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잊지 못하는 자 (4)
익숙한 나른함이 느껴졌다.
감각을 다시 자각하고 눈을 뜬 카를은 현실감을 되찾기 위해 손을 한 번 쥐었다 펴 보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근육이 움직이는 감각이 팔을 타고 전해져왔다.
“…허.”
칼리테 또한 자신과 함께 회귀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회귀를 겪고 있다. 죽음을 극복한 힘을 손에 쥐고 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퍼졌다.
단순히 기록을 읽어서 알고 있다면 힘을 지닐 수 없다.
아스텔과 그곳에 있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알더라도 찾아갈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념 세계의 어딘가….’
그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기억의 회랑 너머 사념 세계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들을 찾아가는 건 마법사인 카를도 불가능했다.
단순히 그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론 이 힘을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장 카를만 하더라도 아스텔이 직접 그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가능성은 여러개지만….’
아스텔이 칼리테에게도 접근했다.
혹은 자신처럼 타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등등의 여러 가능성이 떠오른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증명할 방법은 칼리테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당장 이런 짓을 벌인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에.
“황실의 기록 보관소….”
칼리테는 황제에게도 물어보라는 말을 했지만 카를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칼리테처럼 한 번만 읽어도 모든 것을 외우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관련된 기록만 붙잡고 외운 게 아닌 이상 크게 도움은 되지 않으리라.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낫다.
“그러면….”
이제는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카를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임시 숙소에서 걸어나왔다.
얼마 뒤, 마탑이 세워진 방향에서부터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 부탑주님!”
“알고 있다.”
이전과 똑같이 헐레벌떡 마법사가 달려왔다. 카를은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마탑에서 일이 벌어졌군.”
“예? 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지. 일단은 여기에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불러 모으도록.”
“…예!”
탑의 마법사답게 그는 재빨리 움직였다.
사도와 배신자들로 가득한 마탑에서 탈출한 마법사들.
그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었다.
카를은 용병단과 상단 쪽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익숙해졌다는 듯, 그녀는 용병들과 제 수하들에게 각각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반복하는 일인 듯 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카를은 멀찍이서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어라?”
그녀의 말이 끝나고 용병단과 상단 측 인원들이 해산했다.
휴, 짧은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쓸어 올린 아나스타시아는 고개를 돌린 곳에 카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언제 일어났어요? 알았으면 빨리 끝냈을 텐데…얼마나 기다린 거에요?”
“얼마 안 기다렸어.”
“오래 기다렸다는 말이죠? 그거?”
“진짜로 얼마 안 기다렸어.”
약간의 의심이 섞인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던 아나스타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그런 걸로 할게요. 아, 맞다. 카를. 저게 뭔지 알려줄 수 있나요? 뭔지 몰라서 일단 단원들한테는 평소처럼 하라고 일러뒀는데….”
“결계야.”
“…결계? 그러면, 드디어 오라버니가 제도를 물리적으로 봉쇄하려는 걸까요?”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제한하는 효과는 없다시피 한 결계다.
제도를 빠져나가는데 제한은 없다. 아마도,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을 테지.
“일종의 의식이나 제단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네.”
“신을 불러들이고 있는 거야.”
“…….”
연보라빛 눈동자가 커졌다.
“신을…요?”
“응.”
“하얀 십자가 신 같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위험한 신.”
아, 하는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어떻게…해야 하나요?”
“그 전에 아나스타시아.”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니까…너한테 해야 하는 말이 있어.”
“저희 오라버니랑 관련된 건가요?”
“조금은.”
사뭇 진지한 카를의 어조에 아나스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가요?”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카를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해줬던 거 있지? 내가, 아마도 원래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정현이라는 이름 말이죠?”
“응. 그거. 그게 아마도…내 착각이었나봐.”
“……네?”
착각. 어쩐지 가볍고 무책임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장난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하지만 카를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사람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거야. 내 자아가 약해져 있을 때 방대한 기억이 흘러들어와서…그 기억의 주인이 진짜 나라고 착각한 셈이지.”
“어떻게 그게…. 그, 그러면 그건 어떻게 안 건가요?”
“나한테 이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겠다면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어.”
“그거 완전 이교도들 같은…아, 아니에요. 계속 말해줘요.”
“별자리라는 사람들이었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인데….”
카를은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당황한 아나스타시아도 곧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별자리부터 회귀에 관한 것까지. 세 번의 죽음과, 네 번의 회귀.
그리고 칼리테의 의도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까지.
“아….”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나스타시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카를의 얼굴을 보았다.
“제가.”
“응.”
“제가 당신한테 말을 하라고 했었다고요?”
“…아마, 지금쯤이었을 거야.”
학원의 지하에 갔다가 다시 올라온 시간. 카를이 그녀에게 부탁해 목숨을 끊고 회귀를 발생시킨 시간이 지금이었다.
영원히 겹쳐지지 못할 두 개의 시간.
머뭇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저더러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 당신이나…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한 저나….”
“응.”
“모두 당신이랑 저 답네요.”
“……그러게.”
“당신이 한 말.”
아나스타시아가 카를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저번처럼, 약속 하나만 해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저번’을 말하며 그녀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당신이 또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당신이 죽든 제 오라버니가 죽든 어쨌든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응.”
“다 저한테 이야기 해줘요. 믿을 테니까.”
“…알았어.”
그 손가락에 카를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약속할게.”
“좋아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볼까요?”
환한 웃음과 함께 아나스타시아가 말했다.
* * *
“이게 벌써….”
몇 번째일까.
이불을 확 걷고 일어난 카리아 프라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어제 낮부터 이상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미 겪은 일을 또 겪는 일들이.
예지몽을 꾼게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기시감이 너무 짙었다.
“대체 뭐냐구….”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장 이번에도 그랬다.
외부 실습이 끝난 어제부로 학기가 종료되었다. 학기말 기념 파티를 끝으로 오랜만에 집으로 되돌아가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수업을 듣지 않아서 기숙사 방에서 플레어랑 떠들다가 점심때 기념 파티가 있는 강당으로 가고….
“분명히 강당에 갔었다가….”
초콜릿이 들어간 빵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생생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다시 아침이다.
한 번 있었던 일도 아니다. 벌써 두 번…아니, 세 번이나 아침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 번은 너무 이상해서 꿈처럼 느껴졌지만, 적어도 두 번은 이미 겪어본 일처럼 생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데…!”
짜증 섞인 목소리를 토해낸 순간 맞은편의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라…?”
“카리아, 깨어 있는 거지?”
“아, 응….”
“잠꼬대가 아니었구나.”
눈을 게슴츠레 뜬 플레어가 카리아를 날 선 눈으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근데 그렇게 시끄럽게 혼잣말을 해야 했어?”
“미, 미안…나 때문에 깼어…?”
“응.”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플레어의 말에 카리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지한 눈으로 카리아를 바라보던 플레어가 입을 열었다.
“카리아.”
“응…?”
“너 어제부터 좀 이상해. 말해봐, 무슨 일이야?”
잠옷 차림에 자다 깨서 부스스한 머리카락.
밖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플레어의 똑 부러진 성격은 여전했다.
뺨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카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게…있잖아 플레어.”
“응.”
“나만 내버려 두고 시간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래?”
“으, 응. 오늘만 해도 기념 파티에 갔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다시 아침이야. 그것도 벌써 두 번이나…! 아, 세 번이구나….”
“그거 개꿈이야. 잊어.”
“엑….”
꿈 아닌데.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카리아는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개꿈이라 부르는 게 옳으리라.
“그래서 카리아.”
“으, 응…?”
“꿈은 그게 끝이야? 기념 파티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니까 지금이다?”
“아, 아니….”
“다른 것도 있어? 뭔데? 말해봐.”
“그게, 세 번째에 있었던 일인데…그때는 기념 파티가 끝난 뒤였어.”
“아직 하지도 않은 기념 파티가 끝난 뒤. 응. 그리고?”
어쩐지 믿는 눈치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아 프라헨은 말을 이었다.
“이건 너무 허무맹랑해서 진짜 꿈이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말해봐.”
“하늘에서 막, 붉은 문 같은 게 열렸어.”
“하늘에서?”
“응. 그리고 거기서 마족들이랑 마수가 쏟아져 나왔어. 탑주님이 비상경보를 발령하고…저번처럼 학교 주변에 방벽이 펼쳐지고….”
뭐라고 해야 할까.
종말이 도래한다면, 그런 광경이리라.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어떤 여자가 나를 찾아왔었어.”
“빨간 머리에 파란 눈? 학교 안엔 그런 사람이 없는데? 카리아 네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 잘 몰라. 이름은…아스텔? 에스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우린 모르는 사람이네.”
“응.”
비현실적인, 꿈에 불과한 이야기.
하지만 플레어는 어째서인지 그 이야기가 진짜라고 여겨졌다.
“카리아 너, 악몽 자주 꾸잖아.”
“응. 그렇지…?”
“지금까지 꾼 악몽도 그렇게 구체적인 거였어?”
“잘….”
“잘?”
“잘 모르겠어. 낭떠러지 같은 데서 떨어지는 꿈이라면 모를까 이런 꿈은…꿔본 적이 없는데.”
답답한 마음에 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