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77)
신마의선-77화(77/500)
신마의선 (77)
“왜 그렇게 혼자 실실 쪼개슈? 괜히 사람 무섭게.”
과거를 회상하던 초악량이 범계위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말해 뭐 하겠소? 괜히 입만 아프지.”
“이제 그만 몸을 숨기자.”
소림사가 당대에 명성이 자자한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향화객(香華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중 누군가가 혹시라도 자신들을 알아본다면 괜히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숲속에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었다.
* * *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단악선의 말에 한설화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소림의 산문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내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단악선이었다.
그런데 계단 끝에 이르자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꺼냈다.
단악선이 배시시 웃으며 계단을 가리켰다.
“소림사로 향하는 계단의 숫자요. 정확히 백팔 개였거든요.”
백팔 번뇌를 상징하는 개수만큼 만들어진 계단은 나름 소림의 명물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야기 속의 계단을 직접 확인하니 새삼 소림사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한설화가 빙긋 웃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기재라도 아이는 아이다 싶었다.
이때 저 멀리에서 향화객을 맞이하는 지객승 한 명이 다가왔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그 아래 맑은 눈빛이 인상적인 어린 승려였는데, 머리에 계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식으로 승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미승인 모양이었다.
사미가 공손한 태도로 한 손만 들어 반장했다.
스스로 팔을 잘라 달마로부터 입문을 허락받은 혜가.
그의 단비구법(斷臂求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소림만의 전통이었다.
붉은색 승복을 입는 이유도 마찬가지.
당시 흘린 혜가의 피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반장으로 예의를 갖춘 사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멀리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저쪽 방명록에 성함과 방문 목적을 적어 주시면 지객당주님의 허락을 받아 경내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경내에는 미시까지만 머무르실 수 있사오니 부디 숙지하시어 불편하신 일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쉬지 않고 한 번에 주르륵 읊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저희는 혜공 스님을 만나러 왔어요.”
단악선의 말에 사미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혜공이요? 본사에 혜 자 배(輩) 스님은 안 계시는데요?”
단악선이 들고 있던 책자를 확인했다.
“여기엔 분명 혜공 선사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곳의 방장이신…….”
이번엔 사미가 당황했다.
“네? 방장 큰스님이요? 우리 큰스님은 법 자 배에 연자 법명을 쓰고 계시는데요?”
단악선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어린 사미가 출가하기 전에 방장이 바뀌었다면 전대 방장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장 큰스님께 전해 주시겠어요? 신의의 아들이 만나 뵙길 청한다고요.”
“우리 큰스님은 아무나 뵐 수 없는데요. 더구나 지금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계셔서 외부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한설화가 나섰다.
“그래도 일단 말은 전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크게 혼날 수도 있으니.”
한설화의 차가운 눈빛과 음성에 사미가 움찔했다.
“그렇다면 어른들께 알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미승이 부리나케 소림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악선이 빙그레 웃었다.
“저 꼬마 스님은 무척이나 귀엽네요.”
한설화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를 보고 귀엽다 말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재미있었다.
“대머리들을 믿지 마라.”
한설화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범계위를 포함해서.”
단악선이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셨다간 많은 사람들에게 원성을 사게 될 거예요.”
“상관없다. 그런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게다가 범 아저씨의 경우는 다르죠. 스스로 머리를 민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그래. 얼마나 성질머리가 더러우면 머리카락이 전부 도망갔을까.”
오랜만에 단악선과 둘만 있어서인지 유난히 말이 많아진 한설화였다.
이각쯤 지났을까.
산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건장한 체구에 바위처럼 단단한 느낌을 주는 무승(武僧)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눈에 봐도 육중해 보이는 선장이 들려 있었다.
“방장 스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곧 답을 주실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나한이군.”
한설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다. 나한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저러니까.”
오십 년 전에도. 그리고 백 년 전에도.
천왕문(天王門)을 지키는 사대금강의 얼굴을 흉내 낸 것 같은 얼굴은 여전했다.
그녀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눈앞의 나한은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처음처럼 엄정한 눈빛과 삼엄한 기세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산문에서 걸어 나왔다.
이마 위로 자리 잡은 흐릿한 계인만큼이나 세월을 짊어진 노쇠한 체구, 그래서인지 걸음을 옮기는 것마저 위태해 보이는 노승(老僧)이었다. 그러나 온화한 표정과 달리 두 눈만큼은 형형한 안광을 품고 있었다.
처음 말을 전한 나한이 극진한 예를 갖춰 노승을 맞이했다.
당대 소림의 가장 높은 웃어른이자 모든 대사를 결정하는 방장, 법연(法然) 대사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콩콩.
명아주 나무를 꼬아 만든 선장으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오는 법연, 그 뒤를 말없이 따르는 무승들은 소림의 정예인 나한이 분명했다.
“방장 스님이신가요?”
단악선의 물음에 법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단악선을 향해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총명하고 선한 눈빛을 지닌 아이는 한눈에 봐도 그 자질이 비범해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단악선의 얼굴을 뜯어보던 법연이 탄성을 터트렸다.
“바로 알겠군. 그 눈매며 얼굴은 틀림없는 그의 핏줄이로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법연이 단악선을 향해 다가섰다.
이에 한설화가 손을 들어 법연의 걸음을 막았다.
“거기서 말해.”
나한들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순간 달라진 나한들의 기세에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개개인의 기파는 한설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여럿이 모여 뿜어내니 그 위압감이 실로 대단했다.
“반가운 마음에 빈승이 결례를 했습니다그려.”
법연이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한설화를 바라봤다.
“지고하신 강호의 노선배께서 이 궁벽한 폐사를 찾아 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나를 알아?”
“산문을 넘은 적이 몇 번 없어 강호 경험이 미천하다곤 하나 누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강호의 전설까지 몰라볼 만큼 눈이 어둡진 않습니다.”
법연이 조용히 웃었다.
“빙옥선자 한 선배님 아니신지요?”
그 말에 법연 뒤에 도열해 있던 나한들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설마하니 강호의 살아 있는 역사라 불리는 존재와 마주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누가 저 외모를 보고 백 살이 넘은 고수라 생각할 수 있을까.
법연이 단악선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온화한 미소를 건넸다.
“절 찾아온 손님과 인사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한설화가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어차피 경고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긴 것이다.
“신의의 혈육을 이리 보게 되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구나.”
“저도 반가워요.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래? 그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하더냐?”
“대정대법(大正大法).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실 분이라 하셨어요. 선종의 법통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실 분이라고도 하셨고요.”
“허허. 나를 그리 높게 평가했다니 의외로군. 사람에 대한 평가가 늘 박했었는데 말이야.”
단악선이 멋쩍게 웃었다.
소림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를 듣는다면 두 번 다시 박하다는 표현을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림 방장의 면전에서 ‘머리만 밀면 강해진다고 믿는 미친놈들’ 운운하는 말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신의는 잘 지내시고?”
“돌아가셨어요.”
“무어라?”
법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래 수행한 노승답지 않게 법연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급해 그리 바쁘게 갔나, 이 사람아.”
흐려진 얼굴로 중얼거리듯 읊조린 그 말에 단악선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자신 말고도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잠시 소회에 젖어 있던 법연이 단악선에게 물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래, 나를 보자고 했다고?”
법연의 물음에 단악선이 격동한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저는 스님 한 분을 뵈러 왔어요.”
“법명이 어찌 되는가?”
“혜공 스님이요.”
법연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사숙님은 이미 오래전에 안거에 드셨단다. 외부인은 물론 우리와도 접견을 허하지 않으신 지 오래되었지.”
“아……!”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는 단악선의 모습에 법연의 노안도 덩달아 흐려졌다.
“이렇게 하자꾸나.”
법연이 제안했다.
“내 직접 그분께 여쭈어보마.”
단악선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방장 스님.”
“다른 사람도 아닌 신의, 그 사람의 아들이 한 부탁인데 마땅히 애써야지. 그가 우리를 위해 베푼 은혜가 얼마인데.”
법연이 한설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빈승이 안내하겠습니다.”
나한들의 눈에 언뜻 당혹감이 떠올랐다.
하나 이미 방장의 허락이 떨어진 상황. 그들은 말없이 양옆으로 멀찍이 물러서 길을 텄다.
그런 나한들을 뒤로한 채 단악선과 한설화가 소림사 경내로 들어섰다.
소림사 곳곳을 살피는 단악선의 눈빛은 유난히 반짝였다.
소문 무성한 소림의 경관이 마냥 신기했기 때문이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무림의 성지답게 건물과 현판, 기둥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세월의 중후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웅혼한 전각에서는 힘이 느껴졌고, 대지를 딛고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수목에서는 기품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중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아침 예불을 준비하기 위해 사찰 곳곳을 청소하는 도량석(道場釋)을 시작한 승려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고단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지극히 경건하고 겸허한 태도로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하나같이 올곧은 그들의 눈빛은 소림만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
방금 전 마주했던 나한들도 그랬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학승(學僧)들에게서도 범상치 않은 수행자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따금 단악선과 한설화를 보고 깜짝 놀라는 승려들도 있었다.
대부분 젊은 승려들의 반응이 그랬다.
이에 단악선은 처음엔 저들이 향화객을 낯설어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향화객은 지객당 근처에만 머물 뿐, 중지인 이곳에 드나들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외부인이 경내에 머무는 것 자체가 생소할 터.
그러나 이는 단악선의 착각이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