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0)
신마의선-90화(90/500)
신마의선 (90)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홍매화의 비.
눈앞을 가득 메운 매화 한 송이 한 송이가 유형화된 검기의 정화(精華)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그런데도 이를 마주한 한설화는 여전히 오연한 눈빛을 흘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낙매의 별 무리가 그대로 한설화를 집어삼키는 순간.
“저런!”
중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피할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는 성락밀밀(星落密密)의 수법.
금강불괴가 아닌 이상 그대로 갈가리 찢겨져 나갈 것이 자명했다.
째앵!
홍매화가 만들어 낸 붉은 운무.
그 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얼음이 깨져 나가는 듯한 음향과 더불어 쏟아지던 매화가 일제히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한설화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십 장 안의 공간.
허공을 빽빽하게 메운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얼음 칼을 발견한 중인들의 눈에 경악의 감정이 맺혔다.
절정에 이른 이기생형(理氣生形)의 신위 앞에 기가 질린 것이다.
반면 진명진인은 침착하게 검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의 한 점을 찍는 순간 흐드러진 홍매화의 그림자가 거대한 강처럼 한설화를 에워쌌다.
열일곱 번째 초식 매영조하(梅影造河).
화려하고 선명한 검화가 그대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어 한설화를 압박했다. 그에 비해 한설화는 아무렇게나 휙휙 소매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이렇다 할 현묘한 초식도, 무서운 위력이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 간단한 동작에 홍매화가 하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붉게 일렁이는 자하진기마저 한설화의 손짓에 너무도 맥없이 가닥가닥 잘려 나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떠 있던 얼음 칼이 한 차례 꿈틀하나 싶더니.
한설화의 의지를 따라 일제히 진명진인을 향해 쇄도했다.
쩌저저정!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폭음과 더불어 홍매화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얼음 칼이 지나간 자리는 그대로 대기가 얼어붙어 새하얀 잔영을 남겼다.
와해된 홍매화 틈을 비집고 파고드는 지독한 냉기.
쩌저적.
한설화의 발밑에서 시작된 새하얀 서리가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가 순식간에 진명진인 앞에 도달했다.
“……!”
화산 문하들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어느새 발목까지 타고 올라간 서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진명진인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새하얀 서리에 뒤덮인 진명진인의 모습에 그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진명진인이 느리게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꽁꽁 얼어붙은 대기 위로 한 줄기 붉은 서기가 꿈틀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곳에 모인 서기가 이내 꽃봉오리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한설화가 다시 한 번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소름 끼치는 한기가 진명진인을 에워쌌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황은 이미 초식이 아닌, 서로의 내공을 겨루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두 사람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가공할 경력에 중인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곳곳에서 칼날처럼 튀어 오르는 경기의 파편.
이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혹한의 냉기 속에서 진명진인은 결국 한 송이의 홍매화를 피워 냈다.
매화검법의 열여덟 번째 초식 매인설한(梅忍雪寒)이었다.
얼어붙은 대기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은 그 어떤 매화보다 붉고 선명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 것도 그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꽈앙!
검과 손이 부딪쳤음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경력의 폭풍이 만들어 낸 거대한 먼지구름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장내의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경천동지할 대결!
그 압도적인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실제로 중인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의 대결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잘게 부서져 흩날리는 얼음 알갱이.
마치 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쏟아지는 얼음꽃은 매화 꽃잎처럼 붉디붉었다.
노을빛으로 흐드러진 빙매화(氷梅花)의 향연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암향부동(暗香浮動)…….”
명검이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읊조렸다.
주변을 에워싼 채 은은하게 떠도는 그윽한 매화 향기.
그것이 매화검법의 마지막 초식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이 만들어 낸 신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중인들이 뒤늦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만큼 전율스러운 비무였다.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이런 대결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작 손을 맞대었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과연…….”
천천히 입을 연 한설화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천하오절이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검이었다.”
“오래 산 보람이 있군요.”
“……?”
“이렇게 선자께 인정받는 날이 오다니요.”
“내 앞에서 나이를 논하는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선자께 흰소리를 건네 보겠습니까?”
한설화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진명진인의 눈 위에 씁쓸한 감정이 담겼다.
“세월이 참 빠르군요.”
유독 이 순간만큼은 지나온 삶이 일촌광음(一寸光陰)처럼 느껴지는 그였다.
회한으로 복잡해진 진명진인의 눈빛을 마주한 한설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파랗던 애송이 검사가 일대종사로 거듭나기에 모자람이 없는 세월이지.”
한설화가 건넨 무뚝뚝한 위로에 진명진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단악선을 향해 손짓했다.
쪼르르 달려온 단악선이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반짝이는 눈으로 한설화와 진명진인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검법이 있다니! 정말 대단해요!”
방금 전에 목도한 비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감격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그저 세월을 쏟아 얻어 낸 집착일 뿐.”
그렇게 운을 뗀 진명진인이 복잡한 눈빛으로 쓰게 웃었다.
“정작 가장 얻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지.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얻은 검일 뿐이네.”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비사를 모르는 단악선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 실력만 발전한 줄 알았는데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말재주도 늘었구나.”
한설화의 핀잔에 진명진인이 웃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명검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보았느냐?”
풍현자의 물음에 명검이 탄식을 터트렸다.
“모르겠습니다.”
“……?”
“분명 보았다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모르겠습니다.”
풍현자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니 그걸로 되었다.”
이번 비무를 통해 명검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벽에 부딪친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태사부님께서 무엇에 반했는지 알았습니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명검이 중얼거렸다.
“화산의 검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군요.”
* * *
가두달의 안내에 따라 초악량과 범계위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도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짐작되는 객잔이었다.
현판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낡은 식탁과 의자에는 세월의 무게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보기엔 허름해 보여도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입니다. 무려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죠. 초대 숙수가 문을 연 이래 사 대에 걸쳐 맛을 지켜 온 유발면(油泼面)의 원조라 할 수 있죠.”
설명을 이어 가던 가두달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이 요리 때문에 폐관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돕니다. 불도장 때문에 스님들이 몰래 담을 넘는 것처럼요.”
“그래 봐야 면 요리 아냐? 그게 뭐 대단하다고.”
범계위의 핀잔에 가두달이 정색했다.
“아직 이곳의 유발면을 드셔 보시지 못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
“넓은 중원에서도 산서와 섬서는 전통적으로 면 요리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는 명확하죠. 산서 지역은 육수를, 섬서 지역은 면발을 더 강조합니다. 특히 허리띠처럼 넓고 굵은 유발면은 쫄깃한 식감이 일품입죠. 거기에 알싸한 고추의 풍미가 더해지면……. 캬! 말해 뭐 합니까. 일단 드셔 보십시오. 틀림없이 제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쉬지 않고 쏟아 내는 가두달의 설명에 초악량이 피식했다.
“누가 보면 여기 토박인 줄 알겠다. 화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놈이 어떻게 그리 이곳에 대해 잘 아는 거냐?”
“사전 조사의 힘이죠.”
“사전 조사?”
초악량의 반문에 가두달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훔치는 건 하수 중의 하수입니다. 저처럼 투도의 경지에 오른 진정한 양상군자(梁上君子)는 철저하게 대상을 조사하는 걸로 투로행(偸路行)을 시작하지요.”
초악량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화산을 털려 했다는 거냐?”
가두달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당장은 아니지만요.”
“훔칠 게 뭐 있다고?”
“왜 없습니까. 내상에 탁월한 효험을 지닌 자소단부터 시작해 장문인 이하 일 대 제자들이 들고 다니는 검 중에 명검이 아닌 것들이 없는뎁쇼.”
“…….”
“그리고 그게 어디 화산뿐이겠습니까. 구파일방 전부 다 마찬가지죠.”
가두달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죽기 전에 구파일방을 포함해 오대세가의 보물들을 모두 훔쳐 중원 한복판에 전시할 겁니다. 그게 제 투도의 궁극적인 바람이자 목표입니다.”
그 말에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방은 훔칠 게 없을 텐데? 거지들 쪽박이라도 훔치게?”
“제 지론이 뭔지 아십니까?”
가두달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겐 훔칠 게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그러나 정작 초악량과 범계위는 심드렁했다.
가두달을 무시한 채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가두달이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유발면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한 잔의 차로 목을 축이던 중 객잔에 들어서는 사내 한 명을 발견한 초악량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식사 때를 훌쩍 넘긴 걸 감안하면 무척이나 공교로운 일이었다.
이후로도 띄엄띄엄 손님들이 들어서는 걸 확인한 초악량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다섯.”
초악량의 말에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흐흐. 내가 이겼수. 내가 찾은 놈들은 여섯.”
초악량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해?”
그 말에 범계위가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지붕 위에 하나, 객잔 안에 둘, 객잔 동서쪽 벽에 각각 하나씩. 마지막으로 객잔 앞에 있던 만두 노점상.”
초악량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만두 노점상은 아니다.”
“맞다니까.”
“근거는?”
“생긴 게 꼭 무림맹 같았수.”
초악량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네가 무슨 점복자냐? 관상으로 신원 내력을 다 알게?”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면 되잖수.”
일어서려는 범계위를 초악량이 만류했다.
“아서라. 기껏 여기까지 끌어들였는데 마지막에 초를 치려고?”
“진짜라니까? 정 그리 못 믿겠으면 내기라도 하든가.”
“내기?”
“자신 없으면 포기하시고.”
“좋다. 하자.”
기꺼이 내기에 응한 초악량이 조건을 걸려고 하는 순간 가두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쟤들 무림맹 애들이죠?”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티 나지?”
초악량이 실소했다.
“저런 한심한 실력으로 무슨 미행을 하겠다고.”
그만큼 저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런데 무림맹이 왜 쫓는 겁니까?”
“우리 정체를 알아내려는 게지.”
초악량의 대답에 가두달이 깜짝 놀랐다.
“네? 그럼……?”
“우리의 신분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거다. 확신할 수 없어 이처럼 미행을 붙인 거지.”
가두달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똥 밟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