다.
그만큼 한설화의 못마땅한 시선이 더없이 곤혹스러웠다.
그런 그들을 구해 준 건 단악선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절 도와주셨다고 해서요.”
이립이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아이고, 신세는 무슨! 우리 개방이 신의께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향후 백 년은 더 갚아도 모자랄 걸세!”
단악선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조금씩 이립과 홍적문이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설화가 말했다.
“멈춰.”
그 한마디에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따라와.”
그 말만 남긴 채 한설화가 돌아섰다.
이립과 홍적문이 애처로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한설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