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n American phy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6
76
‘어디서부터 잘못될 걸까.’
차머스의 트레이드마크는 자신만만하다 못해 거만한 표정. 하지만 근래 들어 주름살이 부쩍 늘었다.
“대표님, 은행에서 대출을 거부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거기 은행장 당장 연결시켜.”
“이미 며칠 전부터 연락을 안 받습니다. 담당자도 기계적인 대답만 반복하고요.”
“이기적인 놈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거래량이 얼만데!”
쾅!
차머스가 이를 갈았다.
스포츠 경기 프로모션 회사인 [크롬웰 프로모션]은 지난 몇 년 동안 경영 부진에 시달렸다.
그동안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차머스의 전성기와 맞물려 미국 3대 프로모션 회사로 성장했지만, 아무리 복싱의 패왕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그는 선수 생활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4개 대회 통합 챔피언으로써 복싱계가 원하는 탑컨덴더와의 방어전은 어떻게든 피했다.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만을 골랐고, 그마저도 헤비급다운 폭발적인 화력이 아닌 지루한 포인트 게임을 진행해 팬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흥행파워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지만, 무패의 완벽한 전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기록은 영원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경기의 프로모션 규모를 줄일 수는 없었다.
‘최고에겐 특별한 격이 있는 법.’
항상 최고의 무대, 아낌없는 마케팅, 그리고 화려한 애프터파티.
지난 20년 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유지비는 점점 커져만 갔고, 결국 경기를 치를 때마다 적자를 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사업 규모를 줄이던가… 대표님이 더 많은 경기를 뛰셔야 합니다. 더 흥행성 높은 상대들로.”
“밥버러지 새끼들! 그딴 소리는 아무나 할 수 있어. 너희한테 고액 연봉을 주는 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내 몸값을 올릴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
슬슬 은퇴를 생각하던 차머스는, 자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사업부를 확장했다.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을 데려왔고, 실제로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크롬웰 프로모션]은 전환기를 맞이하는 듯 싶었다.
‘하필이면 그때 바이러스가 터질 줄이야…’
그런데 전 세계가 셧다운되면서 2년간의 복싱 경기가 모두 취소되어 회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충분히 재개할 수 있기에 사비를 털어서까지 버텨왔지만… 가장 최근에 진행한 [다리우스 vs 로한]의 이벤트로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았다.
‘그냥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적지 않은 투자금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로한만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됐다. 복싱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 새끼에게.
으드득 –
로한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전국 미식축구 랭킹 1위의 로한 킴. 그는 누구인가?] [로한 킴이 선택하는 대학은?? 대학 미식축구와 농구계가 그를 주목한다.] [로한 킴… 공부도 잘해?]이후 승승장구하며 이전보다 더 이름값을 올리고 있는 상황.
‘지난 20년 동안 피땀 흘려 쌓은 업적의 끝이 이것인가…’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차머스의 커다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부르셔서,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날씨가 청량해 무척 기분이 좋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기분이 금방 더러워졌다.
살기가 형형한 눈빛의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조카님 아니신가. 존나게 연락이 안 돼서 뒤진 줄 알았지.”
“넌 동네 개가 짖으면 일일이 대답해줘? 같은 개새끼라 그런가?”
“…진짜 좀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차머스가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진짜 흉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한의 단련을 받은 몸. 위압감이 상당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지난 1년 동안 나도 눈부신 성장을 거쳤다.
우리는 서로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차머스가 피식 웃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개소리가 정말 사실이었어. 아니면 니가 이딴 식으로 대들 수도 없었겠지.”
“원래 나이를 먹을수록, 보잘 것 없는 어른이 많아지는 거 아니겠어.”
“병원 생활이 잘 맞았나보지?”
“……”
애초에 차머스라는 인간 자체가 비호감이기도 하지만, 내가 유독 혐오하는 이유는 찝찝해서였다.
‘분명 로한과 이 자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는데…’
아버지와 내가 따로 알아봐도 뭔가 나오진 않았다.
직접 물어봐서 알려줄 놈도 아니고, 내가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게 나았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졌어? 뭐라도 생각이 났나?”
“그냥 너도 좀 필요한 것 같아서, 병원 생활.”
“어린놈의 새끼가 입만 살아가지고.”
차머스가 내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내 팔이 더 길었다.
“컥, 제대로 미쳤구나?”
오히려 내가 먼저 그의 멱살을 움켜쥐자, 차머스가 황급히 손을 쳐내며 멀어졌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웃기지 않아? 지가 나한테 하려는 걸 내가 먼저 했다고 길길이 날뛰고. 너무 뻔뻔해서 역겹기까지 한다니까?”
“오늘 기어코 끝장을 보자는 거지?”
확실히 나를 노려보는 차머스의 위압감이 상당했다.
나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는 훨씬 더 나간다. 특히 투기 종목에서 20년 동안 구른 세월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오오… 이게 바로 정상급 복싱 선수의 투기인가?’
그동안 차머스의 집요한 복싱 제안을 모조리 무시했지만, 흥미롭게도 정작 마주 서니까 피가 끓었다.
나와 다리우스가 아마추어라면, 차머스는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은 헤비급 언디스퓨티드 챔피언.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게 느껴져.’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차머스는 진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차머스라서 반골의 ‘로한’이 눈을 떴다.
무모할수록 도전하고 싶고, 정복하고 싶다. 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처절한 약육강식의 무대.
규칙이 있는 스포츠라고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서 복싱은 합법적인 폭력의 무대가 되지 않을까?
“……”
우리가 서로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곧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할아버지가 걸어 나오셨다.
“거기까지. 평화롭게 이야기를 하자고 불렀더니, 벌써부터 뭐하는 짓이냐.”
“……”
“일단 들어오거라.”
할아버지의 중재에도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이때 느꼈다.
‘누구 한 명 죽지 않고서는 이 악연이 끝나지 않겠구나.’
시간이 좀 흘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의외로 짧고 굵은 대화를 나눈 후, 한 가지 합의를 보았다.
*
그동안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언복싱]을 찾았다.
‘스포츠만의 매력에 중독된 거지…’
과거의 한풀이라고 보면 되려나.
몸을 단련하는 게 너무 좋았다. 고통을 느끼고, 지치고. 곧 쓰러질 것마냥 땀을 다 빼고 차가운 물에 씻으면 근심 걱정까지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몸이 재생되는 감각은 가히 중독적.
미식축구나 농구 훈련도 그것만의 장점이 있지만, 복싱은 투기 종목만의 거칠고 투박한 매력이 있다.
“야! 로한!!”
내가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조지 코치가 내려왔다.
“야!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사람 좋은 인상의 조지 코치는 오늘따라 전전긍긍하는 얼굴이다.
“복싱 경기요?”
“그럼 뭐겠어. 아니, 너희 집안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리우스야 뭐 또래끼리 치고 받고 싸울 수 있다지만, 차머스라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집안 아니에요. 김해 김씨 집안의 로한 킴인데.”
“기매 킴? 그게 뭐야??”
“같은 집안사람이 아니란 뜻이죠.”
“……”
우리 집안의 복잡한 사정을 대충 아는 조지 코치는 잠깐 말이 없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차머스가 아무리 기량이 떨어졌다고 해도, 헤비급 챔피언이야. 전성기 때는 상대가 없었다고. 지금도 너 하나 가지고 노는 건 한 주먹으로 할 수 있을 걸?”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진짜 그럴 것 같더라고요. 경기 영상도 좀 찾아보고, 며칠 전에 직접 만났는데… 일부러 노쇠한 챔피언이란 식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는 듯했어요. 컨디션 관리가 상당했거든요.”
직접 주먹을 교환하지는 않았지만, 멱살을 잡아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굉장히 탄탄한 몸.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바위처럼 무거운 근육 덩어리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벼리기까지 해서 몇 번 스치는 것만으로도 심상 세계를 자극했다.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야.’
무패의 챔피언은 은퇴를 앞두고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주 화려한 퇴장을 말이다.
“그래, 잘 알고 있다니 안심이다. 요즘 니가 한창 잘 나가고 있어서 기고만장해진 줄 알았더니…”
“차머스와의 경기, 받아들였어요. 곧 기사 나갈 겁니다.”
“…아니 왜!”
“진짜 퇴물이라면 흥미가 떨어졌겠지만, 나름 기량을 유지하고 있을 때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조지 코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 잘 듣고 있었던 것 맞지? 그동안 프로 몇 명과 스파링해봤다고 자신감을 가지면 안 돼. 차머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전무후무한 거물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전설적인 복서라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승낙했어요.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너나 키스나… 진짜 고집불통이라니까.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해서…”
조지 코치는 머리를 쥐어짜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될 텐데.’
나는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아, 그리고 복싱 라이센스 따는 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형식적인 의료검사만 통과하면 금방 나올 거야. 왜? 드디어 상남자의 스포츠, 복싱에 전문적으로 뛰어들 각오가 생긴 거냐?”
안 그래도 미식축구나 농구는 엔터테인먼트 스포츠라고 까고, 복싱만이 일대일의 피 튀기는 진정한 남자의 스포츠라고 올려 치던 조지 코치님.
이렇게 환한 미소를 보이신 건 처음이 아닐까?
“…뭐야, 그 불길한 웃음?”
내가 별 말 없이 순순히 듣고 있자 위화감을 느끼신 모양이다.
그러다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떠셨다.
“서, 설마?? 차머스와 이벤트 매치가 아닌… 정식 복싱 경기를 치르기로 한 거냐?? 어???”
조지 코치의 목소리가 커지자 순간 체육관의 이목이 전부 우리 쪽으로 쏠렸다.
– 저게 무슨 소리야. 차머스 복귀한다고?? 그것도 로한을 상대로?
– 아니 그동안 바이러스다, 부상이다 2년 넘게 존나 질질 끌었다가 이제 와서?
– 미친… 돈 귀신이 그럼 그렇지. 다리우스랑 붙었을 때 매출 엄청났잖아. 흥행성 있는 경기이면서 손쉬운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 군침이 돌겠지.
– 추하다 차머스. 그냥 은퇴나 할 것이지…
– 근데 정식 복싱 경기라고? 그럼… 타이틀 매치라는 거 아니야?? 와, 이거 진짜 큰 거 오는데??
조지 코치는 바로 나를 관장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다 내렸다.
“니가 이런 상황에 농담을 할 리는 없고… 이게 얼마나 큰 경기인 줄은 알지? 2년 반만의 복귀전인 것도 모자라 무려 4개 대회 통합 챔피언 벨트 타이틀전이야.”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렇다고 들었어? 단순 스파링이나 이벤트 매치와는 무게감이 달라. 현 복싱계에 가장 큰 화제성을 지닌 경기가 될 거라니까?”
“네.”
“타이틀 전 자체가 주는 무게감. 수십만 명 앞에서 망신만 당하면 다행이지, 어쩌면 죽을 수도 있어. 헤비급에선 한 방만 잘못 맞아도 그대로 끝이야. 그래도 경기를 치르겠다고?”
나는 차머스를 떠올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재밌는 거죠. 저는 목숨을, 그놈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평생의 노력과 명예를 거는 싸움이 될 겁니다.”
“…하아.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죽지. 불에 뛰어드는 게 부나방의 숙명이라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도 없고…”
조지 코치는 나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선수 있죠. 네, 네, 그 애송이요. 체육관에 나와서 함 봐주세요.”
‘아버지? 설마… 바로 그 아버지??’
나는 내심 기대를 했지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조지 코치가 처음으로 부탁을 드린 건 아닌지, 수화기 너머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실랑이도 이어진 한 마디로 일단락되었다.
“차머스랑 경기가 잡혔답니다.”
*
다음날.
등이 굽은 70대의 노인이 체육관을 찾았다. 그가 스윽 안을 둘러보자, 시선에 닿은 선수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해졌다.
– 흐억! 저분이 갑자기 왜??? 미리 좀 알려주지!!! 도망치게!!!
– 은퇴하신 거 아니었어? 뒷선으로 물러난 줄 알고 여기 다시 다니기 시작한 건데…
– 도망쳐! 곧 지옥이 펼쳐진다…
소속 프로선수들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지 벌벌 떨며 구석으로 숨었다.
조지 코치도 평소와 달리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오로지 로한만이 웃음기를 띄었다.
– 쟤는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 몰라. 사람의 약점을 얼마나 후벼 파는지…
– 아… 또 하나의 순수한 영혼이 악마에게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겠네.
– 로한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난 일주일에 백 불 건다.
– 일주일은 무슨. 길어야 삼 일 본다.
“오셨어요? 일단 관장실로 가시면 간단하게 체육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현황에 대해 브리핑해드릴게요.”
“……”
“아, 아버… 아니 관장님?”
조지 코치가 잽싸게 달려와 보좌를 했지만, 노인은 거들떠도 안보고 정면으로 로한에게 걸어갔다.
“……?”
미국 피지컬 천재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