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89)
신마의선-89화(89/500)
신마의선 (89)
“언젠가 사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있다. 검이 나아갈 방향을 잃거든 일단 검을 놓고 마음에 물어보라고. 그 마음이 검이 되어 한곳을 가리키면 비로소 검을 쥘 자격을 갖춘 것이라 하셨지.”
우두커니 그 말을 곱씹는 제자의 모습에 풍현자가 조용히 웃었다.
“인색한 녀석.”
“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명검을 향해 풍현자가 농을 건넸다.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여 줘야 이 사부도 가르치는 낙이 있을 것 아니냐?”
풍현자가 말을 이어 갔다.
“사실 그동안 나는 별 재미가 없었느니라. 딱히 뭐라 할 필요 없이 네가 가야 할 길을 알아서 걸었으니까.”
인자한 미소와 음성으로 풍현자가 명검을 다독였다.
“이제야 좀 사람 같구나.”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만큼 무공에 대한 명검의 재능은 비범했다.
모르긴 몰라도 재능만으로는 천하오절 중 한 명인 소림의 법료를 넘어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타고난 인내심과 근면함이 뛰어난 오성을 제대로 받쳐 주고 있었다.
“편하게 생각해라. 흔들릴 때가 되어 흔들리는 것일 뿐. 나아갈 때가 되면 다시 나아갈 것이다.”
“…….”
“이제는 잠시 검을 놓고 느껴 볼 때도 되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말로 언급하는 순간 도는 이미 도가 아니라는 의미. 심득(心得)을 얻기란 그만큼 요원한 일이었다.
“그것 역시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명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와의 선문답을 나눌수록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었다.
“잘 해낼 것이다.”
풍현자가 미소를 건넸다.
“내가 화산의 도첩에 이름을 올린 이후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코 너를 화산의 제자로 입문시킨 것이니라.”
“사부님…….”
“대해를 누비는 거경(巨鯨)은 창공의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네?”
뜬금없는 사부의 말에 의아해하길 잠시.
“빙옥선자 때문이더냐?”
이어진 풍현자의 한마디에 명검이 뜨끔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풍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검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마음을 잡지 못해 검이 흐트러진 것이 딱 그즈음부터였다.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했다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제자를 향해 풍현자가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은 인세의 상식을 벗어난 지 오래다. 논외의 대상인 셈이지.”
“그렇다는 건…….”
명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화산의 검은 그분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까?”
“글쎄…….”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 풍현자가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알아보려무나.”
“……!”
당황한 제자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풍현자가 웃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에게 가야 하는 길을 보여 주고, 훌륭한 제자는 스승에게 가지 못한 길을 보여 준다 했느니라.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가르쳐 줬으니 너도 내게 보여다오. 화산의 검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명검은 그저 난감한 눈빛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장문인……. 아니, 태사부님께서 화산을 버리려 하셨다는 것은……, 정녕 사실입니까?”
풍현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미 그 자리에서 들어 아는 이야기를 되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걸 묻는 것이냐?”
“제자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천하제일검인 태사부님께서 한낱 미색에 흔들려 화산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이…….”
지금껏 그의 등을 보며, 그를 목표로 검을 연마한 명검이었기에 그만큼 충격도 컸다.
풍현자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네 고민이 사부님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느냐?”
“그, 그건…….”
“사부님이라 해서 어찌 피 끓는 젊은 시절이 없었을까.”
“하오나…….”
“그분이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줄 아느냐? 지금의 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만큼 단단해지는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신 것이다.”
“…….”
“그리고 네 말은 틀렸다.”
“네? 하지만 그날 사부님과 선자의 대화대로라면…….”
명검의 말을 자르며 풍현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사부님께서 흔들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당황한 명검을 향해 풍현자가 말했다.
“겪어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하는 법. 너를 이해시키기 위해 백날을 설명한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보았고 너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흐음…….”
설명을 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풍현자가 고민하는 사이.
멀리서 삼 대 제자 한 명이 서둘러 달려왔다.
“본 파에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손님?”
명검의 반문에 명정이라는 도호를 쓰는 젊은 제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빙옥선자와 신의의 아들이 장문인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풍현자와 명검이 깜짝 놀랐다.
‘하필…….’
풍현자가 우려를 담은 눈빛으로 동요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명검의 얼굴을 살폈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은 불을 미리 놓아 큰불을 피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방편이 될 터. 답답함이 쌓이고 쌓여 종국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게 심화(心火)기 때문이다.
이윽고 풍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손님을 맞으마. 명검 너는 장문인께 이 소식을 전해라.”
그리곤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하늘이 널 돕는지도 모르겠구나.”
“예?”
의아해하는 명검을 뒤로한 채 풍현자가 산문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단악선과 한설화가 화산파의 삼 대 제자의 안내를 받으며 산문으로 이어진 산길을 올랐다.
화려함을 넘어 웅장하게 다가오는 네 개의 봉우리.
이를 눈에 담은 한설화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를 발견한 단악선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추억이 많은 곳인가 봐요?”
“추억? 추억이라…….”
묘하게 말끝을 흐린 한설화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억의 편린 정도라 해 두지.”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못내 궁금해 단악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 산문 쪽에서 날 듯이 달려온 한 사람이 한설화를 향해 공손히 예를 갖췄다.
“화산의 이 대 제자 풍현이 선자를 뵙습니다.”
한설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현자가 고개를 돌려 단악선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반갑네, 단 소협.”
단악선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절 아시나요?”
“명검에게 이야기를 들었지.”
풍현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명검, 그 아이가 내 제자라네.”
“아!”
뒤늦게 단악선이 풍현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단악선이라고 해요.”
문득 단악선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풍현자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죠?”
단악선의 물음에 풍현자가 나직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러나 말과는 달리 풍현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직접 마주한 단악선은 듣던 바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흐트러짐 없는 바른 자세와 맑은 눈빛.
그 너머로 잘 갈무리된 내력이 느껴졌다.
‘분명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들었는데?’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화검수를 이끌 만큼 명검은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 눈썰미 역시 여느 고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데 명검은 단악선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당시 호북으로 향했던 호위대의 책임자는 진현진인. 그에게는 사숙이자 장문인의 사제다.
화산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고수.
명검은 몰라도 진현진인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진현자 역시 단악선에 대해 명검과 같은 말을 했었다.
‘이게 대체……?’
당혹스러웠다.
두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아이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 고작 반년 남짓. 대체 무슨 수로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지닌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화산의 법도가 그사이 바뀐 것인가?”
차가운 음성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풍현자가 한설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건넨 풍현자가 한설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만큼 예상을 벗어난 일이니까요. 선자께서 본 파를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풍현자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일단 안으로 드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풍현자의 말에 앞서 두 사람을 안내했던 삼 대 제자가 예를 갖춘 뒤 물러갔다.
“가시죠.”
풍현자가 몇 걸음 앞장서 한설화와 단악선을 안내했다.
일각쯤 걸었을까.
고아한 느낌의 오래된 석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사라진 전진파(全真派)의 유적인 옥천원(玉泉院)이었다.
더없이 웅혼한 필체로 휘갈겨진 화산이라는 두 글자만 새겨진 현판.
한설화의 눈빛이 잠시 아련하게 물들었다.
활짝 열린 옥천원을 지나 안쪽으로 일각 정도를 더 걷자 화산파의 산문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수많은 화산 문하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도사건 아래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가슴까지 늘어트린 백염도 머리카락만큼이나 온통 새하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도사였다.
화산신검이라 불리는 당대 화산파의 장문인.
진명진인이 친히 한설화를 맞은 것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진명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물끄러미 진명진인을 응시하던 한설화가 희미하게 웃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군.”
그 말에 진명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화는 말없이 눈앞의 노도사를 응시했다.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용맹정진의 기세로 자신을 담금질하던 청년 도사. 그 헌앙했던 모습이 눈앞의 노도사와 겹쳐지는 순간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고요하게 주변을 에워싼 침묵.
한설화가 그 적막을 깨트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너무 많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말 대신 보여 주는 건 어떠냐?”
그 말에 진명진인이 슬쩍 웃었다.
한설화의 눈에 이채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유일하게 세월이 비껴간 것이 있었다.
바로 눈빛이었다.
한순간 한설화는 청년 시절의 그와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검을 다오.”
진명진인의 말에 명검이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올려바쳤다. 화산파는 무당파와 달리 장문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인 송문고검과 같은 별도의 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문심법인 자하진기(紫霞眞氣)와 매화검법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설화가 단악선을 멀찍이 물렸다.
―두 눈에 잘 새기거라. 네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
한설화의 전음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화와 진명진인.
두 사람이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 서로를 바라봤다.
하나 그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쩌엉!
귀청이 찢어질 듯한 충격음에 화산 문하들이 표정을 달리했다.
허공을 가득 메운 붉은 노을.
그것이 한계를 뛰어넘은 자하진기가 보이는 신위라는 것을 깨달은 화산문하들은 크나큰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의 장문인이 천하제일검이라 불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진정한 무위를 직접 목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명검도 있었다.
‘태사부님의 무위가 이 정도였을 줄이야!’
명검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고정된 채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순간.
사위를 가득 메운 채 일렁이던 자색 서기 사이로 그보다 더욱 선명한 검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정에 이른 매화검법만이 보일 수 있는 홍매화.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화산 문하 중 누군가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숫자의 홍매화가 눈앞에서 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열여섯 번째 초식.
떨어지는 매화가 비를 이룬다는 이름의 낙매성우(落梅成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