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86)
신마의선-86화(86/500)
신마의선 (86)
가두달은 그대로 신형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는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혈수존자가 왜 여기에……!’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나마 초악량이 자신을 쫓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처럼 바로 내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일 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진 사나운 날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
전면의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갑자기 일어서나 싶더니…….
“우리 두달이 오늘도 바쁘네?”
가슴 철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핏기가 사라진 가두달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망산초자까지!’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범계위의 모습이 마치 유부의 염라가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가두달이 필생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가볍게 흔들렸다.
“오?”
범계위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던 가두달이 오 장 밖에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형환위(移形換位)도 펼칠 줄 알고? 제법이네?”
한동안 못 본 사이 경공이 더욱 발전한 가두달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다.
한설화였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며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게 흘러내리는 달빛 아래 도도한 자태로 서 있는 한설화의 미모는 그야말로 천하절색이었다.
달아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멈칫할 정도였다.
한데 그것이 실수였다.
‘아차!’
가두달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
바닥에 발이 붙은 것처럼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화들짝 놀라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 가두달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어느새 발목까지 올라온 새하얀 얼음 때문이었다.
문득 방금 전 눈앞의 여인이 소매를 휘저었던 모습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말도 안 돼!’
달아나기 위해 애를 쓰던 가두달의 얼굴이 이내 흙빛이 되어 버렸다.
웃으며 천천히 다가서는 두 괴물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가두달이 애써 웃음을 떠올렸다.
차라리 우느니 못한 그런 웃음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잠시 후.
잔뜩 움츠러든 가두달이 의혹 가득한 눈으로 한설화를 올려다봤다.
“저분이 빙옥선자시라고요?”
처음에는 대를 이어 전승되는 명호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오십 년 전에도, 그리고 백 년 전에도…….
그 명호를 쓴 사람은 오직 그녀 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초악량과 범계위, 둘 다 할 일 없이 흰소리나 늘어놓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두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세월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그라 할지라도 지금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이 순간만큼은 뼈저리게 절감하는 중이었다.
초악량만으로도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두려운데 거기에 걸어 다니는 시산혈해 범계위, 그리고 재담가들에게 귀동냥으로 얻어들었던 무림의 전설 한설화까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만큼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지금 상황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가두달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올려다봤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기다렸다는 듯 범계위가 나섰다.
“너 내 눈에 석회 가루 뿌렸잖아. 그 빚을 받으러 왔어.”
“예? 갑자기요?”
가두달이 억울한 눈빛으로 울먹였다.
“그건 십 년도 더 된 이야기 아닙니까? 게다가 그때 이미 값을 치렀고요.”
“어? 그랬어?”
“네!”
당시를 떠올린 가두달이 따지듯 외쳤다.
“청주의 미향루요! 당시 혈수존자의 정인이었던 기녀 있잖습니까! 그 여자에게 몰래 서신을 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때 제가 저분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
가두달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기 때문이다.
“그게 너였냐?”
스산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초악량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한광이 일렁이는 그 눈빛에 가두달은 하마터면 그대로 오줌을 지릴 뻔했다.
가두달이 범계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범계위는 딴청을 피우며 그의 애처로운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내 손에 죽어도 불만은 없겠지?”
살기가 담긴 초악량의 음성에 가두달이 쩔쩔맸다.
“하지만 저분께서 시키신 일인데…….”
“녀석과의 모든 은원은 진즉에 끝냈다.”
“예?”
“서로가 얽힌 게 많아서 이래저래 정리하기로 했지.”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두달이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도……?”
“그건 아니지.”
“어째서요?”
“너와의 은원은 이제 막 생긴 게 아니냐?”
“억울합니다!”
“죽은 놈 중에 억울하게 죽지 않은 놈이 몇이나 될까.”
가두달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일대종사급의 고수 셋이 에워싸고 있으니 달아나는 건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는데 하늘에서 동아줄 하나가 드리워졌다.
“기회를 줄까?”
초악량이 슬쩍 운을 떼자 가두달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네! 주십시오! 당연히 주셔야지요!”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건 고금 불변의 진리.
덥석 미끼를 문 가두달을 향해 초악량이 조건을 제시했다.
“저 아이와 비무를 해서 열 번을 이기면 보내 주마.”
가두달이 초악량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계곡 한편.
밤이슬을 긋기 위해 펼쳐 놓은 천막 아래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의 수련이 고되었기 때문일까.
주변이 꽤나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단악선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두달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의혹이 떠올랐다.
이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을 내걸 줄 알았는데, 쉬워도 너무 쉬웠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혹시나 싶어 되물어 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비무는 사흘에 한 번. 무공을 배운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은 아이다. 그러니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가두달이 초악량과 범계위, 한설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감히 대놓고 따져 묻기에는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결국 수락할 수밖에.
그때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도망가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해.”
“정말입니까?”
가두달의 반문에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사실 그래 주면 더 고맙고.”
“네?”
“내가 요즘 피 맛을 못 봤거든.”
“……!”
화들짝 놀란 가두달이 세 사람을 향해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앞으로 한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탈출은 무슨.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가두달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단악선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세 사람에게 사사를 했다 해도 고작해야 일 년.
더구나 손발이 아직 여물지도 않은 어린애였다.
반면 그가 도산검림을 헤쳐 온 세월은 녀석의 나이보다 몇 배나 많았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그저 최대한 빨리 조건을 완수하고 사람 같지도 않은 눈앞의 괴물들에게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아! 이분이 신투 어르신이군요.”
해맑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 오는 단악선의 모습에 가두달의 입꼬리가 절로 실룩였다.
그간 산 원한 때문일까.
다른 이들은 좀처럼 자신을 신투라 불러 주지 않았다.
“그래. 내가 바로 귀영(鬼影)이다.”
기분이 좋아진 가두달이 한껏 으스대려는 찰나.
한 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우리와의 거래 내용에 대해서 발설하는 즉시 넌 죽는다. 네가 자진해서 비무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초악량이었다.
뒤이어 범계위도 전음을 날려 왔다.
―말했지? 아니꼬우면 언제든 튀어도 돼.
움찔한 가두달이 애써 웃으며 단악선에게 다가갔다.
“내가 저분들에게 받은 은혜가 있어 어떻게든 그 은혜를 갚을 날을 학수고대해 왔는데, 이처럼 하늘이 도와 기회를 주셨군.”
가두달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한 달간 성심성의껏 자네의 무공 연마를 도와주도록 하지.”
“네. 잘 부탁드려요.”
“그럼 시작해 볼까?”
한시라도 빨리 열 번의 비무를 채우고 싶었기에 가두달은 마음이 바빠졌다.
단악선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비무를 준비했다.
단악선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마주 선 가두달이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단악선을 보는 세 사람의 따듯한 눈빛 때문이다.
천하의 혈수존자와 망산초자가 저토록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거기에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한설화의 냉막한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두달은 저들이 단악선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단악선을 인질로 삼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해 봐, 어디.
곧바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범계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눈빛만큼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초악량과 한설화 역시 마찬가지.
이미 무수한 악인들을 겪어 온 그들이다.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꿀꺽.
가두달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온화했던 그들이 맞나 싶을 만큼 예리한 눈빛이 사정없이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 그럼 시작하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지만 가두달은 등골이 서늘했다.
그 순간 단악선의 선공으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사전에 미리 약속을 주고받은 대로 가두달은 내공을 쓰지 않았다.
우선은 단악선의 역량을 가늠하기 위해 가두달은 최대한 공격을 흘리며 관찰에 전념했다.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는 내는군.’
초악량의 금나수를 모방한 듯한 단악선의 공격에 가두달이 내심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그저 어설프기만 한 흉내가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어엇?”
가두달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공방을 주고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단악선의 동작이 점차 정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수 손을 섞어 보니 얕잡아 볼 수준이 아니었다.
빈틈을 파고드는 초식이 꽤나 매섭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반응 속도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잡아채고, 꺾고, 누르고, 당기는 움직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밀고, 쳐 내고 흘리는 능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게 가능해?’
무공을 익힌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아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실력이었다.
저 괴물들이 사기를 친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가 지닌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
찌익.
가두달의 가슴팍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놀란 가두달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
가두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내공을 쓰지 않았다곤 하나 새파란 어린애를 상대로 이런 낭패를 당할 줄은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힐끗 고개를 돌리니 어처구니없어 하는 괴물들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수치심과 더불어 열불이 치밀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눈앞의 꼬맹이를 죽일 방법이 최소 백 가지는 있었다.
하나 그랬다간 그 전에 자신의 머리통이 먼저 날아갈 터.
‘그것 말곤 뭐든지 다 해도 된다고 했지?’
가두달이 히죽 웃었다.
그 순간 단악선의 시야에서 가두달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악선의 코앞에 나타났다.
주특기인 경공을 활용해 승부를 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비록 내공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평생을 경공에 매달려 온 그였던 만큼 움직임이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단악선은 이미 단단히 방비를 마친 상태.
어지럽게 뻗어 오는 수영을 마주한 가두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만큼 쉬지 않고 쏟아지는 금나수의 초식들은 도저히 가볍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림없지.’
단악선을 응시하는 가두달의 두 눈 위로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