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82)
신마의선-82화(82/500)
신마의선 (82)
“목불에서 사리는 무슨!”
법연의 꾸짖음에 젊은 승려가 움찔했다.
반면 목불을 부순 당사자인 혜공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역시 목불의 잔해 사이로 드러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혜공이 젊은 승려가 사리로 착각한 물건을 집어 자세히 살폈다.
검게 옻칠을 한, 둥근 형태의 목함(木函)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목불이 진짜 사리를 품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마도 선대 조사들 가운데 누군가가 남긴 유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승(禪僧)의 기행으로 명성 자자한 불가 종파가 선종이다.
소림 역시 그 선종의 맥을 잇는 곳.
짓궂은 장난에 도가 튼 조사들이 널리고 널린 곳이다.
그래서 단번에 목함의 의미를 눈치챘다.
“처음부터 불상을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도록 안배된 것이었던가…….”
부처도, 조사도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에 매달리면 진리 자체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 진리를 얻고자 하는 자.
그러한 각오와 정신으로 정진하라는 의미다.
살불살조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장난인 것이다.
새삼 목함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오랜 세월 소림의 역사와 함께해 온 불상에서 나온 물건이니만큼 그 내력 또한 범상치 않을 터.
콰직.
혜공이 힘주어 목함을 부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자였다.
‘세(洗)… 수(隨)…… 경(經)?’
책자에 적혀 있는 글자를 무심코 되뇌던 법연이 일순 석상이 된 듯 굳어졌다.
“세수경!”
나한당주 료공의 입에서 터져 나온 그 한마디에 다른 승려들도 덩달아 경악성을 터트렸다.
“달마 조사께서 남기신?”
“실전된 거 아니었나?”
한번 시작한 소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세수경이 지닌 의미가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다.
선종의 초대 조사이자 지금의 소림을 존재하게 만든 인물, 보리달마.
그는 생전에 두 개의 저서를 저술했다.
바로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세수경은 실전되어 사라졌지만 역근경은 아직까지도 소림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천하 무학의 근원이라 자부하는 소림 무공의 근본이기도 했다.
“대단한 것이 들어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법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그것이 세수경이었다니.
만약 진본이라면 불존의 사리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세수경을 깨우친 사람은 충무왕(忠武王)이 마지막이었지.”
멸망하던 북송을 구원한 불세출의 영웅 악비(岳飛).
충무왕은 그의 시호였다.
혜공이 묵묵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세수경의 내용을 확인하던 노승의 눈빛.
그 위로 번져 가는 감격과 기쁨의 열기를 모든 승려가 숨죽여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혜공이 입을 열었다.
“공덕녀(功德女)와 흑암녀(黑暗女)인가…….”
법연은 혜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바로 짐작했다.
열반경(涅槃經) 성행품(聖行品)에 언급된 이야기.
공덕녀는 재물과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녀(善女)인 반면 흑암녀는 불행과 재난을 가져다주는 악녀(惡女)다. 그리고 그들 자매는 늘 항상 같이 다닌다고 했다.
범계위의 패악질에 비록 불상은 사라졌지만 덕분에 조사의 비전이 수록되어 있는 세수경을 되찾게 되었다.
“방장께서는 이것이 폐사에 어떤 의미를 지닌 물건인지 아시는가?”
법연이 불호를 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근경만으로 불완전했던 소림무공이 세수경을 통해 온전해지리라는 것을 어찌 그가 모를까.
“법료와 같은 일을 막을 수 있겠지요.”
세수경은 어둠을 밝힐 등불과도 같았다.
천재라 불린 법료였지만 역근경에만 의지한 수련은 한계가 분명했다.
무학의 경지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하는 반면, 정작 정신은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
그 간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범계위를 찾으면 소승이 직접 만나고 싶구려.”
“네?”
의아해하는 법연을 향해 혜공이 말했다.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던데, 과연 놈도 그런지 확인해 봐야겠소.”
“……!”
뜻 모를 선문답에 의아해하는 승려들과 달리 법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랑캐라는 말이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소림사를 창건한 발타선사도, 선종의 초대 조사인 보리달마도 중원인 입장에서는 이국의 오랑캐다.
따라서 혜공의 말은 범계위를 그들처럼 비범한 자라 평하는 동시에 예의 없고 난폭한 행동을 동시에 꼬집고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마주치더라도 가급적 살수는 펼치지 않도록 부탁드리오.”
법연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려 혜공의 뜻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이미 초악량과 범계위는 향화객 무리에 섞여 소림을 떠나고 있었다.
“본사에 큰 문제가 발생해 이리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부디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축원드리옵니다.”
지객승의 인사에 향화객들도 저마다 불호로 화답했다.
그 사이에서 태연하게 합장한 초악량과 범계위가 서둘러 산문을 내려갔다.
* * *
밤이 깊자 법연이 혜공을 다시 찾았다.
“범계위는 떠난 듯합니다. 그 어디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 혜공의 표정에 법연이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사실 그는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범계위가 사라진 사실에 대해 내심 안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잠시.
“손님을 모셔 온 모양이로군?”
혜공의 물음에 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라 할까요?”
“그러시게.”
잠시 후.
법연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선 단악선이 법연과 한설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혜공 스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혜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법연과 한설화가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자 혜공이 단악선을 향해 정중하게 반장을 취했다.
“오늘 일에 대해 아직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못했소이다.”
단악선이 깜짝 놀라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의원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법료. 그 아이가 빈승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소?”
“네. 아까 방장 스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혜공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단악선을 바라봤다.
“덕분에 마지막 심마를 떨쳐 낼 수 있었다오.”
“아! 맞다!”
무언가를 떠올린 단악선이 혜공에게 말했다.
“아까 법료 스님이 의식을 회복한 후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눴어요. 그 내용에 대해 혜공 스님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당시 그분은 삼매(三昧)를 벗어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어요.”
그 말에 혜공이 크게 놀랐다.
“알고 보니 그분은 깨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걸 거부하고 계셨던 거예요.”
“어째서…….”
법연이 스스로를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감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이 꽤나 큰 충격이었던 듯 혜공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생각에는 일종의 도피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
단악선의 말에 혜공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늦은 나이에 법료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그의 재능 때문이었다.
한데 그 재능은 무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법료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법기(法器)이기도 했다.
“그런가……. 그랬던 것인가…….”
혜공이 탄식을 흘렸다.
모든 것을 놓으라는 불가의 가르침과 더 높은 무공을 추구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
열반에 들기를 갈구하는 불자로서의 자세와 소림의 최고 고수로서 부득이하게 마주해야 하는 살생의 업.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되는 상황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선재. 선재로다.”
눈앞의 인연에 감사하며 혜공이 단악선을 보았다.
은혜를 입었으니 의당 보답을 할 차례였다.
“그래, 어떤 연유로 빈승을 보자고 한 거요?”
단악선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스님의 수결(手決)이 필요해요.”
“수결?”
“네. 저는 무림명숙들의 동의를 얻어 하나의 연판장(連判狀)을 만들고 싶어요.”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혜공이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통해 감숙성 무위를 금역(禁域)으로 선포하려 해요.”
단악선이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무위 내에서만큼은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한쪽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초악량과 범계위가 사파라 불리니 당연히 선택은 정파였다.
“정파의 출입금지 구역을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신마곡을 떠나 강호를 유람하게 된 이유였다.
“명숙들이 동의한다 해서 모든 무림인의 행동을 강제할 순 없을 터인데?”
“그래도 소림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으음…….”
“부탁드려요. 그게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정사를 막론하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거예요.”
혜공은 문득 법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단악선이 신의의 아들일 뿐 아니라 마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법료의 치료 과정에서 마의의 의술이 사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혜공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단악선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만약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분의 의술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법료 스님은 치료할 수 없었어요.”
“…….”
“신의와 마의. 두 분의 의술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만약 한 분의 의술만을 알고 있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거예요.”
고민하는 혜공을 향해 단악선이 결정적인 말을 남겼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 길을 걷고 싶고요. 지금 이대로는 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거예요.”
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의 말대로 신의와 마의를 쫓아 수많은 정사 무림인들이 찾아갈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싸움은 끊이질 않을 것이고.
“아미타불.”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큰 공덕이 어디 있을까.
그 길에 정사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이 펄럭이든, 바람이 펄럭이든 뭐가 어떻단 말인가.
다만 펄럭이는 건 오직 마음뿐인 것을.
“이 늙은 중의 수결이 필요하다니 드려야지. 그래, 어디에 적어 드릴까?”
단악선의 부탁은 처음부터 거절하기 어려웠다.
법료가 깨어난 것도.
그리고 세수경을 얻은 것도.
어쨌거나 그 모든 일이 단악선이 소림을 방문한 뒤 일어난 일이었다.
그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소림과의 인연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악선이 내민 책.
그 첫 장 가장 위쪽에 법명을 적어 넣은 혜공이 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장인(掌印)을 찍었다.
“감사합니다.”
단악선이 환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신마곡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얻은 성과였다.
드디어 첫 단추를 제대로 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혜공이 불현듯 말했다.
“자네…….”
“네?”
“혹시 불법에 귀의할 의향은 없는가?”
* * *
“그리 욕심이 나십니까?”
법연이 빙그레 웃으며 혜공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저 멀리, 산문을 내려가는 단악선과 한설화를 지켜보는 혜공의 눈빛을 읽은 것이다.
혜공이 멋쩍게 웃었다.
“허허. 그러게 말이외다. 기껏 심마를 떨쳐 냈다 싶었더니 새로운 심마가 찾아오는구려.”
단악선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진 법연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신의에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데, 또다시 그의 아들에게 본사가 빚을 지는군요.”
“세상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던 마의의 의술이 결국 법료를 구한 셈이니까.”
나아가 소림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빈승이 저 아이와 약속 하나를 했소이다.”
혜공이 연판장 이야기를 꺼내자 법연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소림 역시 그 뜻을 존중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는데 달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남궁백을 위시한 무림맹이 반대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상관없었다.
소림은 더 이상 무림맹에 빚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 단악선은 아니었다.
신의와 단악선.
이 대에 걸친 그들 부자와의 인연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두텁고 무거웠다.
“무림에 새로운 바람이 불겠군.”
혜공의 눈빛이 깊어졌다.
“살생이 아닌, 상생이 되면 좋으련만…….”
염원을 담아 나직이 읊조리는 두 사람의 불호가 소림의 산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