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피에는 피를 (1)
……우리는 가장 깊은 곳에서 그대가 손을 뻗길 기다린다.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손을 뻗으면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가 말했다.
시아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손을 뻗었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리고…?
“아…….”
악몽을 꾸던 시아나가 눈을 떴다.
포근함. 그다음에 느낀 감정은 미움과 배신감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력해졌다. 미안함의 감정이 어깨를 짓눌렀다.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시아나의 귓가에 목소리가 스쳤다.
검고 맑은 눈동자. 그 눈만 보아도 그녀는 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카를?”
그의 이름을 부른 시아나는 상반신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장소였다. 시아나, 그녀의 방.
“카, 카, 카를. 나.”
몸을 덮은 담요를 걷은 그녀는 다급한 손짓으로 팔을 붙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그때, 자신이 무언가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그러면 설마….”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시아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카를의 목 부근에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천. 머릿속을 엄습한 불길함에 시아나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내의 따위가 아닌, 붕대였다.
“다친 사람 없다며… 너, 이건 뭐야…?”
“…….”
“내가, 밀어서 그렇게 된 거야?”
“선배님이 돌아오시기 직전에 근처에 웬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걸 토벌하는 과정에서 조금 다쳤습니다.”
실상은 사도에게 몸을 빼앗긴 그녀에게 떠밀렸을 때, 깨진 유리창에 긁히면서 생긴 상처였다.
그러나 가벼운 상처에 불과했다. 치유 마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어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
구태여 사실대로 말해 트라우마를 만들 필요가 없다 판단한 카를은 조금 강하게 말했고, 눈을 몇 차례 깜빡인 시아나는 이내 수긍했다.
“…다행이다.”
설마 누군가 죽기라도 했다면… 아니면 심하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상상만 했는데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선배님, 괜찮아지셨으면 기억하시는 걸 여쭤도 괜찮을까요.”
“아, 응. 어떤 거?”
“일라이트 탑주가 구체적으로 선배님께 어떤 짓을 했는지 말입니다.”
카를 자신이 추측하고 있었고, 셰르핀과 키시온에게 확답까지 들은 사실.
다만 그들은 일라이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시아나를 제압하고 탐욕의 신에게 접촉시켰는지에 대한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어떤 힘을 쓰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룬어로 새겨진 퍼즐이었어.”
“퍼즐이요?”
“…완전히 달라져 버린 자신을 응시한다. 우리는 가장 깊은 곳에서 그대가 손을 뻗길 기다린다. 그리고 그대가 손을 뻗는 곳에 구원이 있나니. 이 세 문장이 적힌 퍼즐.”
“일라이트가, 시험을 가장해 그 퍼즐을 풀게 만든 건가요?”
“응. 문장을 쪼개 놓고, 그걸 해석해서 원래대로 맞추는 거였어.”
“룬어가 퍼즐에 새겨져 있었다면….”
룬어는 그 자체로 마법이라 할 수 있는 언어.
손짓만 가지고도 자칫하면 아카데미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시아나가 룬어로 지어진 문장을 외웠다면….
‘애초부터 이용할 생각이었나.’
탑주 심사의 시험을 가장해 룬어를 외우게 해서 시아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욕의 신을 부르게 만들고.
일라이트 자신은 마력을 아껴, 그녀를 순식간에 제압한 것이리라.
“그다음은요? 혹시 또 기억나시는 게 있을까요?”
“음….”
시아나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어딘지 모를 깊은 바다에 빠진 것 같은 기억.
그리고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했던 일.
그것들을 떠올린 시아나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물들었다.
“…카, 카를. 나 미안한데 물 한 잔만 부탁할 수 있을까…? 말을, 하다 보니까 목이 말라서.”
“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침대맡의 의자에 앉아 있었던 카를이 방을 나가자마자 시아나는 두 손으로 손부채를 부쳤다.
……눈치챘을까.
못 챘겠지?
눈치를 챘다면, 저렇게 평소 같을 순 없을 테니까.
“흐아….”
갑작스레 확 올라온 열기를 가라앉힌 시아나는 몸을 기대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게, 진짜로 내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사도가 몸을 차지하면서 제멋대로 벌인 행동이었을까.
구분하기 어려웠다.
“선배님.”
이윽고 투명한 컵을 들고, 카를이 돌아왔다.
시아나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그가 건네는 컵을 받았다.
그의 손목에 못 보던 팔지가 있었다.
무슨 팔찌일까. 살짝 궁금해졌지만, 시아나는 물을 삼키고서 그가 했던 질문에 답했다.
“알려 주지 않은 말이 있다고 했어.”
“누구에게, 무슨 말을요?”
“모르겠어. 그냥 ‘그 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일라이트, 그 인간이 아닐까.”
“어떤 말이었습니까?”
“그 바람으로 그대를 구원하리라.”
탐욕의 신이 자신의 사도에게 속삭이는 말들.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다섯 개의 문장 중, 시아나는 네 개의 문장을 들었다.
일라이트에게 네 번째 문장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탐욕의 신은 일라이트보다 시아나에게 더 큰 힘을 내렸다는 뜻이 되었다.
‘정체불명의 권능.’
셰르핀과 키시온에게서 들은 말.
수십 개의 마법을 그대로 맞고도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권능이라면, 다른 권능까지 내려 받진 못했을 것이다.
하나의 권능과 일라이트 본인의 마법 능력.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마친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응?”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카를,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거야?”
“일라이트 그자를.”
카를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그자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만나는 게 전부야?”
“…….”
“아니… 지?”
시아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총기로 가득했던 눈동자의 초점이 흐렸다.
복수심은 마음을 흐리는 법이었다.
“카를….”
“일라이트 그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정말 만에 하나의 확률로 일라이트가 저지른 일이 아닐 가능성.
만약 그렇다면 이해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실종으로 여겨지던 전 탑주가 그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키시온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8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면 원래의 일라이트는 사도에게 몸을 완전히 빼앗겼거나, 본인의 의지로 저질렀다는 뜻이었으니.
“이야기만 하고 오겠습니다.”
“이야기만 할 게 아니잖니….”
“일단은, 그렇습니다.”
“카를… 아.”
몸을 일으키려던 시아나는 몸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아픔이었다.
“강제로 빙의당한 영향이 남아 있을 겁니다.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도 카를, 너를 이대로….”
“선배님.”
귀를 스치는 서늘한 목소리에 시아나는 손을 떨었다.
벌써 10년 넘게 그를 봐 오며,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저를 걱정하시는 건 압니다. 그런데,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지요.”
“…….”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대로 두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될 겁니다.”
그제야 시아나는 자신의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몸을 빼앗겨 잠든 사이에 일이 저절로 해결된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다.
“그자는 저희 스승님을 살해했고, 선배님까지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받은 것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 핏줄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님.”
시아나는 그리 말하고서 돌아서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언제 저렇게 등이 넓어졌을까.
미숙한 손짓으로 빨래를 거들던 그 꼬맹이가, 언제 저렇게 된 걸까.
한동안 그가 걸어 나갔던 방문에 시선이 붙박여 있었던 시아나는 숨을 내쉬면서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걱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아니.
의지해도 될 정도로 어엿한 마법사였다.
* * *
시아나의 방에서 걸어 나온 카를은 아카데미 부지의 한구석으로 향했다.
키시온과 셰르핀이 열어낸 ‘문’이 있었던 장소였다.
문은 그들이 건너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혔으나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문을 여는 건 어려워도, 닫혔던 문을 다시 열어 내는 건 쉬웠다.
“카를로스.”
그 문 앞에 키시온이 있었다.
자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카를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일라이트를 찾아가는 겁니까?”
“예.”
“함께 가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카를을 향해, 키시온이 말을 이었다.
“베샤네 탑주가 일라이트의 발을 묶어 놓기 위해 남긴 했습니다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습니다. 아마 어쩔 수 없이 물러났을 테지요.”
“…….”
“아마 일라이트는 달아났을 겁니다. 찾기 쉬운 곳으로 도망치진 않았을 테지요. 혼자서 찾는 것보단 둘이서 찾는 편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탑주 심사 직전,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그가 작정하고 숨는다면 찾기 어려울 터였다.
키시온의 예언 능력이 있다면 확실히 찾기 수월할 것이다.
카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키시온 탑주,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엇입니까?”
“그놈은 제 겁니다.”
키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짐짓 놀란 눈치였다.
“약속해 주십시오. 찾는 걸 제외하고 제가 그놈을 죽이는데,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요.”
키시온은 미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가 혼자서 일라이트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여부와 상관없이 한 대답이었다.
“찾는 것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후로는 일절 관여하지 않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를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땅에 찍힌 발자국과 그곳에 남은 흔적을 보면서 마법을 영창했다.
“발현, 재창조.”
대기가 떨리면서 허공에 빈틈이 벌어졌다.
카를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남부 마탑이었다.
“전투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군요.”
주위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쇳가루가 이곳저곳에서 날렸다.
금속의 향기. 베샤네가 애용하는 마법의 흔적이었다.
“베샤네는 역시 물러난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멀리 달아나진 못했을 테지요.”
키시온의 손안에서 황금빛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두 팔을 벌려 마법진의 크기를 키운 그는 눈을 감고 마법진 위에 손을 올렸다.
“제가 찾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을 겁니다.”
마법진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눈을 감고 시간을 들여다보던 키시온이 말했다.
“찾았습니다.”
팽창하던 마법진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키시온이 눈을 떴다.
카를은 키시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