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78)
신마의선-78화(78/500)
신마의선 (78)
법연이 허허롭게 웃으며 한설화에게 말했다.
“부디 면사를 착용해 주시겠습니까?”
한설화가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법연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선자의 미모에 이 늙은이도 가슴이 뛰는데, 젊은 중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면사가 답답해 잠시 벗었던 한설화가 말없이 다시 면사를 고쳐 썼다. 그렇게 방장실에 도착하자 법연은 제자들에게 차를 내오라 지시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법연이 물었다.
“본사의 대주(大胄) 큰스님을 뵙고자 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주.
즉, 선대의 법통을 이은 의발전인(衣鉢傳人)이라는 의미였다.
한설화가 대답 대신 단악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에 자연스럽게 법연의 시선도 단악선을 향하게 되었다.
“그분을 뵙고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요.”
법연의 얼굴 위로 잠시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 방장의 직을 맡고 있으나 그분이 거절하신다면 무엇도 강제할 수 없단다.”
단악선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뵙는다면 좋겠지만 거절하신다면 그냥 돌아갈게요.”
법연이 만족한 듯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때 사미 한 명이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차를 들여왔다.
“어?”
그 사미의 얼굴을 확인한 단악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산문에서 자신들을 맞이했던 그 사미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단악선과 시선이 마주친 사미 역시 깜짝 놀랐다. 혹시나 싶어 말을 전하긴 했으나 방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저 아이는 방장이 손님을 받지 않는다 했는데?”
한설화의 물음에 법연이 단악선을 보며 웃었다.
“손님도 손님 나름이지요.”
“……?”
“신의의 이름을 어찌 가볍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한설화를 보며 법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빈승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면 순순히 돌아가셨겠습니까?”
한설화가 차갑게 코웃음 치자 법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승이 손님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청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혜공 선사, 즉 제게는 사숙 되시는 분은 의발(衣鉢)을 물려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선종 일맥 대대로 전승되는 의발.
즉 가사와 바리때를 물려주는 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하는 물증으로, 불제자들을 이끌어 갈 지도자 역할을 맡긴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안거에 드셨습니다. 남은 번뇌를 남김없이 떨치고 열반에 드는 입멸(入滅)을 앞두고 계시지요. 그래서 그분께서 의발을 전수할 제자를 지목할 때까지 외부 손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법연이 지필묵을 가져와 짧은 서신을 작성했다. 그리고 손짓으로 사미를 가까이 불러 서신을 건넸다.
“가서 나한당주에게 이것을 전하고 이조암(二祖庵)으로 가져가라 이르거라.”
“료공 스님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단악선과 한설화를 힐끔거리며 사미가 물러갔다.
그때 한설화가 질문을 던졌다.
“나한당주는 죽은 걸로 아는데? 법명이 료범이라고 했던가?”
“……!”
한순간 크게 흔들리는 법연의 눈빛을 한설화는 놓치지 않았다.
“혈수존자를 잡겠다며 협공을 했다지? 당가의 천수암제와 남궁가의 장로까지 합세해서.”
법연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큼 가장 아픈 곳을 후벼 파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질문을 던진 한설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법연이 나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모든 것이 빈승의 불찰입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단악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스님, 혀를 한번 내밀어 보시겠어요?”
갑작스런 말에 눈을 뜬 법연이 살짝 당황했다.
단악선이 어느새 바짝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조금 이상했는데, 조금 전에 확신이 들어서요.”
“무엇을 확신했다는 말이냐?”
“스님의 병환이요.”
“……!”
단악선이 눈으로 허락을 구하고 손을 뻗어 법연의 맥을 잡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단악선은 긴 침묵 뒤에 한숨을 쉬었다.
“심장의 화기가 너무 강해져서 심맥에 굉장히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적어도 일 년 이상 된 것 같은데요?”
법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신경 쓸 것 없다. 내 몸 상태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요?”
법연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혀를 내밀어 보세요. 그래야 더욱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어요.”
“애쓰지 말거라. 이 또한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업보이니.”
법연의 만류에도 단악선은 막무가내였다.
“굉장히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지난 과오를 반성하게 만드는 죽비(竹篦)라 생각하면…….”
단악선이 법연의 말을 잘랐다.
“죽비 좀 맞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병은 사람을 죽이죠. 그것도 고통스럽게요.”
단악선이 진지한 눈빛으로 법연을 응시했다.
“지장보살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스스로 지옥에 몸을 던지셨다죠?”
“……?”
“그게 그분께 주어진 소명이라서 그러셨을 거예요.”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단악선을 응시하던 법연이 이어진 말에 허허롭게 웃었다.
“제 소명은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한다면 저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겠죠. 그리고 불제자는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들었어요.”
“내가 치료를 거부하면 불제자로서 큰 죄를 짓는다는 뜻이 되는구나.”
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얻어 낸 단악선이 법연의 눈과 혀 색깔을 확인하고, 등과 가슴에 귀를 대고 온몸 곳곳을 두드려 보기 시작했다.
“역시…….”
단악선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 내 병명이 무엇이냐?”
“심화상염(心火上炎)이에요.”
“화병……이란 말이냐?”
“그게 원인이긴 한데, 훨씬 심각한 상태로 악화 중이에요.”
고개를 저은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심장에서 몸 전체로 혈액을 전달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혈관이 있어요. 심장에 연결된 만큼 가장 높은 압력을 받는 혈관이죠. 그래서 그 어떤 혈관보다 유연하고 질겨야 해요.”
“그런데?”
“그 혈관 일부가 굳어지면서 높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미세한 파열이 발생하고 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길게 찢어지겠죠.”
단악선이 물었다.
“등 쪽 견갑골 사이에서 극통을 느끼셨죠?”
법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물었다.
“그 통증은 마치 도끼나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을 테고요. 아마 일생 동안 경험한 고통 중 가장 심했을 거예요.”
법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자신의 병을 파악한 것이 못내 신통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혈관이 찢어져서 피가 엉뚱한 곳으로 향할 거예요. 그로 인해 피를 공급받지 못한 신경이 기능을 잃어 하반신이 마비될 수도 있고요.”
“치료는 가능하겠느냐?”
“다행히 크게 늦지는 않아 치료는 가능해요. 전중(檀中), 내관(內關), 신문(神門)에 침을 놓아 혈압을 낮추고, 약을 써서 손상 입은 혈관 내부를 회복시키면 되니까요. 그러나…….”
“……?”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요. 혈압이 높아지는 이유가 심인성(心因性) 때문인 것 같거든요.”
법연이 기가 막힌 듯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 신의의 아들이 온 줄 알았더니 신의가 왔구나.”
“그럼 치료를 시작할게요.”
단악선이 품속에서 침이 든 목갑을 꺼냈다.
상아 재질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푸른색 침을 단악선이 쥐는 순간 법연이 탄성을 흘렸다.
“선앙침이로구나!”
신의를 상징하는 그의 신물을 마주한 법연은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많이 아프실 거예요.”
단악선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자 법연은 괜찮다며 눈을 감았다.
단악선이 미리 보아 둔 혈 자리에 선앙침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시침을 하던 단악선은 이각이 지나서야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눈을 뜬 법연이 내심 탄복했다.
이각 전에 비해 확실히 체감할 정도로 증상이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나직이 불호를 외는 법연을 향해 단악선이 말했다.
“드실 약은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약재를 구하고 제조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혹 그 약의 제조법이 신의의 비전인가?”
법연의 물음에 단악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제조법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제 처방전만 있으면 일반 의가에서도 만들 수 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처방전만 써 주게나.”
“아! 약왕전(藥王殿)!”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린 단악선이 탄성을 터트렸다.
소림에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별도의 전각이 있었다.
시설이나 규모, 그리고 의술의 수준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당대 최고의 의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악선이 지필묵을 빌려 처방전을 작성했다.
이를 받아 든 법연이 한숨을 흘렸다.
그 모습에 단악선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약만 제때 챙겨 드신다면 빠르게 호전되실 테니까요.”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의아해하는 단악선에게 법연이 복잡한 눈빛을 던졌다.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할꼬?”
그때였다.
방장실 밖에서 법연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방장 스님, 소승 료공입니다.”
“들어오너라.”
그 말에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었다.
차분한 눈빛이 인상적인 무승.
처음 산문에서 조우했던 나한이었다.
이제 보니 그가 당대 나한들을 이끄는 나한당의 당주였던 것이다.
“그래. 서찰은 전했느냐?”
법연의 물음에 료공이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갖춰 대답했다.
“존안을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찰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달리 특이한 점은 없었고?”
료공이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단악선과 한설화 쪽에 머무는 것을 눈치챈 법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해도 괜찮다.”
그제야 료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째 곡기를 끊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료공이 말끝을 흐리자 이어질 말을 짐작한 법연의 표정이 흐려졌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법연이 단악선과 한설화를 향해 말했다.
“혜공 사숙께서 따로 연락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는 한설화를 향해 법연이 빙긋 웃었다.
“머잖아 공양 시간입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폐사의 절밥을 대접할 기회는 주셔야지요.”
법연이 료공에게 지시했다.
“손님들을 머무실 곳으로 안내하고, 수발을 드는 사미들에게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고 일러두라.”
“예, 방장 스님.”
료공이 단악선과 한설화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승이 안내하겠습니다.”
료공을 따라 두 사람이 방장실을 떠나자 법연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눈빛으로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몸을 일으켜 향한 곳은 약왕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그곳에 서 있던 법연에게 약왕전을 책임지고 있는 수좌승이 다가와 예를 갖췄다.
“차도가 있는가?”
어제와 같은 물음.
돌아온 대답 역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
절로 나오는 법연의 한숨에 수좌승이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법연이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정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불호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