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이스터에그 (5)
“원래의 카를로스가 아니다… 라는 건.”
아나스타시아는 카를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무슨 뜻일까.
아무리 되뇌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말뜻 그대로인가요, 아니면 일종의 언어유희인가요? 예를 들면… 이전의 허물을 벗고 완전히 달라지겠다는?”
“말뜻 그대로야.”
“말뜻 그대로라면… 그러니까 당신이.”
아나스타시아의 눈동자가 카를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연보라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를로스 크로우가 아니라는 건가요?”
“…응.”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카를로스가 아니면 대체 당신은 누구죠?”
“설명해도 믿기 어려울 거야. 그래도 들어 줄 수 있을까…?”
“당신은 제가 말도 못 하는 상황에 있다는 걸 알아줬는 걸요.”
매화꽃이 미소 지었다.
“당연히 들어 줄 수 있죠. 물론, 그때 당신이랑 지금의 당신이 다르다면… 조금 그렇겠지만.”
카를은 그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자신이 본래의 카를이 아닌 정현이라 불리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부터.
“으음….”
카를로스가 죽던 순간에 빙의했다는 것도.
그의 기억과 몸을 가지고, 지금까지 그와 같이 행동해 왔음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흐응.”
아나스타시아의 반응은 묘했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카를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법정에 서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기다리는 범죄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카를은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카를 당신의 말은… 아니지, 원래 이름이 정현이라고 했었죠? 정현 당신의 말은, 그날 원래 카를로스는 죽었고… 당신이 카를로스의 몸에 들어갔다는 거죠?”
“그렇게 되겠지.”
“헤… 그러면 저한테 약혼을 파기하자고 한 것도 당신이 내린 결정이었겠네요?”
카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긴장 탓에 목 근육이 굳어져서 잘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가 뻣뻣해진 모습을 보고 있었던 아나스타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요? 원래의 카를로스한테 미안한 감정이라도 들었어요? 남의 약혼자를 빼앗는 것 같아서?”
“……아주, 없지는 않았지.”
“근본적인 이유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쁠 것 같아서 그런 거고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네요.”
헤에. 옅은 미소와 함께 다가온 아나스타시아가 약한 꽃향기가 배어 있는 손을 뻗어 카를의 목을 매만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그러면.”
“그러니까.”
목에 닿았던 손이 카를의 입술 위로 올라왔다. 손가락 하나로 그의 말을 막은 그녀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랑 같이 다니면서 천천히 설명해 줄래요? 한… 다섯 시간 정도?”
“…….”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입이 막힌 상황에서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기에, 카를은 그렇게 했다.
“헤에.”
썩 만족스러운 대답이었기에 백매화 공녀는 새하얗게 웃었다.
* * *
반군으로 정신이 없는 남부와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탓에 민심이 흉흉해져 있는 북부와 달리 제도의 분위기는 활발했다.
황제가 자신의 탄신일에 선포한 선언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덕분이었다.
“……백십자교 깃발이 많이 보이네.”
카를은 긴장을 덜어 내고자 말을 꺼냈다.
‘마탑’을 제외하면 고층에 속하는 5~10층 정도 되는 건물들의 창문 곳곳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종교 탄압이 몇 달 동안 눈에 띄게 줄었어요. 이단 심문관도 시골로 내려갔고요.”
“원래 백십자교도… 포교는 금지당했었나.”
“네. 신도를 강제 개종시키진 않았지만, 포교는 철저하게 금지했죠. 풀리고 나니까 포교하는 교인들도 많이 보이네요.”
상업 지구는 가장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 중 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포교하는 사람도 많았다.
단, 카를과 아나스타시아에게는 접근해 포교하는 사람이 없었다.
척 보기에도 위세 높은 귀족에게 포교하는 건 주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아나스타시아.”
“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어봐도 될까?”
“보면 알아요. 거의 다 오기도 했고요.”
아나스타시아는 그의 손을 잡아끌고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섰다.
화려한 복식을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 여, 영애님.”
“비는 자리 있을까요?”
“아, 예! 있습니다! 특별석으로 드릴까요?”
“그냥 일반석으로 주세요. 두 장.”
“예! 영애님!”
극단이었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카를은 고개를 들어 극단의 간판을 보았다.
간판 구석에 펠하임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펠하임가의 후원을 받는 극단이었다.
그 가문의 영애가 몸소 행차했으니 직원이 다소 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직원은 티켓을 조심조심 뜯어서 아나스타시아에게 내밀었다.
“저희 자리는… 여기네요. 괜찮죠?”
“응.”
두 사람의 자리는 평민들 사이였다.
눈에 띄는 귀족도 연극이 시작되면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악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난 순간이었다.
“정현 씨.”
“……흡.”
“어머,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작은 목소리.
오직 카를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만 속삭인 그녀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
“몸을 강제로 빼앗은 건 아니죠?”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에 가까워.”
“음….”
자신은 그저 게임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카를로스의 몸에 빙의되었는지는 알 노릇이 없었다.
정현 자신이 만든 캐릭터도, 애착을 가졌던 캐릭터도 아닌데.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 봤어요.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다니. 그리고 그게, 제가 원래부터 알았던 사람이라는 게.”
“…만약에 실망했으면.”
카를은 침을 삼켰다.
“약혼은, 무효로 해도 돼. 내가 책임질 테니까.”
“흐응.”
비음을 흘린 아나스타시아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무대에 선 배우가 독백하는 연기를 하고 있었기에 목소리가 섞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배우가 독백을 하는 동안, 카를의 속은 거의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귀여워라.”
“……?”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요? 가문 간의 정략혼 관계에 놓여 있는 남녀는 보통,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카를로스 크로우라는 남자도 그런 편이었죠.”
정현은 그의 기억을 되새겼다.
관심이 없다… 는 그녀의 말이 맞았다. 편지 한 통도 안 쓰고, 선물로 준 손수건은 마탑도 아니라 본가의 책상 서랍에 방치해 뒀으니.
“오죽하면 제가 소식 좀 들으려고 사람을 심었겠어요?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더라고요.”
“그랬… 었지.”
“공교롭게도 카를로스 크로우라는 남자가 제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었고요. 그런데 어머나, 그 최근의 카를로스 크로우라는 남자가 사실은 원래의 카를로스가 아니었나 봐요.”
연극 속의 작은 연극. 다분히 연기자스러운 톤으로 말한 그녀가 카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한테 먼지 한 톨 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카를로스 크로우일까요, 저를 구하려고 두 발 벗고 나선 카를로스 크로우일까요?”
“…….”
“잘 모르겠으면 잠깐 웃으면서 머리 좀 식힐까요? 연극이 끝나면 말해 줄게요.”
귓속말을 속삭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던 아나스타시아는 다시 자리에 정좌했다.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낀 카를은 천천히 심장을 가라앉히며 연극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윽.
하얀 손가락이 팔걸이에 놓인 카를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후.”
숨을 내쉬어 호흡을 진정시킨 그는 이내 연극에 집중했다.
베니스의 상인. 이 세계에도 존재하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이었다.
“…아나스타시아.”
“못 참겠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후훗.”
당황스러워하는 카를을 본 그녀가 키득거렸다.
“저는 지금 당신이 더 좋아요.”
“…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길래, 역시 전쟁터가 여간 처참한 장소가 아니긴 하구나… 했는데 진짜로 사람이 달라져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극장에서 나온 아나스타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아?”
“네?”
“원래 카를로스를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지금 카를로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내 말투로 말하고 있는 거고.”
“원래 말투도 흉내 냈었잖아요. 지금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러죠?”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죠? 편한 말투잖아요. 자, 봐요. 평범한 연인들이 서로를 향해 어떻게 말하는지.”
“……나랑 비슷하네.”
“존댓말이 익숙해져서 이게 더 편할 뿐이지, 저도 지금 편하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한테는 무슨 교과서에 나올 법한 예법을 지키거든요. 말투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아요.”
꾸욱. 아나스타시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상업 지구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연인이 그러는 것처럼.
“하나 더. 제가 원래의 카를로스를 잘 알고 있어서 말투가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냐고 물어본 것 같은데… 저는 지금 당신 말투가 더 익숙해요.”
“원래 카를로스랑 대화가… 별로 없었나?”
“다섯 마디.”
아나스타시아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피차 아무 말도 안 했고 가문 어른들끼리 정해서 치른 약혼식에서는 딱 한마디 했죠. 제가 학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잠깐 만나서 세, 네 마디 정도 나눈 게 다고요.”
“그게 다라고?”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어야죠. 그리고 저한테 관심도 없었고. 그런데 오늘만 해도 저희, 대화를 오십 마디는 나눈 것 같은데… 제가 누구 말투에 더 익숙할 것 같나요.”
“내가, 더 익숙한가?”
“그렇죠. 당신이 원래 카를로스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긴 했지만… 제가 아는 카를로스는 당신이에요.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네요.”
의외의 대답.
카를은 놀라워하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나스타시아가 말했다.
“정현 씨.”
“…흐.”
“놀란 얼굴이 일품이네요. 저희 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불러도 되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곳이라면.”
“네. 그런데, 당신이 원래의 카를로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만 아는 건가요?”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을 본 아나스타시아가 물었다.
“저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누구예요? 당신이랑 친한 마법사들?”
“…황제 폐하.”
“……네? 폐하께서 당신 사정을 아신다고요?”
“응.”
카를은 천천히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정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황제가 자신더러 아나스타시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는 것을.
“왜 갑자기 저한테 이런 말을 하나 싶었더니, 흐응… 그렇게 된 거였군요.”
한순간.
묘한 미소를 지은 아나스타시아가 칼리테 펠하임의 눈과 쏙 빼닮은 눈빛을 지었다.
등허리에서 섬뜩한 한기가 느껴졌다.
카를은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그녀의 손을 꾹 쥐었다.
“아.”
정신을 차린 그녀가 카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를, 혹시 바로 돌아가야 하나요? 어디든?”
“…괜찮아.”
“그러면 오늘 하루는 저랑 놀아요. 다섯 시간 말고, 오늘 통째로.”
백매화 영애가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그래도 괜찮죠?”
“물론.”
“그럼 같이 가요.”
영애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딱 하루만 재밌게 놀죠.”
카를은 잠자코 그녀의 제안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