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4)
신마의선-94화(94/500)
신마의선 (94)
그렇게 염사인이 투덜대고 있을 때였다.
“장주님.”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음성에 염사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옆에는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언제 왔나?”
염사인의 물음에 장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참 됐죠.”
염사인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 말인즉슨, 자신이 혼자 중얼거리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 얼마나 바둑판에 정신을 빼앗겼는지 바로 옆에 사람이 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헛기침을 터트리는 염사인을 향해 장삼이 빙그레 웃었다.
“지시하신 일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약속은 확실히 받았겠지?”
“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모든 표국 마차에 동일한 표식의 깃발이 표행 내내 꽂혀 있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염사인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의 살림과 사업 전반의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총관인 장삼의 일 처리는 언제나 지금처럼 꼼꼼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낀 염사인이 장삼을 올려다보았다.
“더 할 말이 있나?”
물끄러미 바둑판을 응시하던 장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두시면 좌상변이 위태로워질 텐데요.”
“……!”
“만약 그분이라면 이렇게 대응하겠지요.”
장삼이 검은 돌 하나를 집어 한 곳에 놓았다.
딱.
돌을 놓는 소리와 함께 염사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차라리 과감하게 중원에서 치고받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요.”
“…….”
“삐지신 거 아니죠?”
“안 삐졌네.”
“어째 바둑이 영 늘지 않으십니다?”
“지금 삐졌네!”
팩 토라지는 염사인의 모습에 장삼이 슬쩍 웃었다.
“그러니 매번 지시는 겁니다.”
“뭐?”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장주님 아니십니까. 다른 이의 조언을 겸허히 수용해 끊임없는 발전을 도모…….”
“내가 한 말인데 기억 못 할까 봐.”
이것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듯 염사인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봐주는 걸세.”
장삼이 어련하겠냐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압니다.”
그 모습에 염사인이 발끈했다.
“자네 일 없나? 총관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
“뭐, 종일 바둑판만 끼고 있는 분도 계시는걸요.”
염사인이 노려보자 장삼이 ‘앗, 뜨거워라’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다음에는 꼭 이기실 겁니다.”
“그래야지.”
염사인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만난다면 말이야…….”
* * *
그날 저녁.
타는 듯한 노을을 등에 업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초악량이었다.
초악량이 감회에 젖은 눈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을을 둘러봤다.
“제법 사람 사는 곳이 되었구나.”
세월이 지날수록 황폐했던 예전의 과거를 지워 가는 마을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갑고, 기뻤다.
고작 오십여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
집집마다 늘어선 기다란 장대 사이로 나부끼는 천들이 색색으로 물들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잠시 흐뭇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보던 초악량이 이내 언덕 위의 장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아서일까.
장난스런 표정을 짓던 초악량이 장원의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저 멀리 정자에서 홀로 바둑에 심취해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인기척을 숨긴 채 조용히 다가선 초악량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라면 거기 두지 않을 텐데?”
“……!”
툭.
깜짝 놀란 염사인이 그만 들고 있던 바둑돌을 놓치고 말았다.
바둑판을 굴러간 검은 돌은 이내 바둑판 한 곳에 안착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오묘했다.
위태한 좌상변에 활로를 터 주는 유일한 한 수였기 때문이다.
초악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넬 보면 그 말이 떠올라.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 차라리 그냥 그렇게 던지게. 훨씬 낫군.”
염사인이 홱 고개를 돌려 초악량을 노려봤다.
그러기를 잠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장 총관!”
잠시 후.
서둘러 달려오던 장삼이 초악량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반가운 미소와 함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초악량 역시 마주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반면 염사인은 쩌렁한 목소리로 장삼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내 앞에 선 것이 귀신인가? 사람인가?”
“귀신이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닙니까?”
“그래? 사람이란 말이지?”
“장주님께서 보시는 대로요.”
“그럼 가서 귀싸대기 한 대 올려붙이게!”
장삼이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흘렸다.
“그랬다간 소인이 진짜 귀신이 될 텐데요.”
“괜찮네! 지은 죄가 있으니 감히 어쩌지 못할 거야.”
이런 공연한 심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지 장삼이 익숙한 태도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장원 문을 일찍 닫아걸겠습니다.”
다시 한 번 초악량에게 눈인사를 건넨 장삼이 그대로 물러갔다.
그제야 비로소 초악량은 오랜만에 자신의 친우와 마주할 수 있었다.
혼자 세월을 끌어안은 듯 늙어 버린 친우의 얼굴.
적지 않은 풍상을 겪은 그 모습이 괜스레 안타깝고 서글퍼진 것이다.
“뭐 예쁜 얼굴이라고 그리 쳐다봐?”
염사인의 핀잔에 초악량이 슬쩍 웃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만큼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주 얼굴이 활짝 폈구먼. 혼자만 세월을 비껴갔어.”
초악량을 응시하는 염사인의 눈이 게슴츠레 가늘어졌다.
“좋은 건 좀 나누자. 대체 비결이 뭐냐?”
“왜? 이제야 무공을 배워 볼 마음이 드나?”
염사인이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이 나이에? 됐다.”
피식 웃음을 흘린 초악량이 바둑판을 돌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보료 위에 앉았다.
그렇게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둑판을 정리하고 바둑돌을 나누어 쥐었다.
손안에서 바둑돌을 잘그락대기를 잠시.
딱.
초악량이 바둑판 정중앙, 아홉 개의 화점(花點)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천원(天元)에 검은 돌을 두었다.
그러자 염사인이 기다렸다는 듯 하얀 돌로 좌상변의 화점을 선점하는 걸로 응수했다.
초악량이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성격만큼이나 바둑 두는 방식도 변함이 없는 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끄덕인 초악량이 바둑돌을 놓으려는 순간.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염사인이 불쑥 말을 건넸다. 초악량이 실소하며 염사인을 바라봤다.
“그런 것치곤 깃발을 너무 많이 뿌렸던데?”
“…….”
“여기 오며 마주친 표행단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원견면기(願見面旗)가 꽂혀 있더군.”
말 그대로 만남을 원할 때 사용하는, 오래전부터 서로 약조한 특별한 형태의 깃발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표국에 뿌린 돈이 적지 않을 터.
“돈 좀 벌었나 봐?”
“많이 벌었지.”
당당히 대답한 염사인이 초악량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보다 어쩌다 그 독종들과 엮인 거냐?”
“독종? 누구?”
초악량이 고개를 갸웃하자 염사인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당가타(唐家陀)에 웅크리고 있는 그 미친놈들 말이다. 듣자니 놈들 대가리의 목을 따 버렸다며?”
사천당가의 가주를 말하는 것이다.
“아아, 천수암제?”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초악량은 태연했다.
“내가 건 싸움이 아냐. 저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든 거지.”
“그 일로 성도 일대가 발칵 뒤집혔었다.”
초악량이 코웃음을 쳤다.
청성파와 더불어 오랜 세월 사천의 패주로 군림해 온 당가였지만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친우를 바라보는 염사인의 눈에는 지워 낼 수 없는 근심이 가득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
“……?”
“이곳 사천이 자넬 밀어내는 게 아닌가 싶은.”
초악량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혈수존자라는 불길한 명호를 처음 얻게 된 곳도 여기, 사천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고향을 등지고 중원을 떠돌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 초악량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보잘것없는 악연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신경 쓸 것 없어. 다른 곳이라 해서 별반 다르진 않으니까.”
그 어디도 자신을 반겨 주는 곳은 없었다.
반겨 주는 유일한 장소는 이곳뿐.
‘아니, 이젠 하나 더 늘었나?’
문득 단악선을 떠올린 초악량이 빙그레 웃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돌아갈 곳이 생겼다.
잠시 뒤 장삼이 하인들을 대동해 다시 정자를 찾았다. 양손 가득 다과와 술이 들려 있었다.
“며칠 쉬다 가실 거지요?”
장삼의 물음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네.”
“아무쪼록 편히 머무시길. 아 참! 술은 혼자 드시고요.”
의아해하는 초악량의 눈빛에 장삼이 염사인 쪽을 향해 쓴웃음을 던졌다.
“장주님께서는 그동안 많이 드셨거든요. 저러다 큰일 나지 싶을 정도로요.”
“그래?”
“네. 하나뿐인 친우가 비명횡사했다며 직접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얼마나 난리였는지 아십니까? 초상집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만큼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흉흉했거든요.”
듣고 있던 염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친한 척 그만하고 가게. 누가 보면 내 친구가 아니라 자네 친구인 줄 알겠어!”
염사인의 핀잔에도 장삼은 굴하지 않았다.
“그나마 저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제가 기를 쓰고 말리지 않았다면 진짜 초상이 났을 겁니다. 울다 지쳐 죽거나, 술독에 빠져 죽거나…….”
“아, 가라고! 자넨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아.”
빙그레 웃은 장삼이 하인들을 데리고 물러섰다.
그렇게 단둘만 남게 되자 초악량이 피식하며 물었다.
“살아 있다고 믿었다며?”
움찔한 염사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지.”
“그런데 시신을 왜 찾아?”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염사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꼭 반대가 되잖아.”
그 말을 들은 초악량이 말없이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 * *
다음 날 아침.
장원 한편에 마련된 자신의 공방에 틀어박힌 염사인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직물에 새겨 넣던 문양이 평소보다 흡족하게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초악량 때문인지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물끄러미 눈앞의 천과 지천에 널려 있는 밀랍과 백랍, 그리고 온갖 색상의 염료가 담긴 항아리를 바라보길 잠시, 산처럼 쌓인 일거리를 내팽개친 채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막 공방을 나서는데.
“어디 가십니까?”
“쳇.”
어디선가 날아든 장삼의 음성에 염사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하필 가장 귀찮은 상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자네 혹시 나 감시하나?”
“제가요?”
장삼이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할 일 없이 장주님을 감시할 만큼 제가 여유로워 보이십니까?”
염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온갖 서류를 가득 끌어안은 장삼의 모습 때문이었다.
장삼이 공방 쪽에 시선을 두며 한숨을 흘렸다.
“기한이 열흘밖에 안 남았습니다.”
“아네.”
“그걸 아시는 분이…….”
한바탕 잔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염사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잉어 한 마리만 잡아 온 다음에 다시 일 시작할 걸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초가 녀석이 잉어 요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거.”
“그거라면 제가 이미 잡아다 놨습니다. 방금 가 숙수에게 넘겨주고 오는 길입니다.”
“뭐?”
당황한 염사인이 황급히 다른 이유를 댔다.
“그럼 산초 잎이라도 뜯어 와야겠군. 자고로 잉어찜에는…….”
“그것도 제가 미리 구해 뒀습니다.”
“…….”
장삼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하던 일 계속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