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3)
신마의선-93화(93/500)
신마의선 (93)
“얼마 전 범계위에 의해 소림사의 오래된 불상이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한다.”
“당시 공교롭게도 한설화와 단악선이라는 소년이 소림을 방문하던 중이었죠.”
약간의 시간을 두고 제갈연이 말을 이어 갔다.
“악공과 악일이라는 의원들 역시 그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고요.”
흔들리는 남궁백의 눈빛을 응시하며 제갈연이 쐐기를 박았다.
“이것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요?”
“…….”
침묵을 이어 가는 남궁백을 향해 제갈연은 그동안 미뤄 두었던 내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림에 이어 화산을 방문했습니다. 한데 악공과 악일이라는 의원은 여정을 함께하고도 정작 화산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빙옥선자와 단악선만이 화산의 장문인을 만났죠. 악공과 악일은 왜 화산을 오르지 않았을까요?”
제갈연이 자신이 내린 결론을 밝혔다.
“그 어떤 변장을 한들 진명진인은 속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악량은 진명진인과 함께 천하오절에 속한 자. 과거에도 몇 번 얽힌 적이 있지요. 조우하는 즉시 서로를 알아봤을 것입니다.”
제갈연이 말을 마치자 집무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서 그들이 초악량과 범계위다?”
남궁백의 말에 제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용단?”
반문한 남궁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얼 결정하라는 거지?”
“총력을 기울여 그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남궁백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만큼 제갈연의 제안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과격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삼사일행(三思一行). 그런 제갈세가의 보수적인 기풍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정황은 충분했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태.
악공과 악일이 초악량과 범계위라는 확실한 연결 고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마지막에 언급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이 늦는단 말인가?”
“저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결과적으로 본 맹의 존립 가치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
“무림맹이 십대악인 토벌을 완수하지 않은 것은 이를 이유로 맹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외부에서는 그리 인식하고 있습니다.”
“…….”
“이쯤에서 본 맹의 저력을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혈수존자와 망산초자만 제거한다면……. 이를 통해 명백한 힘의 차이를 각인시킨다면 구대문파 역시 더 이상 본 맹을 흔들어 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남궁백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되면 십대악인은 녹림의 총표파자 악호군만 남게 된다.
녹림이라는 거대 세력을 이끄는 그였기에 하루아침에 토벌을 마무리 지을 수 없을 터. 이를 통해 무림맹은 다시 한 번 무림의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초악량과 범계위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고 난 뒤 진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 남궁백의 분위기를 읽은 제갈연이 마지막 패를 꺼냈다.
“쫓기는 건 저들이 아닌 우리입니다.”
남궁백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본 맹이 무엇으로부터 쫓긴단 말인가?”
“시간입니다.”
여전히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남궁백을 향해 제갈연이 되물었다.
“저들이 소림과 화산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계속 말하라는 듯 남궁백이 고개를 까닥이자 제갈연이 설명을 이어 갔다.
“저들은 구대문파에서 영향력이 높은 명숙, 특히 성수신의와 인연이 깊은 자들에게 연판장을 받고 있습니다. 무위를 도망자들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동의를 얻는 중이지요.”
“도망자들의 땅?”
“정파의 인물이 들어설 수 없는 일종의 금역(禁域)을 선포할 생각입니다.”
“……!”
“그리되면 본 맹은 더 이상 십대악인을 토벌할 수 없게 됩니다. 놈들이 그곳으로 달아나면 그뿐이니까요. 게다가 이미 소림의 혜공과 화산의 장문인이 연판장에 수결을 채워 넣었습니다.”
남궁백이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꽤나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일단은 진위 파악이 먼저였다.
“연판장과 관련된 정보는 어떻게 얻었나?”
혜공이나 진명진인, 두 사람의 성격을 익히 아는 남궁백이다.
그들이 먼저 정보를 알려 오진 않았을 터.
“내부자를 통해 얻었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제갈연의 대답에 오히려 남궁백이 놀랐다.
“소림과 화산에 간자(間者)를 심었단 말인가?”
황당함을 넘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만약 그들이 이를 알고 추궁해 오면 무림맹은 그야말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연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구파일방을 포함해 무림에 영향력을 지닌 중소방파 할 것 없이 본 맹을 위한 귀가 깔려 있습니다.”
“천이단주. 지금 제정신인가?”
“모든 것은 본 맹을 위한 것. 그리고 그것이 천이단의 존재 이유입니다.”
“…….”
남궁백은 기가 막혔다.
대놓고 이리 당당히 말해 버리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이를 쥐고 흔들어 회유하는 그녀의 능력은 남궁백도 익히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머리로는 날고 긴다는 제갈세가 내에서도 지낭리라 불리며 경원시할까.
남궁백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한 채 제갈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혈수존자와 망산초자인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분은 맹주님이십니다.”
남궁백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말대로였다.
악공과 악일이 초악량과 범계위라면 누구보다 입장이 난처해지는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혈수존자와 망산초자를 눈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한 셈이다.
게다가 그들을 무림맹 본단에 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딸의 치료를 맡긴 셈이니 다른 세가들이 책임을 물어 들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곤혹스럽군.”
낮게 침음하며 복잡한 심사를 다스리던 남궁백을 향해 제갈연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나 충언은 본디 아프고 쓴 법. 이 모든 건 본 맹을 위한 것이라는 점 헤아려 주시길…….”
손가락으로 태사의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남궁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남궁백이 입을 열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도록.”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제갈연을 향해 남궁백이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
“끝까지 나를 위해서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군.”
뼈가 담긴 그 말에 제갈연의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신색을 회복했다.
“……맹주님께서 곧 맹이시니까요.”
남궁백이 피식 웃었다.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군.”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무표정한 얼굴 아래 철저히 감춘 채 남궁백이 말했다.
“이리도 나를 생각해 주는 수하가 있으니 말이야.”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제갈연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남궁백의 눈빛은 더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 * *
맹주의 집무실을 벗어난 제갈연이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이 담겨 있었다.
‘이걸로 맹주는 외통수야.’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 했다.
맹주가 악공과 악일을 죽여도, 죽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들 두 사람이 초악량과 범계위라면 무림맹도 상당한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터. 그로 인해 적지 않은 희생이 야기될 것이다.
이는 곧 맹주를 지지하는 세력의 이탈로 이어질 게 자명했다.
맹주의 퇴진 여론이 불거지면 그쪽에 적당히 힘만 실어 주면 되는 것이다.
실패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다.
맹주의 무능이 증명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맹주가 악공과 악일의 토벌을 거부한다면?
그거야말로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악공과 악일이 혈수존자와 망산초자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대의 대신 개인의 은원에 치우쳐 십대악인을 비호한 맹주를 따를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고작 혈육의 정 따위에 흔들리는 지도자는 무림맹을 이끌 자격이 없다.
‘불공평하잖아.’
많은 희생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그녀로선 모든 걸 다 누리려 하는 그 오만을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 * *
“다음은 종남파로 갈 게냐?”
초악량의 질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다음에 사천으로 내려가서 청성파로 갈 생각이에요.”
이대로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사나흘 거리에 종남파가 있다.
단악선이 웃으며 품속의 연판장을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소림과 화산의 연판장이 있으니, 다른 분들도 부담 없이 동참하실 것 같아요.”
단악선의 표정과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초악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가자꾸나. 어차피 수련도 병행해야 하니.”
“전 지금 여행을 다니는 것 같아서 너무 좋은걸요.”
행복해하는 단악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일행이었다.
관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일행과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여러 대의 수레에 짐을 나누어 실은 표행단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엇갈리는 순간.
초악량의 눈빛이 달라졌다.
표국을 상징하는 깃발 사이로 눈에 익은 표식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한참을 걷던 도중 유독 말이 없어진 초악량을 올려다보며 단악선이 물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초악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어디 가시는데요?”
“누군가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에게 잠시 들러야겠다.”
“아!”
단악선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초악량이 빙그레 웃었다.
“청성파에 도착하기 전에 합류하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악량이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하나의 점으로 화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단악선이 말없이 응시했다.
이윽고 초악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단악선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만나신다는 분이 누굴까요? 물어볼 걸 그랬나?”
단악선의 말에 범계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흐린 기억 사이에서 오래전에 초악량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맞아. 사천에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했어.”
“친구요?”
단악선이 되물었다.
그만큼 초악량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범계위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본 적은 없어. 고향 친구라고 했었는데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네.”
* * *
염화촌은 크고 작은 수로와 맞닿은 도강언(都江堰)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눈에 띄는 장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십 년 전.
장주인 염사인이 직접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이어 붙인 한 칸짜리 모옥을 세운 이후, 세월이 지나며 꾸준히 건물이 늘어 지금은 여느 장원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고아한 정취가 느껴지는 장원 한편.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 위에 홀로 앉아 있던 노인이 눈매를 찌푸렸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귀밑머리, 수염이 온통 새하얀 노인은 적잖은 세월을 살아온 게 분명하건만 꼬장꼬장한 눈빛에 꼿꼿한 자세에서 풍기는 힘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았다.
푹신한 보료를 깔고 앉은 그의 앞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이딴 수로 대마를 잡아 버렸다고?”
오래전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던 염사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둑판을 노려봤다.
득의양양하던 당시의 상대를 떠올리자 새삼 열불이 치밀었다.
“치사한 수로 이겨 놓고 감감무소식이라니……. 괘씸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