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7)
신마의선-97화(97/500)
신마의선 (97)
“그렇게 좋냐?”
“그럼요.”
범계위의 물음에 단악선이 다시 한 번 연판장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종남파의 태상호법이자 현 종남 장문인의 사부인 단금진인. 그의 친필 수결을 받아 냈기 때문이다.
이를 얻기까지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은 종남산 깊은 골짜기에 칩거해 있던 그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신의와의 인연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구나.
막상 단악선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연판장의 수결을 부탁하자 단금진인은 흔쾌히 수락했다.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는 단악선의 모습에 범계위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초 형이 없으니까 일이 잘 풀리는군.”
“네? 초 아저씨 계실 때도 문제는 없었는데요?”
“아니야. 그건 단 의원이 초 형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초 형이 있었다면 무슨 사고가 터져도 진즉에 터졌을 거야.”
범계위가 뒤따라오는 가두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냐?”
“네? 그, 그렇죠…….”
은근히 동의를 종용하는 범계위의 눈빛에 가두달이 마지못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한설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범계위가 저런 말을 하다니.
범계위나 초악량 모두 피장파장이지만, 그래도 우위를 꼽으라면 단연 범계위다.
“초 아저씨는 잘 계시겠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초악량의 빈자리가 허전한 단악선이었다.
“…….”
한설화가 지그시 범계위를 노려봤다.
괜한 소리를 꺼내 모처럼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다니!
그 시선이 못내 불편한 범계위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리곤 가두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비무 안 하냐?”
“예? 예. 해야죠.”
괜히 불똥이 튈까 싶은 가두달이 재빨리 단악선에게 다가갔다.
“이번 비무가 여덟 번째인가?”
“네.”
고개를 끄덕인 단악선이 종남산을 내려오는 내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연판장을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두달과 마주 섰다.
“이번에는 꼭 이길 거예요.”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게다.”
그런 단악선의 눈빛을 마주하고도 가두달은 아직까지 여유가 있었다.
비무를 치를 때마다 확실히 눈에 띄게 발전하곤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대단한 고수에게 사사한다 한들 세월을 통해 갈고닦은 노련함만큼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다른 건 몰라도 위기 상황에서의 임기응변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가두달이었다.
한평생 도산검림 속을 거닐며 투도에 매진해 온 자신의 인생도 누구 못지않게 험난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속여야 했고, 무수한 함정을 돌파해야 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을 몇 번이나 헤쳐 왔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위기 대응 능력은 이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애송이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악선의 선공으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신형이 어지럽게 뒤얽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가두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자신의 움직임을 예상한 듯 미리 이동 경로를 선점하는 단악선의 보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내 보법을 훔쳤다고?’
흉내 정도에 불과했던 움직임이 이제는 제법 자세가 잡혔다.
가두달은 일부러 몇 번 빈틈을 내주어 공격을 유도했다. 그런데 눈앞의 영악스러운 꼬맹이는 좀처럼 속아 주질 않았다.
눈썰미도 높아진 것이다.
게다가…….
“헛!”
헛바람을 들이켠 가두달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방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단악선의 발이 휩쓸고 지나가며 만든 흔적이었다.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한 가두달이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과감한 공격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이제는 거의 공방 일체를 이룬 금나수 역시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마찬가지.
“너 방금 내공 썼냐?”
“……!”
갑자기 날아든 범계위의 음성에 가두달이 움찔했다.
방금 전 위기에 처하자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사용한 것을 들키고 만 것이다.
그렇게 가두달이 동요한 순간.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단악선이 재차 달려들었다.
“으헛!”
순식간에 어지러운 수영(手影)이 사방을 에워싸자 가두달이 화들짝 놀랐다.
교묘하게 퇴로를 차단한 채 점차 거리를 좁혀 오는 손.
이리저리 몸을 젖히고 비틀어 가까스로 피하곤 있었으나 선수를 빼앗긴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한계에 부닥친 가두달이 울상을 지었다.
어느새 소맷자락이 단악선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찌익.
한 움큼 뜯겨 나간 소맷자락도 모자랐던지 단악선의 손이 방향을 틀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가두달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상황이 이쯤 되니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패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가두달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가두달이 벌렁 누워 버렸다.
한데 단악선의 공격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제길!’
가두달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게으른 나귀가 누워서 버둥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여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 부르는 수법이었다.
그 모습에 단악선은 당황했고, 범계위와 한설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차라리 칼을 맞고 죽을지언정 이처럼 추하게 바닥을 뒹굴진 않는다. 하물며 목숨이 걸린 생사결도 아닌데 나려타곤까지 쓸 줄은 몰랐다.
반면 단악선은 다른 의미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는 가두달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저분한 모습과는 달리 그 안에는 제법 현묘한 무리가 담겨 있었다.
단악선이 시야를 차단하는 흙먼지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물러나야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를 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굳이 그 안에서 싸워 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는 가두달이 이미 저만치 물러선 뒤였다.
그때부터 가두달은 싸우는 방법을 달리했다.
이젠 아예 멀찍이 떨어져 단악선의 접근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경공과 보법에 의지한 채 암기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악선은 능숙하게 암기를 모두 피해 버렸다.
준비한 함정으로 유도해도 마찬가지.
이제는 익숙해진 듯 아예 함정 쪽으로는 접근도 하지 않는 단악선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범계위가 가두달을 향해 못마땅한 눈빛을 던졌다.
“저놈 이제 쓸모가 없겠는데?”
그 말에 가두달이 멈칫했다.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는 단 의원에게 밀리네. 내공 쓰는 걸 허락해야겠어.”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저놈 내공이 볼 게 뭐 있다고.”
애초에 가두달을 단악선의 비무 상대로 삼은 이유는 하나였다.
치사하게 싸우는 방법을 통해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응하는 요령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래서야 더 이상 단악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만.”
결국 범계위가 비무를 중단시켰다.
암기와 함정을 이용한 세 번의 시도를 단악선이 모두 피하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범계위가 손짓으로 가두달을 불렀다.
가두달이 쭈뼛거리며 다가오자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이제 가라.”
“예?”
당황한 가두달의 반문에 범계위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만 네 갈 길 가라고. 초 형한테는 내가 말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잠깐만요!”
눈앞의 괴물들에게서 벗어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해 왔던 가두달이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상황이 갑자기 도래했음에도 달갑지가 않았다.
‘이대로는 못 가지.’
단악선을 힐끔거리는 가두달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탐욕이 일렁였다.
단악선을 공공문의 후인으로 삼기 위해서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가두달의 물음에 범계위가 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단 의원이 더 배울 게 없잖아.”
그 대답에 가두달이 정색했다.
“제겐 아직 수만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안 써?”
“써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의아해하는 범계위를 향해 가두달이 비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비무 중에 제가 어떤 방법을 써도 후환이 없을 거라고요.”
“뭔 꿍꿍이야?”
“그것만 보장해 주신다면 제가 가진 수를 모조리 꺼내 놓겠습니다.”
범계위가 의심스런 눈으로 가두달을 주시했다. 그러나 가두달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 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이윽고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범계위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두달은 다시 단악선과 마주 섰다.
“초악량 개새끼.”
“예?”
단악선이 당황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두달이 다짜고짜 초악량을 욕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평소 초악량을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하던 그였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너는 초초공자(草草公子)라는 말을 아느냐?”
“초초공자요?”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단악선을 향해 가두달이 설명을 이어 갔다.
“방탕한 부잣집 도련님을 화화공자(花花公子)라 하지. 하지만 초악량은 치마만 두르면 달려든다 해서 초초공자라 한다. 꽃이 아닌 잡초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만큼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이다.”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초 아저씨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건 네가 그자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두달이 비아냥대듯 말을 이어 갔다.
“오죽하면 인면초심(人面楚心)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인면초심이요?”
“사람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초악량 같은 심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인면수심(人面獸心)보다 훨씬 기분 나쁜 말이지.”
처음엔 당황했던 단악선도 이쯤 되니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만하세요.”
“강호에 이런 격언이 있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게 초악량. 우는 아이들도 그 말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친다더군.”
“그만하세요!”
단악선이 잔뜩 흥분해 가두달에게 달려들었다.
가두달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인 것도 동시였다.
무턱대고 거리를 좁혀 오는 단악선의 움직임에서는 방금 전의 정교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깨를 틀어 가볍게 단악선의 공격을 흘린 가두달이 순식간에 허점을 파고들었다.
“아악!”
단악선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단악선의 배후로 돌아간 가두달이 그대로 손을 뻗어 단악선의 목덜미를 움켜쥔 것이다.
마혈이 집힌 단악선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그대로 쓰러졌다. 그 상태에서도 단악선은 여전히 가두달을 노려봤다.
“초 아저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뭐가 그리 분한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그런 단악선을 내려다보던 가두달이 웃으며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 거짓말이다.”
“……!”
단악선이 허탈한 표정으로 가두달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왜……?”
“상대를 흔들기 위한 기만전술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마음을 흔드는 것 아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