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5)
신마의선-95화(95/500)
신마의선 (95)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염사인이 꿍한 표정으로 장삼을 노려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얼굴이 밝아졌다.
장삼의 뒤쪽으로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오는 초악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잘 잤나?”
염사인의 물음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초악량이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 푹 자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래서 고향이 좋은 법이지.”
염사인이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왜 늙은 개도 죽을 땐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지 않나.”
초악량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사람이라 해서 다를까.
젊은 시절에는 몰랐으나 나이가 들수록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의미가 새삼 와닿는 초악량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침실에 걸려 있던 족자 말이야.”
“……?”
“화공의 낙관이 없던데, 자네가 그린 것인가?”
“달리 누가 있겠나? 심심해서 끄적인 거지.”
“늙으면 정체되기 마련인데, 그림 실력은 아직도 느는군.”
“그러는 자네의 무공 실력은 멈춰 있는가?”
“하긴.”
초악량은 피식 웃고는 안타까운 듯 염사인을 보았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고작 염색이나 하고 있다니…….”
“고작이라니. 지금 남의 밥줄을 무시하는 거냐?”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염사인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친구의 칭찬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팔아 볼 생각은 없나?”
초악량의 물음에 염사인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제대로 사사한 것도 아니고 연줄도 없는 놈이 무슨. 입에 풀칠하는 건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해.”
초악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제자를 두지 않는 건가? 자네 정도 실력이면 기술을 배우려는 자가 적지 않을 텐데.”
“내가 죽으면 이 짓도 끝내야지. 이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지체 높은 나으리들 상대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어.”
의아해하는 초악량을 위해 장삼이 염사인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장주님께서 직접 작업하신 염직물은 인근 관부에 진상합니다. 덕분에 마을이 혹독한 세금을 피할 수 있고요.”
“뇌물인 셈인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뭐.”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는 염사인을 초악량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괜한 말을 꺼내 친구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것이다.
“잠시 산책이나 할까?”
“그러지.”
초악량의 말에 염사인이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염사인의 모습에 장삼의 한숨이 깊어졌다.
“걱정 말게. 오늘 안에는 끝내도록 할 테니.”
이미 저만치 앞서간 염사인의 호언장담에 장삼이 쓰게 웃었다.
“네, 믿겠습니다.”
기한이 임박한 데다 관리들이 요구한 물량을 채우려면 아직 한참이나 모자란 상황. 그러나 오랜만에 웃고 있는 주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장원을 나선 두 사람은 목적지를 정한 바 없이 걸음이 닿는 대로 근처를 거닐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걷던 중 염사인이 갑자기 멈춰 섰다.
어딘가를 유심히 보는 모습에 초악량도 염사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마을을 끼고 휘도는 작은 지류.
민강에서 갈라져 나온 물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장대와 그 위에 걸려 나풀거리는 포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염색을 갓 마친 듯 화려한 무늬와 색상이 절로 시선을 빼앗았다.
뒤늦게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장정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찰염(擦染)인가?”
초악량의 물음에 염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처럼 해서는 수지 타산이 맞질 않으니까.”
주로 밀랍이나 백랍을 이용해 무늬를 입히는 납염(蠟染) 방식을 선호하는 염사인이다. 하나 재료도 귀한 데다 직접 그림을 그려야 하니 생산량이 한정적이었다.
반면 천을 실로 묶은 뒤 염색하여 무늬를 입히는 방식인 찰염은 무늬가 단조로운 대신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이때 강가에서 일을 하던 사내들 중 몇몇이 이쪽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봐, 구칠이!”
염사인이 목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잠시 후 강가의 사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서둘러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장주님.”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삼십 대 중반의 사내를 향해 염사인이 부드러운 웃음을 건넸다.
“자네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지? 올해로 십 년째던가?”
구칠이라 불린 사내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 달포 후면 꼬박 십 년을 채웁니다.”
“그럼 닷새 후에 나를 찾아오게. 그동안 보관해 온 돈을 내어 줄 테니.”
구칠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여기서…….”
염사인이 구칠의 말을 잘랐다.
“이 마을에 있어 봤자 미래가 없어. 이제 어느 정도 일이 익은 것 같으니 큰 도시로 가서 포목점이라도 열게. 그게 몸도 편하고, 돈도 더 많이 벌 테니까. 물건은 우리가 대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오나 제가 빠지면…….”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꾸려 나갈 테니 염려 말게. 이제껏 계속 그래 왔지 않은가?”
그래도 구칠이 주저하자 염사인이 타이르듯 말을 이어 갔다.
“자네에게 딸린 식솔들도 생각해야지. 이번에 안사람이 셋째 가졌다면서?”
그 말에 구칠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장주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염사인을 향해 구칠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다시 강가로 돌아가는 구칠의 뒷모습을 보며 초악량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마을을 재건하겠다더니 아예 없앨 생각이군.”
과거에 이백 호가 넘던 마을이 지금은 왜 오십여 가구에 불과한지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네가 몰라서 그래. 조금 먹고살 만하면 어떻게든 뜯어 가려는 놈들 천지야. 이런 곳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놈들?”
염사인의 말을 곱씹던 초악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관부만 있는 게 아니었나?”
“많지.”
염사인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물량을 선점해 계약한 상단이 보름마다 찾아오지.”
돈을 빌려준 대가로 헐값에 염직물을 사들인다는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염직쟁이들은 그들이 등쳐 먹기 딱 좋은 상대였다.
“최근에는 이곳을 보호해 주겠다며 무림 문파까지 접근하더군.”
“무림 문파?”
“자신을 청성의 속가 제자라고 하더군. 이번에 무관을 확장하는데, 여기서 가까운 곳에 지을 거라나? 청성파 속가 중에는 꽤 유명한 자인 모양이야.”
“…….”
갑자기 말이 없어진 초악량의 모습에 염사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참 지긋지긋하지 않나? 또 범람할까 두려운 저 강도,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외면한 관부도, 그리고 자네를 악인으로 만든 청성파도.”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초악량을 향해 염사인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야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지만 저들은 무슨 죄로 여길 지킨단 말인가. 보낼 수 있을 때 보내야지. 그러니 자네도 이만 욕심을 놓게.”
“…….”
“우리가 생각하던 고향은 사라진 거야. 그날 이후로 말이야.”
“하긴. 언젠가 저 강은 다시 범람할 테니.”
“그래서 내가 이 장원을 세웠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초악량이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났어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일곱 살 무렵.
여느 해와 다르게 민강이 갑자기 범람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에 논과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수습해야 할 관리들은 상부의 문책이 두려워 피해를 축소했고 그 어떤 지원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뒤늦게 관부는 군사들을 파견했다.
처음에는 저들이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그들은 창칼을 앞세워 마을을 봉쇄했다.
굶주린 이재민들이 유민이 되어 다른 성으로 유입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자 참다못한 마을 어른 몇몇이 군사들의 초소를 습격해 군량미를 털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그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그 후로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극심한 허기와 죽음의 공포.
그 안에서 모두가 조용히 죽어 갔다.
힘없는 노인과 아이들, 아녀자 순서로…….
더 이상 희망이 사라졌을 때, 한 노인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는 마을을 에워싼 군사들을 쫓아내고, 마을 사람들이 떠날 수 있게 길을 터 주었다.
울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자신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사람도 그 노인이었다.
그로 인해 유민이 발생하자 관부는 뒤늦게 부랴부랴 청성파의 무인들을 초빙했다.
“어째서 청성파가 관부의 초빙에 응했을까?”
지금도 그 점이 의문이었다.
그만큼 관과 무림은 오랜 세월 서로를 경원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청성파는 나름의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사마외도(邪魔外道) 척결.
사실 노인은 오래전 멸문한 모산파(茅山派)의 후예였다.
그가 강호의 일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은인자중하며 살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모산파가 이민족의 권력에 기대어 번영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외세의 침략자에게 협력한 한간(漢奸)의 후예라는 꼬리표는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청성파가 나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청성파 무인들조차 노인을 막지 못했다.
부상을 입은 청성파 무인들은 이를 갈며 돌아섰다.
그렇게 패퇴하고 돌아간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그날 이후 노인과 초악량은 사제지연을 맺었다.
그리고 오 년 후.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청성파의 최고 고수들이 사부를 수소문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가 너무 나빴다.
하필 가장 쇠약해진 상태일 때 놈들이 찾아온 것이다.
당시 사부는 제자의 벌모세수(伐毛洗髓)를 위해 원정(元精)까지 소모해 가며 추궁과혈(推宮過穴)을 마친 뒤였다.
무려 칠 주야에 걸친 강행군이었다.
그 결과 초악량은 임독양맥을 타통할 수 있었고, 고수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반면 사부는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초악량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사부는 처음으로 살계(殺戒)를 열었다.
초악량이 무거운 한숨을 터트렸다.
“결국 난 그분의 임종조차 지켜 드리지 못했지.”
사부님의 유해를 수습한 건 십 년이 지난 뒤, 그에게 물려받은 무공을 완성하고 나서였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청성파를 찾아갔다.
그날 이후 그의 손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뼛속 깊이 사무친 원한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사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손속에 추호의 자비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렇게 강호의 은원에 얽매였고, 그 뒤로는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싸우며, 죽이고 또 죽였다.
혈수존자라는 불길한 명호를 얻고, 십대악인에 이름을 올리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때 규모만으로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청성파 역시 당시의 혈사로 인해 크게 성세가 기울었다.
지금은 그저 구대문파의 말석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많은 고수가 유명을 달리했다.
초악량의 눈 위로 살기 어린 광망이 일렁였다.
“난 후회하지 않네.”
초악량의 말에 염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지독하게 살았을지언정,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