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동족 (3)
빛 한 점.
작은 광명이 어머니 나무의 잎에서 카를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알시아…?”
푸른 글자가 가리키는 단어. 어머니 나무의 뒤에 있는 거대한, 숲의 신.
시나리오에 직접 등장하지 않고 설정만으로 존재하는 그 신이 카를에게 축복을 내린 것이었다.
‘왜지?’
당황스러웠다.
숲의 신이며 엘프의 수호신인 존재가 자신의 사도인 어머니 나무의 방벽을 부수고 엘프들을 위협한 자신에게 축복을 내리다니?
의아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문을 계속해서 품고 있는 사이, 또 다른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들꽃과 멧새와 시와 바람의 이야기] [알시아가 당신을 축복하며 가호를 내립니다. 가호는 당신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유지됩니다.] [가호가 유지되는 동안 당신은 아름다움을 이해합니다. 다른 이의 고독을 공유합니다. 다른 이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신뢰를 살 수 있습니다.]‘뭐 이딴 축복을…?’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효과였다.
알시아의 의지가 담긴 마지막 첨언마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나보고 엘프들이랑 친해지라고?’
깽판이란 깽판은 다 쳐 놨는데, 이제 와서 그런 목적으로 축복을 내려 준 걸까.
‘알시아도… 제정신은 아닌가.’
대부분의 신들이 그렇듯 알시아 또한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괴상하기 짝이 없는 축복을 걸어 준 것이리라.
그나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점이라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친화성과 관련된 축복이니 만큼 마족들에게 접촉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히 접촉만 하든, 아니면 드라일까지 완벽하게 속여 넘길 때까지든 이 축복은 자신이 원한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효과로 준 건가?’
아무리 신이 내리는 축복이라고 하더라도 강력하면 그만큼 효과와 지속 시간이 짧다.
강력한 축복을 길게, 혹은 영구히 유지하는 방법이 사도로 삼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소소한 효과의 축복은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
카를은 문득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게 빛나고 있었던 광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무 너머의 거대한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사도로 삼는다고 하면 자신이 거절할 것이 뻔하니… 이렇게 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무에 손을 올린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겠습니다.”
자신을 섬기는 엘프들이 전쟁에 대해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이대로라면 파멸을 맞이할 것을 알기에 자신을 선택한 것이리라.
그런 추론을 마치고 나무에서 손을 뗀 순간이었다.
―그대가 만인과 가까워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산들바람처럼 지나간 목소리에 놀란 카를이 순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프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육성(肉聲)조차 아니었다.
알시아의 목소리.
‘이미 강림해 있는 건가?’
허상 공간 너머에서 직접 말을 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알시아가 어떤 형태로든 강림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신의 강림.
시나리오의 진행.
‘역시….’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메인 스토리에 접어든 것이다.
신격이 낮은 신부터 천천히 강림하고, 시나리오의 막바지에는 ‘전쟁’이나 ‘절망’ 같은 최상위 신들이 강림한다.
하지만 알시아가 관장하는 ‘자연’과 ‘숲’ 그 자체를 섬기는 이는 많지 않다.
기껏해야 엘프들과 자연주의자들뿐. 그래서 알시아는 신격이 낮은 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만 신격이 낮은 만큼 강림해도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5년이라는 시간을 60분으로 압축한 시나리오는 강림한 모든 신을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알시아는 설정으로만 존재했다.
‘슬슬 대비를 해야겠군.’
하지만 알시아의 강림이 뜻하는 바가 있었다.
신격이 낮은 신들 중에서도 명백히 ‘악’이라 부를 수 있는 신은 존재했고.
그들이 곧 강림하리란 것이었다.
“…끝난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무 너머에서 느껴지는 알시아의 거대한 존재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성인식은 알시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게 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음.”
나무와 카를을 번갈아 쳐다보던 사달멜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이름은 어찌하겠느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이 탓일까, 자갈처럼 살짝 갈라진 감이 없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서 인자함이 묻어 나왔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손자를 맞이하는 할머니 같은 목소리였다.
“…그대로 쓰겠습니다.”
안타레스. 엘프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알파성의 이름.
제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마족들은 알파성의 이름이 엘프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안다.
그들 사이로 녹아드는 것이 카를의 목적이었으니 알파성의 이름을 가져야 했다.
마침 엘프인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었으니 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저는 알레나의 아들 안타레스입니다.”
“그래. 안타레스.”
자신의 딸을 쫓아내야 했던 엘프, 사달멜리크가 말했다.
“가기 전에 식사라도 하고 가려무나.”
어느 세계의 할머니들과 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 * *
두 사람이 대삼림에서 나온 건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카를 본인이 다름 아닌 사달멜리크의 혈육이었기에 경악할 만한 일을 저지른 것에 비해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하이 엘프의 혈통, 그리고 카를 자신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엘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완전히 안타레스가 됐구나….”
“여기선 아니죠.”
카를은 자신의 몸을 집어삼킨 마법을 꺼뜨렸다.
이 잠입은 말 그대로 마법의 숙련도가 생명이었다. 빙결 계열 마법의 단련을 조금 늦추더라도 ‘황천’을 연습했다.
엘프들과 함께 저녁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서까지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본 시아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마족들이 속겠지? 설마 카를 네가 엘프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 버리면….”
좋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카를이 잘난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마족들 한복판에서 살아서 빠져나오는 건 어려울 테니까.
“속을 겁니다.”
카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시아나에게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냥 단순히 엘프들이 ‘대표자’로 안타레스라는 이름의 엘프를 보냈다, 라고 한다면 마족들도 의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거짓 정보를 준비했습니다.”
“거짓 정보?”
“안타레스라는 이름의 엘프가 북부의 수용소에서 마족을 구해 냈다… 라는 정보요. 그 거짓 정보를 칼리에게 부탁해, 드라일을 속이게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칼리가 드라일과 접촉했을 것이다.
신생 마족 연합 쪽으로 전향한 순혈 마족 중 한 명이 이끄는 부대의 마법 노예였다.
그 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만천하가 아는 것과 달리 칼리가 하프지만 마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기껏해야 펠하임 가문과 리안에서 오랫동안 칼리와 붙어 있었던 사라 정도였다.
하지만 루크바트 장로의 건도 그렇고, 펠하임은 카를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사라가 마족들에게 그런 정보를 알릴 이유가 없었다.
“정보가 하나라면 의심하겠죠. 하지만 두 개라면 신뢰도가 높아져요. 심지어 엘프 장로들이 확실히 신분을 보증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어요.”
드라일은 세력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있다. 어떻게 되었든 적은 그 마왕이었으니까.
정말 딱 한순간에 불과한 순간, 하드라이누스가 두려움을 드러냈을 때 이시엘은 놈을 죽였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상대.
하지만 이 빌어먹을 세계관은 결국 RTS 게임에서 비롯되었다. 한 개체가 얼마나 강하든, 머릿수 앞에선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시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많은 수가 필요하긴 할 테지만, 수로 압도하는 게 불가능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엘프의 조력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드라일은 엘프를 거부할 수 없고, 그게 바로 카를의 노림수였다.
“설마 한 종족이 통째로 뒤통수를 때릴 거라곤 생각도 못 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불안한데….”
“저 아시잖아요. 선배님.”
“아니까 더 그러는 거야.”
균열을 열던 시아나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나 때문에 너도 위험해질 뻔하고… 내가 이렇게 말할 자격은 없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그래. 아니… 넌 이미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잖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시아나는 마저 영창을 끝마쳤다.
카를은 눈앞의 새파란 균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시아나가 카를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얼른 가자.”
“…아뇨, 선배님.”
“응?”
“생각해 보니까,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네. 어차피 지금 탑으로 돌아가도… 아티팩트도 완성이 안 되어 있을 거고, 학생들도 방학이라 제가 딱히 할 게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더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조금 더 발버둥 칠 필요가 있었다.
이 세계는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났으므로.
“어떻게 하려고?”
“제 이름을 알려야지요. 정확하게는, 마족들을 돕는 엘프 안타레스의 이름을 알릴 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 사람만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드라일은 자신을 확실히 신뢰하게 되리라.
“모든 마족이 안타레스라는 이름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속을 수밖에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카를은 그렇게 했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자칫 한 명이 세 번 인사한 것처럼 들릴 정도로 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를은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한 번 만지고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지요.”
“어라라?”
“듣던 대로 신기한 엘프다!”
“인상이 밝아! 그리구, 예의도 발라! 이런 엘프 처음이다!”
어린 소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마녀들이었다.
“당신이 안타레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었을 때쯤, ‘안타레스’라는 이름은 마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한 마족의 탈출을 도운 것이었다.
탈출한 마족에 의해 그 엘프의 이름이 마족 연합의 고위 간부의 귀에 들어갔고, 종국에는 드라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칼리가 말한 것이었고, 카를이 노린 바였다.
“예. 제가 안타레스입니다.”
여러 수용소에서 마족을 탈출시켰다. 순찰대가 기습당한다는 정보를 알려 주어, 순찰대의 목숨을 살렸다.
중립 지대를 지나다가 인간 도적들에게 약탈당하던 마족들의 마을을 구해 냈다.
‘안타레스’는 이외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활약을 해냈다. 그렇게 알려졌다.
“당신이 안타레스!”
“우리는 드라일 장군의 직속 마녀인 양털 빗자루야!”
“약속한 것과 같이 당신을 데리러 왔어!”
당연하게도 드라일은 그런 활약을 한 마족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 명의 아군이 아쉬운 상황.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포섭하려고 애쓸 것이었고.
“예. 가시지요.”
그것 또한 카를이 노린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