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으허어어엉!!! 세화야!!!”
프러포즈가 있고 한 달 뒤, 카를시아의 추천으로 신년제와 함께 거행된 결혼식은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제국 공작가의 결혼식이었다. 그것도 단 두 곳뿐인 공작가의 결혼식. 그 결혼식엔 많은 이들이 초청받았다. 그중엔 이름 모를 백성들도 많았으며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타국의 사람들도 많았다.
실로 황제의 결혼식을 보는 듯한 웅장함에 다들 놀라워하기도 하였지만, 신부가 제국을 구한 성녀이고 신랑이 제국의 재상이라는 점에선 그럴 수 있겠거니 하였다.
“할아버지~ 그만 우셔요.”
신부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세실리아를 떠올린 아나이스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건 옆에 있던 호른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도…. 그만 뚝…!”
“흐으윽…. 그래도 이 아빠는…. 네가 마냥 어린아이인 줄…. 흐어어엉!”
사위와 장인어른의 모습이 똑같은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호른은 아나이스와 닮았다. 세실리아가 그래서 호른을 좋아했나 보다. 그리고 아라한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들의 과잉보호만 생각하면 머리가 띵하지만 어쩌겠는가. 보고 자란 남정네들이 다 저런 남정네인 것을.
“크으, 역시 세화예요!”
“맞아요! 아가씨, 너무 예뻐요!”
신부 들러리를 자처한 아리아와 나의 치장을 도운 마야가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이름은 정하지 못했다. 정확하겐 아르켈미스와 엘리자벳에게 가서 이름을 하사해 달랍시고 기도를 했더니 영숙이보단 낫다고 그냥 세화라 하라고 하였다.
‘약았어. 영숙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고 그것보다 낫다고 하냐!’
그래서 개명된 이름으로 세화 아르엘시아 빈센트였던 나는 오늘로써 세화 아라한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 구리다. 구려! 간지 나는 이름 없었냐고! 사실 해 보고 싶은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끝끝내 세화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소설 바깥의 나의 세계에서 엄마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여전히 나의 경호와 엄호는 에인의 몫이었다. 내가 세화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그는 수호 기사단이자 나의 명예 기사로서 함께 아라한의 저택에 지내게 되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하려는 에인을 제지하는 그, 아라한이었다.
“이제 제 부인이라서요.”
단칼에 에인의 에스코트를 막고선 자신의 손을 내미는 아라한이었다. 원래라면 식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아라한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내가 치장을 하는 빈센트 공작저에 까지 와서는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아라한의 모습에 에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참. 지난번에 제가 에스코트 막은 거 복수하시는 거 아니죠?”
“…….”
에인의 투정에 침묵하는 아라한이었고 그 모습에 에인은 ‘좀생이’라는 말을 내뱉고선 먼저 걸어 나갔다.
“그럼, 전 마차를 엄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손을 흔들며 가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던 나는 아라한의 손을 잡고선 마차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아나이스와 호른의 울음소리가 저택 전체를 울리게 하였고 그 모습에 진절머리 난 듯한 제롬이 급기야 아나이스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마야 역시도 호른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말 시끌벅적하네요.”
“아나이스 님과 호른 님이 워낙에 그렇잖습니까.”
“그것보다 폐하께서 결혼을 안 하신다고 발언하셨다는데 정말이에요?”
“아, 네. 저번 귀족 회의 때 그러시더라고요.”
‘아니, 황제가 비혼 선언을 해도 되는 건가?!’
며칠 전, 아라한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제국을 이끌어가는 황제, 카를시아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 대신들이 다들 나서서 말리고 설득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신전으로 가서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그럼 후세는 어떻게…?”
나는 조심스레 아라한에게 물었다. 그렇게나 엘리자벳이 지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 모르크 제국이었다. 그런 모르크 제국의 황제가 후사도 없이 죽는다면 어떻게 이 제국이 유지되겠는가. 제2의 오즈번이나 아스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자신이 왕이 되겠다며 나서는 이들. 그런 이들 때문에 또 이런 비극을 만들지 않겠다고 역사를 편찬하고 있으신 분께서 비혼 선언이라니!
“뭐…. 폐하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 드리자면, ‘제국에 황족은 한 명 더 있으니 괜찮다.’입니다만.”
“…? 황족이 더 있으니 괜찮다…?”
내가 알기로는 카를시아에겐 형제가 없다. 고로 제국에 있는 황족은 카를시아 혼자였다. 그런데 그런 카를시아가 제국에 황족이 한 명 더 있으니 괜찮다니.
“형제 없으시지 않아요?”
“맞습니다. 그래서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저도 잘….”
“흠….”
“그것보다 저희 결혼식인데 이런 자리에서까지 업무를 보고 싶지 않아요.”
“…아, 미안해요. 하하….”
마차에 함께 올라탄 나는 아라한과 함께 식장으로 향했다. 예식장은 아주 정말, 화려하고도 컸다. 넓고 넓으신 비혼주의 황제 폐하께서 황궁의 앞뜰을 빌려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황궁의 입구를 열어 백성들도 구경할 수 있게끔 한 것은 카를시아의 배려였다. 제국의 성녀인 나의 결혼식인 만큼 성대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황궁으로 가는 사이사이에도 사람들은 나와 아라한이 탄 마차를 향해 박수와 꽃을 던지며 축하해 주었다.
“성녀님!! 축하드려요!!”
“공녀님!! 공작님!! 정말 축하드려요!!”
열심히 손을 흔드는 무리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이곳에 처음 떨어진 순간부터 모든 순간을.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소설 속에 빙의되어 죽기 위해 악녀가 되려고 했던 내가 결국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끝까지 살아남았다. 애초에 잘못된 소설이었지만. 이후에 아르켈미스가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던 기록인 ‘성녀, 오즈번’은 어떻게 되었는지 영원히 모르게 되었지만 여기서 써 내려가는 건 새로운 소설이었다. 나의 새로운 소설.
“자, 가실까요.”
어느새 도착한 마차에 먼저 내려 손을 내미는 아라한이었다. 엘리자벳이 좋아했던 붉은색의 카펫의 끝에 화려한 단상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례 없이 진행되는 결혼식인 만큼 저런 단상은 필요가 없을 텐데도 기어이 준비한 단상에 ‘피식’ 웃음을 짓는 나였다. 분명 저 단상의 주인공은 그일 것이다.
『나의 아가. 축하한다.』
날 이곳으로 이끈 장본인이자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나의 편에서 날 지켜보았던 사내. 아르켈미스의 자리임을 직감한 나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카펫 양 끝으로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아리아도 아나이스도 마야도 제롬도. 내가 이곳에서 만났던 모두가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레드 카펫의 끝자락에 익숙한 형상의 모습에 난 또 미소를 지었다. 아르켈미스가 있다는 건 그녀, 역시도 이곳에 있다는 뜻이니까.
“자자, 얼른 식을 거행하도록 합시다!!”
아타샨 백작의 외침에 거행된 결혼식은 즐거웠다. 나와 아라한이 행진하자 울고 있는 아나이스의 표정도 퍽 웃겼지만 그걸 보며 또 말리는 제롬이 힘들어 보였고 아리아 역시 마야와 함께 즐겁게 이야기하며 나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었다.
“자, 신랑 신부 입맞춤하세요!!”
아타샨 백작의 사회로 진행된 결혼식의 마무리는 입맞춤이었다.
“세화, 정말 저 꿈만 같아요.”
“저도요.”
꿈이길 바랐던 적이 많았다.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꿨던 꿈. 이제 그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아라한과 세화가 입을 맞추자 하늘에서는 유례없이 많은 꽃잎이 날렸다. 신년제와 함께 열린 만큼 12월의 궂은 날씨임에도 꽃잎은 눈처럼 흩날렸다. 마치 이 모든 순간을 축하해 주기 위한 아르켈미스의 선물인 듯 내린 꽃잎에 이 결혼식이 정말 이 소설의 끝이라는 걸 알려 주는 듯했다.
“사랑합니다. 세화.”
“나도 사랑해요. 라트.”
두 사람의 입맞춤을 끝으로 백성들과 사람들의 환호가 결혼식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물론 아나이스와 호른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를시아는 제 선택에 대한 후회가 없음을 단언했다.
『바보네. 그렇다고 진짜 결혼을 안 할 줄이야.』
카를시아의 옆에 있던 하얀색의 형상은 이내 빛을 발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 빛의 온기에 고개를 돌려 빛을 바라보는 그였다. 결혼식을 하는 신부와 닮은 적은발에 은안을 가진 여인이 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음을 카를시아는 느끼고 있었다.
“그대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실없는 소리처럼 뱉은 카를시아의 말에 엘리자벳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세상 속에 녹아 있었고 카를시아의 옆에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사내가 비혼 주의를 하게 만든 자신을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두 분, 행복하세요!!”
“정말, 공작님! 저희 공녀님 울리시는 날에는…!”
“에인 비슈느가 직접 검을 뽑아…!”
수호 기사단들의 시끌벅적한 인사에도 놀라지 않던 아라한은 레드 카펫 끝에서 한 번 더 키스했다.
“에구머니나! 또 키스라니!”
“참았다잖아요.”
“이러다가 우리 빈센트 공작님, 증조할아버지 되시는 거 아니에요?”
“앗,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무서운데요.”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세화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운명의 상대가 보이면 종이 울린다고. 지금 세화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이란 종이 모두 나타나 제 머리를 치고 있었다. 그만큼 행복하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녀 역시도 참았다는 뜻이겠지.
“라트.”
“네.”
“라트.”
“네.”
자신을 계속해서 부르는 세화의 부름에 귀찮지도 않다는 듯 계속 대답하는 아라한이었다. 그런 아라한의 모습에 세화는 다시금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랑해요. 내가 이곳에 남아 있고 싶다는 욕심나게 한 사람. 당신뿐이야.”
“…후, 저도 이렇게 절 욕심나게 한 사람은 세화가 처음이에요.”
“그래서 당신이 좋아.”
세화는 마지막 말과 함께 아라한을 덮치듯 다시금 키스했다. 그리고 그런 세화의 행동력에 아나이스와 호른은 ‘허억…!! 그런 건 엄마와 할머니를 닮지 말라고!’를 속으로 외쳤다.
아라한과의 키스를 끝낸 세화는 마지막으로 아르켈미스와 함께 있을 엘리자벳을 향해 인사했다.
‘언니, 고마워. 내게 주어진 이 세계를 다시금 열심히 살아 볼게. 언니가 그렇게 살아갔던 것처럼.’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행복한 결말의 순간은 더욱더 짧은 순간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뀐 소설의 주인공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짧은 순간처럼 다가온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주인공이기에 거창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며 내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란 것을 세화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 순간은. 다음 소설은. 당신의 이야기가. 당신의 삶이 주인공이 되기를.’
그리고 이제 그녀가 써 내려갈 새로운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에필로그
‘세화 아라한’ 그녀의 이름은 제국의 성녀 이름이자 현실을 살고 있을 누군가의 이름과 같다. 그녀는 신성국의 제1대 황제로서 모르크 제국의 28대 황제의 모후이기도 하였다. 모르크 제국의 라트 아라한 공작과 결혼한 후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모르크 제국의 28대 여황으로서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황제가 되었다.
그녀의 업적을 두고 많은 백성이 말하기를 그녀가 제국을 수호하는 성녀로서 악신, 아스칼과 그와 하나 된 루시퍼로부터 제국을 지킨 것이라 말하였지만 그녀의 행보는 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세화 아라한, 그녀의 이름을 이곳에 기록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세화’라 밝히며 사실은 이곳에 아닌 다른 곳에서 왔음을 밝혔다. 백성들은 오히려 그녀가 다른 곳에서 왔기에 제국의 성녀임이 확실하다며 그녀를 옹호하고 나섰고 제국의 황제,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가 공식적으로 그녀를 제국의 성녀로 인정하며 신성 지역을 신성국으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제국을 지키는 수호의 신, 아르켈미스와 더불어 또 다른 여신의 이름이 나타났으니 그 이름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였다. 많은 학자들이 세화 아라한의 외가인 ‘빈센트’가를 상징하는 새로운 여신이라 말을 많이 하였지만 실제로 알려진 바로는 세화 아라한의 쌍둥이 언니로서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의 유일무이한 황후였다고 한다.
『모든 기록이. 역사가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기를.』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는 자신이 황제로 군림할 당시 많은 역사책을 편찬하였고 그 역사책엔 하나같이 위와 같은 말이 수록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날의 기억을. 기록을 잊지 않고 맘에 새기기를 바라며 기록한 그 역사책은 신성국에서도 경서 다음으로 꼭 배워야 할 신학서로 지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폐하께서는 늘 이 자리에서 이모님을 그리워한 것인가요.”
루안 아라한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한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의 집무실 창문에서 그가 늘 줄곧 봐 왔다던 정원을 보았다. 붉은색 꽃이 가득한 정원에 유일하게 피어 있는 은방울꽃과 물망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안은 잘 알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분명 자신의 이모이자 제국의 새로운 여신,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를 말하는 것이고 물망초는 그녀를 잊지 않겠다는 카를시아의 마음일 터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어머니와 이모님을 그리워하고요.”
“제국의 검이자 그들로 인해 바뀐 세계니까요.”
“아르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정말 이 세계를 사랑했어요. 한 여인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한 여인은 자신의 세계를 버릴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백성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푸르른 머릿결을 가진 사내가 깊은 ‘호선’을 그리며 적은발의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틀린 말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사랑했다. 모든 것을 맞바꾸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세상에 모든 것들이 하나씩 맞춰지게 된 것은 자신 덕분이 아니었다. 언젠가 누군가 하늘을 향해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란 결국 인간들의 선택을 위해 존재하는 자.’
선택은 인간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의 후회를 신에게 돌리는 일부 사람들로 인해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아르텐은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습니까.”
“저라면….”
루안은 아르텐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말하는 ‘선택’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도 이 세계를 사랑해요. 어머니와 이모님이 지키려고 했던 세상이니까요.”
“그건 어머니와 이모님이 지키려고 했던 세상이기 때문인가요.”
“아뇨, 어머니와 이모님이 이곳에 있고 저의 전부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죠.”
루안의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텐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아르텐의 움직임을 느낀 루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줄곧 이야기했던 사람. 아르텐. 연하늘빛을 가지고 푸르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 그 사내를 어머니는 ‘빌어먹을 신’이라 하였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기를 당신을 ‘빌어먹을 신’이라 하셨습니다.”
“세화답군요. 어쩌면 엘리자벳다운 것인지도.”
“…이번엔 저를 위해 오신 겁니까?”
“저는 그저 폐하의 마음과 같이 이 세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온 것이니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모습인가요.”
아르텐은 자신과 닮았고 세화 닮았으며 엘리자벳과 닮은 루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벳이 자신에게 귀속되었을 때, 기뻤으나 기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죽은 자신의 아이가 너무나도 가여워서. 그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이곳에 데리고 오길 원했고 저 자신은 그렇게 하였다. 세화, 역시도 눈을 감을 때 제게 빌었다.
‘그 아이들 또한, 당신의 아이이니 반드시 지켜 주세요.’
자신이 사랑한 아이들이 아이를 잉태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킨 세계였다. 그들이 만든 세계였다. 그곳에서 자신은 그저 이방인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던 아르텐은 다시 한번,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의 세계에 발을 내밀었다. 세화의 부탁이기 이전에 자신도 궁금했다. 다른 이 세계에서 온 세화가 만든 이 세계가.
“재밌잖아요.”
“아…?”
“어떤 모습이든 사람들은 절 그저 대사제로만 알고 있고 신성국의 재상으로 알고 있을 터.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역사 속에서, 모든 기록 속에서 저는 아르텐일 것이고 대사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의 모후는 제가 사랑한 아이로서 세화라는 이름과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을 간직한 채 살아가겠죠.”
“…….”
루안은 아르텐의 말에 ‘피식’ 미소 지었다. 어머니가 말한 그대로 빌어먹을 신이었다. 각자의 세계에 각자가 주인공이 되어 그 이름을 새기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고 싶은 말일 터.
“어머니가 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인공인 세계 속에선 그 누구도 탓하지 말라고.”
“그런 것치곤 세화는 제 탓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신이시잖아요?”
루안의 농담에 아르텐은 순간 세화와 엘리자벳이 겹쳐 보였다. 저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밀기를 잘한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아,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구나. 그래, 그래서 내가.’
아이를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노라. 그 사실을 기억해 낸 아르텐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모습을 루안에게 내보였다. 자신과 닮은 적은발과 은안을 가진 사내. 아르켈미스의 모습을 실제로 처음 영접한 루안은 눈을 끔뻑였다. 어머니와 닮았고 이모님과 닮았으며 자신과 닮은 그 모습에 그가 정말 어머니와 이모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야. 너의 세계를 만들어 가려무나. 내가 언제나 너의 곁에서 검이 되어 지키고 있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열린 테라스의 문엔 강한 바람이 불었다. 정원에 피어 있던 붉은색의 꽃잎들이 순식간에 집무실의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에 눈을 질끈 감고 바람이 멈추길 기다리고 있던 루안은 어느새 바람이 멎자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텅 빈 집무실의 모습에 눈을 끔뻑이며 아르텐을 찾았다.
이미 모습을 감춘 아르텐에 루안은 ‘정말이지,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뱉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 냈다.
‘너의 세계를 만들려무나.’
나의 세계. 그것은 모르크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루안이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써 내려갈 이야기의 시작. 그것이 나의 세계이고 나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언젠가 이 소설의 끝이 날 때 자신도 어머니와 같이 말할 것임이 분명했다.
‘진정으로 이 세계를 사랑했노라.’라고.
* * *
늘 그랬듯이 그녀는 폰을 들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 올 곳도 많았고 연락 올 곳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폰을 놓지 않은 이유는 요즘 새로 읽고 있는 소설 때문이기도 했다.
‘성녀, 엘리자벳’이라 불리는 소설. 악녀에 빙의된 여인이 악녀의 과거를 찾으며 자신의 삶을 찾는 흔하디흔한 로판 소설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 소설을 빠짐없이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이야기의 끝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은. 다음 소설은. 당신의 이야기가. 당신의 삶이 주인공이 되기를.’
모두가 꿈꾸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말이 되든 되지 않든 매 순간, 꿈꾸는 순간들이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이야기라며 자신의 삶이 주인공이라 생각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대리님!! 이것 좀 확인해 주세요…!”
“송 사원, 그렇게 보고서 올리지 말랬지…!”
끊임없이 들리는 전쟁터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던 그녀에게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읽고 또 꿈을 펼치는 것에 보탬이 됐는지 모른다. 힘겹게 퇴근길에 오르고 다시금 그녀는 컴퓨터를 켜며 자신의 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꿈꾸던 세계. 내가 주인공인 세계를 펼치기 위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이야기.
“이세화가 이세화에게-.”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이 세계의 유일한 꽃, 세화에게 전하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