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잿더미 속에서 (2)
이젠 여행자라 불리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왜 이들이 자신을 여행자라 부르는지 그것 또한 알 것 같았다. 이들이 남긴 길을 쫓는 것 자체가 여행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아카시아 폐하를 뵙습니다.”
“…아, 어? 으, 응. 안녕.”
제국의 예법상 한 번 황제였던 자는 죽어서도 황제다. 어떤 형탠로든 다시 황제를 마주한다면 예법을 다해야 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카시아는 이런 상황이 퍽 어색한듯 뺨에 난 흉터를 긁적였다.
“카이렌이 만든 예법이구나, 그거. 근데 나한테는 그럴 필요없어. 다른 사람들도 나한텐 안 그러거든. 너도 알다시피 나는 촌뜨기야…너처럼 멋있는 사람이 촌뜨기 왕한테 고개를 숙이면 이상하잖아.”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아스텔이 어쩐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렉도, 사르시아도 시선을 어찌할지 모르고 눈을 피했다.
“이런 옷도 영 불편해. 나는 이런 옷, 안어울리잖아. 천이 너무 많고 장식도 많아서…또 비싼 옷일 텐데 흙이 묻으면 안 되잖아.”
“…아닙니다. 폐하. 잘 어울리십니다.”
“엥? 진짜? 진심이라는 표정인데…진짜야?”
“예.”
한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았다고 카를은 자신 할 수 있었다. 본인은 어색해하는 것과는 달리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신기하네. 진짜 잘 어울리나봐. 나는 이거, 되게 불편한데. 등에 손이 안닿아서 입기도 힘들고…이런 건 원래 카이렌이 해줬거든. 또, 또, 내, 등에 있는 흉터를 보고도 이상하다고 안했고…근데 내가 혼자서 입은 건데도…안 이상해?”
“예. 폐하.”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아카시아는 아스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고민된다는 듯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 진짜야? 에스텔?”
“응. 아카시아.”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아스텔은 거짓말은 안하니까…응, 진짜겠지? 알겠어. 아, 아. 열쇠를 찾았다고 그랬지? 우리가 카이렌한테 맡겨둔…그 열쇠들이야?”
“맞아. 그 열쇠들이야. 아카시아.”
“다행이다. 카이렌이 남긴 열쇠가 사라지진 않았구나. 카이렌은…사라졌고. 카이렌이 보고 싶어. 카이렌…”
아카시아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더없이 맑고 투명한 눈. 살짝 입술이 깨물리는 모습. 그 눈에 투명한 눈물이 담겨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카를로스. 아직 아카시아의 기억은…과거에 머물러 있거든.”
“과거에…”
“기억도 확실하지 않고 감정 조절도 어려워해.”
하아아…
자그맣게 속삭이는 아스텔의 목소리 사이로 아카시아의 한숨이 흘러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전에는 안이랬는데. 미안해 슐리펜.”
사과의 말을 전한 아카시아는 카를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고는 숨을 삼켰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 슐리펜…..이라고 네 가 아는 사람이랑 네가 닮아서 착각했어. 그, 그런데 정말 닮았는 걸. 그렇지 않아? 아스텔? 저 눈이며 분위기…전부 슐리펜을 닮아 있어.”
“맞아. 그 아이의 후손인걸. 닮을 수밖에 없지.”
“그, 그치? 그래도 미안해. 아무튼 카를로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말이야…시간을 여행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시간, 여행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살아남는 방법…이지? 거긴 위험한 곳이니까. 아주, 위험해.”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시간을 다룬다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이유를 알려줄게.”
여기로 와. 슐리펜. 조금 비뚤어지긴 했지만 총명함의 빛을 내는 눈. 카를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 관측실 내부로 들어갔다.
정석적인 카이저 수염을 기른 늙은 기사가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나는 말이지만 말이야, 부끄럽지만 혼을 통째로 빼앗겼어. 절망의 신이 수집하는 영혼 중 하나가 된 거야. 거긴 가시 밭길이야. 나는, 거기서 분명 아파하고 있었는데…이상해. 누가 내 손을 잡아줬거든. 아마 카이렌일 거야. 분명해. 카이렌이 내 손을 잡아서 나를 끌어올려줬어.”
실패하지 않았다. 결과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던 카를은 아카시아의 말을 듣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페마나이스가 왜 그렇게 영혼을 수집하는 지 알아?”
“악독한 취미가 아닙니까. 다른 이의 절망을 빨아먹고 자신의 힘으로 삼는.”
“영혼을 수집하는 것 자체에 이유가 있었어. 하페마나이스는 황금 가지를 가지고 있거든. 그 가지를 가진 존재는 ‘숲의 왕’이 되어 막대한 힘을 가져.”
“…..숲의 왕? 황금 가지?”
그 말을 곱씹던 카를이 물었다.
이 세계가 자신에게 게임이었을 적의 지식이기도 하며, 원래 이 세계의 지식이기도 했다.
전자는 학문의 영역에 있었으나 후자는 비유적 표현도 학문도 아니었다.
“세계수와 관련된 이야기 입니까?”
세계수. 그리고 세계수를 관리하는 하이엘프 신제들. 엘프들은 그 사제를 황금 가지라 불렀다. 스스로를 세계수의 자식이라 생각하는 엘프들 가운데에서 황금 가지라 불리는 엘프는 곧 가장 고귀한 자식이라는 뜻이 되었다.
“관련이 있어. 세계수가 아직 남아 있었을 때…세계수는 말 그대로 세계의 힘을 가졌거든. 하페마나이스가 가진 힘도 그것과 비슷한 세계 자체의 힘이니까.”
“세계 자체의 힘…”
“그런 힘을 가진 게 아니면, 어떻게 하페마나이스가 전쟁의 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겠어.”
개념으로부터 힘을 얻는 신들. 그 중 ‘전쟁’은 한계가 없지만 절망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절망 또한 힘을 소모하는 일이기에, 사람에게서 일정량 이상의 절망을 뽑아내기는 어렵다.
무한히 강해지는 전쟁의 신과 달리 절망의 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과 세계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하페마나이스는.”
“그러면 왜…”
한 가지 의문이 카를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페마나이스는 죽었다. 놈의 거수는 카를에게 살해당했고 놈은 ‘붉은 눈’에게 패해 쓰러졌다.
칼리테가 놈을 정말 한계까지 나약하게 만들어 강림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세계의 힘을 가졌다면 놈은 왜 당한 걸까.
“억제 당하고 있었으니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아스텔의 입에서 나왔다.
“세계 그 자체의 힘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별거 없어. 카를로스 네 마법도 세계의 힘이지. 카이렌이 약해진 하페마나이스를 ‘율법’으로 억제한거야.”
율법. 성녀, 조라야가 다루었던 힘. 아마도 칼리테는 조라야가 남긴 유물로서 그 율법을 다시금 펼쳐내었던 것이리라.
카를이 이해했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시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페마나이스는 그 황금 가지를 숨기기 위해 영혼들을 수집해서 가지처럼 보이게 한 거야. 그렇게 한 이유가 뭐겠어?”
“다른 이가 빼앗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 하페마나이스가 죽었으니까 온갖 것들이 그 힘을 노리려고 하지 않을까.”
허상 세계에서 머무르는 온갖 것들.
수많은 신들, 그 신을 따르는 사도들, 신이 되지 못한 괴물들이 모두 그 힘을 노리고 있다.
“허상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그게 아니야. 슐, 아니, 여행자. 너는, 트라크를 죽였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트라크라고 하심은…”
“절망을 먹고 사는 악마. 하페마나이스가 부리는 거수 말이야.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 놈에게 죽었어. 아마도 아리아도 그 놈에게…너한텐 정말로 감사해. 고마워, 여행자. 무능한 나 대신 복수를 해줘서.”
“아닙니다. 폐하.”
“고마워…아, 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구나. 미안해. 아무튼 너는 괜찮을 거야. 하페마나이스가 용들의 손에 죽었고 너는 트라크를 죽였으니까. 게다가 아스텔 말대로라면 너는 용들의 비호도 받고 있어. 그러면 충분하지.”
다음 순간, 아카시아는 카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확실히…너는 슐리펜이 아니구나. 용들은 슐리펜을 싫어했거든. 슐리펜의 핏줄 자체가 인간보다는 악마에 가깝다면서…아, 미안. 욕할 생각은 아니었어. 미안해.”
“아닙니다. 폐하. 그러면 제가 조심해야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시간 속에서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시간 속에서 저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왜 영혼들을 수집해 황금 가지를 숨겼겠는가.
“가지들 하나하나가 갈림길이야. 길을 잘못 든다면 다른 이의 영혼과 네 영혼이 겹쳐지게 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넌 강하니까, 설령 영혼이 겹쳐지게 되더라도 널 잃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누가 선택했는데.”
아스텔이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카시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맞아.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텔이 선택했는걸. 대신 사도들을 조심해.”
“…사도.”
“크라누스를 사냥하고 하페마나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인간. 탐욕의 신을 물러나게끔 한 인간. 이게 아스텔에게서 들은 너야. 그 어떤 신이나 사도도 너를 노리지 못해, 딱 하나 전쟁의 신을 제외하면.”
힘의 균형을 이루던 하페마나이스가 죽었다.
다만 더 큰 힘을 바라는 전쟁의 신이라면 당연히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즉, 전쟁의 신과 그 사도들 역시 자신과 같이 황금 가지를 찾기 위해 움직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신이나 사도들의 위협을 합친 것보다 전쟁의 신이 더 위험할 거야. 그 신은 이번에 모든 것을 걸었어.”
“…모든 것을? 그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것을 걸었다는 말인 즉,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승리로도 패배로도 끝나지 않은 700년 전과 다르게 말이다.
“성배가 실존한다는 걸 눈치챘어.”
아카시아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빨라졌다.
“체스판 밖의 플레이어. 왕좌 위의 옥좌. 꽃밭에 자라난 소나무. 모든 것을 뚫어내는 창. 그게, 성배야.”
“아카시아, 진정해. 천천히 설명해도 괜찮아.”
“아, 응. 알았어. 천천히, 천천히…체스에서 퀸은 좌우 위아래 대각선 어느 방향이든 움직이잖아? 그것도 원하는 만큼? 대신 나이트처럼 움직이진 못해. 퀸에게도 한계는 있는 거야. 하지만 성배는 퀸 이상의 체스말이야.”
“체스판 위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런 체스말입니까?”
“맞아, 맞아. 응. 어떤 말에게도 죽지도 않고 폰으로 승급도 시킬 수 있는 그런 존재. 수십 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 그들 위에 있는 군주 이상의 군주. 연약한 꽃들을 모두 말려 죽이는 소나무…모든 것들을 뚫어내는 창. 그게, 성배야.”
여전히 말은 빨랐지만 이해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떠한 절대적인 힘. 그 자체가 아닐까.
“전쟁의 신은, 그 개념 덕분에 무한히 강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700년 전에도 놈은 패배하지 않았다. 백색과 흑색의 용들. 죽음을 극복하고 ‘율법’ 같은, 강한 신들도 죽이는 힘을 가진 영웅들. 그들을 상대로 지지 않았다.
“성배는 그 개념마저 뛰어넘는 겁니까?”
“응.”
아카시아가 단언했다.
“황금 가지, 즉 성배는 절대적인 힘이니까.”
아스텔이 그녀의 말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 세계 자체의 힘이기도 하고.”
***
“전쟁의 신이 가장 강한 체스말…그러니까 퀸이라고 해도 결국 체스판 위에 놓인 체스말에 불과하니 전쟁의 신이 무한히 강해져도 세계 자체의 힘을 넘어서진 못한다는 거군요.”
“정확해.”
“그런데 하페마나이스는 황금 가지를 가졌으면서도 성배를 갖진 못하지 않았습니까? 전쟁의 신이 그걸 모를리 없을 텐데 왜 갑자기…”
거기까지 말한 카를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다름 아닌 카를 자신이 성배에 닿기 직전이었으니까.
“성배는 자격을 갖춘 자만이 가질 수 있어. 전쟁의 신은 그 자격이 뭔지 모르고 있었지. 우리도 제룡과 함께 만든 ‘열쇠’가 성배를 찾는 열쇠라는 사실은 몰랐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군요. 제룡이.”
“우리에게 성배를 가질 자격이 있을까 고민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결국 마지막 열쇠를 가지지 못했지. 하지만 너는 달라. 카를로스. 너에겐 기회도 있고, 자격도 있어.”
남은 것은, 시간을 극복하는 것뿐.
그것을 단단히 머릿속에 아로새긴다.
“잘못된 길에 들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침착하게 나아가.”
그런 아스텔의 말을 아카시아가 받았다.
“너의 현실은 단 하나. 다른 모든 것은 거짓. 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