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악신 (2)
바람이 불었다.
언젠가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더라도 처음엔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작되었을 것이고, 폭풍에 꺾이지 않을 만큼 단단한 나무도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났을 것이다.
신(神)이 되어 가는 과정 또한 그랬다. 처음엔 자아조차 없는 사념체에서, 훗날엔 용조차 고개를 숙여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
신이 되는 과정이 그렇듯, 그 신을 섬기는 사도가 되어 가는 과정 또한 비슷했다.
작은 것으로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사도를 몸에 심거나, 조금씩 자신의 사도로 물들여 가는 것.
알시아가 선택한 방법은 두 번째였다.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대답해!”
카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터뜨렸다. 아수라장이 된 성벽 내부에서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다만.
무감정한 목소리. 풀과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 한들 인간이나 짐승처럼 감정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알시아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대가 소인의 가호 아래에서 안전하길.
그리고.
―그리하여 그대의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거짓말.”
그게 가식이라는 것을 카를은 알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준 건 평범한 가호가 아니야.”
알시아보다 훨씬 신격이 높은 신. ‘탐욕’을 관장하는 신 카티아―라즈.
그 신과의 내기에서 카를은 ‘시스템’을 이용했다. 특성으로 자신의 인격을 무너뜨리고 대체 인격을 심었고,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
카티아―라즈가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너는 내가 가진 이 특권을 알고 있어.”
자신과 같은, 빙의 전의 기억을 가진 황제에게도 자신과 같은 시스템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특권.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비밀.
알시아는 그것을 알아내고 카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네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봤을 수도 있고 기억을 읽었을지도 모르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빠득. 그가 이를 갈았다.
“네가 나한테서 이걸 숨겼다는 게 중요한 거지.”
지금 카를의 몸은 인간보다는 엘프에 가까웠다. 원래도 4분의 1가량은 엘프였지만, 지금은 거의 9할이 엘프일 것이다.
그리고 알시아는 숲을 관장하는 신이자 엘프들의 신.
인간보다 엘프에 가까운 상태에선 알시아가 얼마든지 그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왜 숨겼지?”
―그대는.
카를의 물음에 바람이 대답했다.
높낮이의 변화가 전혀 없는 일관적인 목소리. 그 무감정한 목소리 사이에 자그마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덕이라 생각하나요?
바람 소리가 거세졌다.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그들 사이로 녹아든 것이 오직 그대의 덕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지금까지 자신이 연기해 온 ‘안타레스’는 카를 자신도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
마음에도 없는 아부가 저절로 흘러나왔고 일관된 캐릭터를 유지했다.
이미 카를로스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여러 번 위화감을 느낀 정현, 자신이 한 일이라곤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네 덕분이지. 알아. 네가 나한테 준 그 축복 덕분이라는 거.”
카를은 다시 보이게 된 시스템 창을 열어 알시아가 자신에게 내린 축복을 확인했다.
[들꽃과 멧새와 시와 바람의 이야기] [알시아가 당신을 축복하며 가호를 내립니다. 가호는 당신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유지됩니다.] [가호가 유지되는 동안 당신은 아름다움을 이해합니다. 다른 이의 고독을 공유합니다. 다른 이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신뢰를 살 수 있습니다.]이 축복이 있었기에 카를은 마녀들을, 드라일을 그리고 자신이 지나쳐 온 이들을 몽땅 속여 넘겼다.
마법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는 권능에 가까운 힘.
“그래서 대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나?”
그 힘을 알시아는 아무 대가 없이 내어 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사도로 삼으려고 한 건가?”
―네.
차가운 바람이 답했다.
―소인이 그대에게 선물한 힘의 대가. 그 대가로 소인은 그대의 섬김을 원해요.
“알시아.”
―거절하겠다면 소인은 대가 없이 내어 드린 힘을 다시 거두어 가겠어요.
지금까지 카를이 안타레스로서 이룩한 것을 빼앗겠다는 소리였다.
거의 절반 가까이 온 카를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만약 알시아가 가호를 거두어 간다면 분명 치명적으로 작용할 테지만, 카를은 겁먹는 일 없이 입을 열었다.
“늦었어. 알시아.”
바람은 대답이 없었다.
“이미 우린 한배를 탔어. 네가 내게 내린 가호를 거둬 가서, 내 정체가 들통난다면 드라일은 반드시 보복을 할 거다. 그리고 그 보복이 나 하나로 끝날까?”
이미 엘프는 마족들 사이에서 배신자들의 종족으로 유명했다.
그 엘프가 다른 이도 아닌 드라일을 기만하고 배신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엘프라는 종족 전체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너도 알지 않나? 엘프들은 여기 있는 이 마족들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걸.”
카를의 주위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없었지만 알시아가 분노하고 있음을 카를은 내심 짐작했다.
가호를 거두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분노.
“너는 나약해. 알시아.”
―그대와 같은 필멸자에게 들을 말은….
“너도 알고 있잖아.”
카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벼락이 내리쳤다. 레카샤에 있는 마족 마법사들이 대응은 하고 있었으나 그들만으로는 모자랐다.
벼락이 떨어져 살점을 태웠다. 불멸이라는 개념에서 태어난 신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네 신격이 정말로 강했으면 저것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진 않았겠지.”
카를의 마법은 벼락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양의 피를 토해 낼 정도로 심한 출혈이 생겼다.
신격과 신격의 충돌. 알시아의 힘이 크라누스에게 밀리며, 알시아의 가호를 받고 있었던 카를에게 그 충격이 전해진 것이다.
“네 가호는 나를 지켜 주지도 못했어. 내가 너처럼 나약한 신을 섬길 이유가 없지. 안 그래?”
바람이 불었다.
맥없이 부는 바람은 다만, 카를이 입은 옷의 끝자락만을 살짝 흔들리게 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가, 네 열렬한 신도인 엘프들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
“알시아 너는 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니면 허상 세계의 밑바닥에 있는, 한때 신이었던 괴물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될까.”
카를은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알시아가 가호를 거두지 않더라도 안타레스라는 엘프가 가짜라는 걸 알릴 방법은 많았다.
“한번 시험해 볼까?”
―윽….
나약하다 한들 알시아 역시 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역으로 협박당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걸까, 알시아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바람이 요상하게 흔들렸다.
알시아보다 훨씬 강한, 카티아―라즈를 상대해 본 카를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얌전히 협조해라. 내 눈을 가릴 생각 마. 나를 네 사도로 삼을 생각도 마. 모든 일이 끝나면 너는 저절로 강해져 있을 테니까. 약속하지.”
―소인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는데 대체 어떻게…!
“너는 안 죽을 거야.”
바람이 멈추었다.
인간도 아닌 신이 놀라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불가능해요.
스스로를 소인(小人)이라 낮추어 부르는 신이 말했다.
―그대가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누군가의 그늘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을 죽일 순 없어요. 차라리 지금 묶여 있는 사슬에서 벗어나 소인의 아래로 들어오세요. 그러면….
“그들의 세계에서 죽이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허상 공간에서 기어 나오는 놈들을 죽이는 건 가능해.”
허상 공간은 그들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이 세계는 다르다.
그들의 힘이 지배하는 대로 규칙이 바뀌지 않고 절대적인 법칙으로 유지된다.
흔히 물리 법칙이라 불리는 것.
그 법칙을 통해 싸우면, 신이라 불리는 자들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아마도, 이 또한 이 세계가 원래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래도….
“못 믿겠다면 한번 증명해 볼까.”
카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 내려온 거체가 마침내 대지 위에 발을 디뎠다.
그저 지켜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신격과 신격의 충돌.
알시아의 가호를 지닌 카를을 눈치챈 불멸의 신 크라누스가 그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확실하게 해라. 알시아.”
강림하기 전부터 거슬리는 두통이 머리를 짓눌렀다. 권능과 마법이 충돌한 순간, 직격당하지 않았음에도 피를 토해 낼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알시아는 가호만을 선사한 것과 달리 크라누스는 이곳에 직접 강림했으니 신격이 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확실하게 돕든가, 확실하게 버려.”
어중간한 가호는 카를을 불리하게 만들 뿐이었다. 가호를 완전히 거두거나, 크라누스의 신격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가호가 필요했다.
바람은 잠시 불지 않고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다음 순간.
[알시아가 당신을 축복합니다.]반투명하고 푸른색의 글자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들꽃과 멧새와 시와 바람의 이야기, 그 부록.] [알시아가 당신을 축복하며 가호를 내립니다. 가호는 당신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유지됩니다.] [가호가 유지되는 동안 당신은 알시아와 신격(神格)을 공유합니다.]“…….”
카를은 잠시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격의 공유.
설정상, 신과 신의 싸움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도에게나 내리는 최상급의 축복이었다.
―대가를 약속한 그대에게 소인의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카를을 둘러싸던 바람이 걷혔다.
은밀한 대화를 위해 알시아가 만들어 둔 일종의 보안 장치였을까.
그때까지는 주위의 누구도 카를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를 알아본 누군가가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안타레스, 장군님…!”
요한나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크라누스가 강림하는 현장 한복판에 있었던 그녀의 의복 이곳저곳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카를의 손목을 붙잡은 그녀가 말했다.
“계, 계속 찾았습니다… 대장군님은 보이는데 장군님은 안 보이셔서, 아…!”
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직 혈흔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낯빛이 새하얗게 되어 할 말을 잃은 요한나의 얼굴을 본 카를은 자신의 상태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목 아래의 옷만 해도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위의 상태는 더 심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 심지어 드라일은 바로 앞에서 자신이 부상을 입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안타레스 님… 괜찮으신… 건가요?”
“움직일 순 있습니다. 싸우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합의 간부 안타레스로서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카를은 일부러 힘이 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요한나 공, 제가 병사들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준비는 되었습니까?”
“네! 작업이 끝나자마자 준비를 시작해서 저 괴물이 나타나기 직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면 요한나 공께선 병사들을 끌고 레카샤 외부로 퇴각하십시오.”
“…네?”
“정체불명의 괴물을 상대로 무작정 병사들을 돌격시킬 순 없습니다. 일단 퇴각했다가, 대장군 각하의 명령에 따르도록 합시다.”
후우.
말하는 것도 지친다는 듯 카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 안타레스 님. 그런데 제가 병사들을 이끄는 거라면 안타레스 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저는 세리아 장군의 신원을 확보하겠습니다.”
카를은 가장 먼저 벼락을 맞아 불타 버린 첨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름 아닌 그 첨탑에서 이시엘과 다시금 접선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요한나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네, 무운을 빌겠습니다. 안타레스 님.”
그녀를 속여 넘긴 카를은 마법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지워 내며 첨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