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99)
신마의선-99화(99/500)
신마의선 (99)
인시 초입.
인적이 끊긴 무관은 고요했다.
늦은 밤 오롯이 등을 밝힌 전각의 불빛만이 사위를 에워싼 어둠을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덜컹.
전각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짙은 눈썹과 강인한 턱선에서 사내다움이 물씬 묻어나는 오십 대 초반의 중년 사내였다.
청성제일 무관의 관주, 반여해는 잠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밀려드는 밤안개를 응시했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밤공기가 유독 달게 느껴졌다.
소리 없이 담을 타고 넘는 옅은 안개.
그 안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더없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고즈넉한 밤을 만끽하던 반여해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어.’
연구할 가치가 있을 거라며 장문인이 던져 준 비급.
제목도 지워져 있어 출처조차 불분명한 검법이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마뜩잖았다.
칠십이파검(七十二破劍) 같은 본산의 절예라면 모를까, 이름조차 없는 검법을 던져 주며 생색이란 생색은 모두 내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비급을 파고든 지 한 달.
최근 눈에 띄는 성과가 있었다.
‘무서운 자.’
취임식을 목전에 둔 새로운 장문인을 떠올린 반여해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처음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반여해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청성 문하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 자 배분의 청성 문하는 과거 청성혈사(靑城血事) 당시 모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등장에 전 장문인이었던 운산진인은 그에게 산인(山人)이라는 도호를 허락함과 동시에 극진한 예를 다해 그를 태상호법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고가 일어났다.
전 장문인이었던 운산진인이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본산의 절예를 전수하던 비무 도중 벌어진 일이었다.
비무 상대였던 청 자 배의 산인이 급히 운기요상으로 운산진인을 치료했지만 한번 시작된 주화입마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운산진인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고 얼마 안 가 육신을 버리고 등선(登仙)해 버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말이 좋아 등선이지, 보름 내내 경련과 고열을 동반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 끝에 죽은 것이다.
어쨌거나 장문인의 부재라는 문제에 맞닥뜨린 청성파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장문인으로 추대되었다.
운산진인의 비무 상대이자 사숙뻘이었던 산인.
그만이 유일하게 청성파 내에서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여해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비무 당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산진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순간 공교롭게도 비무대 위의 산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 위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살기를 반여해는 분명히 목도했다.
반여해는 직감했다.
이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
평생 산속에서 수련만 해 온 본산의 어리숙한 도사들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온갖 인간 군상을 겪어 온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여해는 침묵했다.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그가 지닌 배경과 독심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장문인으로 내정된 그가 조용히 자신을 불렀다.
그리고 이름 모를 검법이 기재된 비급을 건넸다.
입막음용이라는 것을 그가 왜 모를까.
‘개처럼 일하라는 뜻도 있겠지.’
그는 야망이 대단한 자였다.
구파일방의 말석에 겨우 머물러 있는 지금의 청성을 다시금 바로 세워 과거의 성세를 되돌리겠다는 그의 선언에 모든 청성 문하가 열광했다.
무관과 표국.
청성의 이름을 등에 업은 속가 문파들의 확장이 무섭게 이뤄진 것도 그런 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암룡방을 엮어 염화촌을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암룡방이 백사회 소속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다.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문인을 믿었다.
아니, 장문인의 욕심을 믿었다.
그 정도 야망을 지닌 그가 앞으로도 쓸모가 많은 자신을 버릴 리 없기 때문이다.
암룡방의 뒤에 백사회가 있다면 자신에겐 청성파가 있다.
‘이제는 기다릴 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듯 반여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꽈릉.
“……?”
멀리서 들려온 우렛소리에 반여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가 올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꽈앙!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온 폭음에 반여해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폭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콰쾅!
연달아 세 번이나 이어진 충격이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휘청이는 전각에서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이를 그대로 뒤집어쓴 반여해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난데없는 상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벼락이 떨어졌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폭음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린 반여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전각의 기둥에 세로로 박힌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검갑째 깊숙이 박혀 있었다.
“……!”
반여해는 기가 막혔다.
검을 던져 기둥에 박아 넣는 것 정도는 그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둥을 파고든 것은 예리한 검이 아닌 뭉툭한 검갑이었다.
‘대체 누가?’
당금 강호에 이 정도 신위를 보일 수 있는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만약 저게 기둥이 아닌 자신에게 쏘아졌다면?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렇게 반여해가 혼란에 휩싸여 있던 도중 난데없는 굉음에 놀란 무관의 제자들이 서둘러 달려 나왔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이게 대체……?”
반여해가 손을 들어 제자들의 소요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검을 던진 상대는 더 이상 공격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반여해가 조심스럽게 검갑이 박혀 있는 기둥을 향해 다가섰다.
그 순간 반여해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기둥에 박혀 있는 검은 암룡방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했던 제자들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검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반여해는 제자들에게 변고가 닥쳤음을 인지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반여해가 소리쳤다.
“모든 제자는 검을 들어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제자들의 생사를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반여해는 제자들을 구하러 갈 수 없었다.
꽈앙!
무관의 대문이 경첩째로 터져 나가며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독염사(毒鹽邪)?”
침입자들의 가장 선두에 선 인물을 알아본 반여해가 당혹성을 흘렸다.
이에 암룡방의 방주 곽언이 살기 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게 바로 이 어르신이다.”
곽언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입을 열었다.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이니 일단 예를 갖춰야겠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곽언의 뒤로 도열한 수하들이 무언가를 들어 앞으로 던졌다.
털썩.
반여해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무슨 고깃덩이를 던져 놓나 싶었는데 그것이 뒤늦게 난도질당해 죽은 제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선물이랍시고 던져 준 것이 제자들의 시체라니.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반여해를 향해 곽언이 이죽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젓갈을 담가 바치는 게 우리 방식인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반여해의 눈이 돌아갔다.
“이 처죽일 놈들이!”
한 자루 검을 들고 짓쳐 드는 반여해를 향해 곽언도 마주 달려갔다. 이를 신호로 암룡방의 무인들이 일제히 청성의 속가 제자들을 덮쳐 갔다.
이에 청성의 속가 문하들 역시 몸을 던져 맞서 싸웠다.
그들은 순식간에 어지럽게 뒤얽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온갖 욕설과 고함 소리.
안개 속에서 번뜩이는 검광과 날붙이끼리 부딪치는 차가운 마찰음 사이로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콰앙!
그 중심에서 육중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서로 세 걸음씩 물러난 반여해와 곽언.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확연히 대비되었다.
여유 있는 웃음을 머금고 있는 곽언과 달리 반여해는 침중한 표정으로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왜? 소금 장수 따위는 언제든지 목을 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
곽언의 조롱에 반여해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백사회 말단 방파의 방주 따위가 이 정도로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면 곽언은 어떻게 반여해를 죽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백사회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백사회의 특성상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애초에 청성파 본산의 도사들이라면 모를까, 이런 변방의 무관 관주 따위야 처음부터 그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때 주위를 둘러본 반여해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검진(劍陳)을 펼쳐라!”
쩌렁한 일갈에 속가 제자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세 사람씩 한 개의 조를 이뤄 삼재검진(三才劍陣)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비록 삼류로 취급되는 삼재검진이었지만, 검진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극명하다.
특히나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검진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각각 천지인(天地人)의 방위를 도맡아 맞물리듯 치고 빠지는 속가 제자들의 반격에 암룡방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열세에 몰렸다.
비명 속에 쓰러지는 수하들의 모습에 곽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떻게 하든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야 했다.
우두머리의 목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판단한 곽언이 반여해를 향해 곧장 신형을 날렸다.
“죽엇!”
순식간에 상대와 거리를 좁힌 곽언이 갈고리 같은 손을 휘둘렀다.
석판에 한 치 두께의 흔적을 새길 수 있는 그만의 절예, 암룡조(暗龍爪)였다.
반여해가 황급히 검을 들어 눈앞에 짓쳐들어오는 시커먼 손을 쳐 내려 했다.
그러나…….
카앙!
너무나 맥없이 중간이 부러져 나간 검을 마주한 반여해의 눈이 암담함에 물들었다.
그러다 한순간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헉!”
달려들던 곽언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반여해의 목을 꺾기 위해 손을 뻗는데 섬뜩한 예기가 난데없이 목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곽언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한 움큼 넘게 살이 떨어져 나간 곳에서 더운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악에 받쳐 욕을 뱉는 곽언의 모습에 반여해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깨달은 비급 안의 절초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곽언의 눈에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검기에 경동맥을 내어 줬는지 출혈량이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터. 주변 상황도 암담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비등했던 싸움은 이미 청성 속가 무관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크큭.”
반여해가 광기 가득한 살소(殺笑)를 흘렸다.
상황이 이리된 마당에 무얼 망설일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자리의 모두를 길동무 삼을 생각이었다.
“크하하. 다 같이 죽자!”
“조심해라!”
뒤늦게 독염사라는 곽언의 별호를 떠올린 반여해가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곽언은 사방에 독 소금을 뿌려 대고 있었다.
눈치를 채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물러선 반여해와 달리 제자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치익.
독 소금을 뒤집어쓴 제자들의 옷이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그리고 이내 장내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악!”
“으아악!”
청성제일관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채 숨이 끊어지지 않아 신음을 흘리던 암룡방의 무인들도 얼굴과 손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절명해 버렸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반여해의 눈이 암담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