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재시작 (3)
“완전한 끝이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영원의 기사는 다 깨진 투구를 벗어 던졌다.
파손된 갑옷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파편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존재. 타고난 검투사가 이제는 조금 인간처럼 보였다.
“어떻게 할 작정인지 물어도 되겠나?”
“간단해.”
카를이 손에 쥔 검, 전쟁의 신의 무기였던 그 날붙이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이 세상은 빌어먹게 합리적이거든. 힘이 있다면, 모든 걸 할 수 있어.”
특별히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를 자신의 이야기였다.
“이 세상에선 죽음조차도 절대적이지 않아. 힘이 충분하다면 영생을 살 수도 있고 힘만 있다면 죽고도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확실히 들었다. 카를의 의지는 ‘의지’의 힘을 상징하던 아스텔의 힘을 불러들였고, 그 덕에 다시 살았다.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죽음을 없던 일로 되돌리는 권능 역시 존재한다.
신이라는 족속은 정수를 찾아 파괴하지 않으면 불멸하고, 그 정수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없으면, 그리고 당대의 마왕마저 없는 날이 오면.”
당장 그 ‘정수’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그와 이시엘뿐이었다.
“그때 새롭게 강림할 신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어.”
만약 평범한 외적이 상대라면 문제는 없다.
제국은 견고하고, 흘러가는 역사를 담은 사서들의 기록도 잘 남아 있다.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
크로우 가문은 가문이 존재할 때부터 주어졌던 의무였던 제국의 수호를 아직도 뼈에 새기고 있다.
하지만 신들을 상대로는 불가능하다.
대비하고자 기억하고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니.
“이미 강한 신들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걸까. 전쟁의 신이라 불린 존재가 천천히 말했다.
“죽어서 다른 존재가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막대히 강한 힘을 남긴다.”
절망의 신이 그러했듯이.
“갓 태어난 신들이라도 불멸의 존재인 이상 막대한 강함을 자랑하지.”
자신의 검을 곁눈질 했다가 카를을 응시하며 그가 말했다.
“나의 무구는 그런 불멸의 존재들을 참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무기다. 그리고 그대가 가진 힘이 충분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신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런 방법이 아니야.”
“그러면?”
“법칙을 바꿔야지.”
하늘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신이라는 것들이 더 태어나지 않게.”
힘은, 충분하다.
이 세계, 그 자체의 힘을 가진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카를 자신이었으니까.
비록 반쪽짜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걸로.”
검을 들어, 땅에 내다 꽂았다.
억겁을 살아온 신의 눈동자에 당황이 깃든다.
말 그대로 천지신명이 진동했다. 다름아닌 천지신명 그 자체의 힘으로 인해.
“끝을 내자고.”
지옥이 열렸다.
칼끝으로부터 쪼개지기 시작한 대륙. 그것을 보자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의 물결이 발생했다.
“…아름답군.”
붉은 빛으로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미 작은 칼끝에서 시작된 균열은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었다.
“결국 그대가 바란 것은 이 세계의 멸망이었나. 카를로스 크로우.”
-무슨 짓을.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목소리 자체는 작지 않았지만,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 때문에 작게 들리는 듯했다.
언젠가 보았던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왜, 이런 짓을.
“내가 이런 짓을 할 줄 몰랐어?”
-알고 있었어요.
아나스타시아에게 들었다. 만약 그녀를 잃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보았다고.
저 소녀가 그녀에게 보여주었겠지.
-다름 아닌 당신의 연인이 말했어요! 당신이 이러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그리고, 용들도 그걸 인정했는데! 당신은 정녕 그들의 기대를….
시끄럽게 떠드는 소녀를 뒤로 하고 카를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새하얀 빛을 내뿜는 구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 * *
“폐하! 큰일입니다! 좌측 계단마저 무너졌습니다! 괴한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제 남은 곳은 우측뿐인데…!”
“호들갑 그만 떨어라. 이놈아. 정신 사납다.”
“윽?”
딱. 가느다란 손가락이 호위대장의 이마를 때렸다. 황제는 나른함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매화 공작.”
“네. 폐하.”
“어찌하면 자네도 이 녀석도, 그리고 짐도 몸 성히 나갈 수 있겠는가.”
황제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깨진 창문에선 거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완벽한 환경이 유지되는 황궁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상황이 아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발키리.
전쟁신의 사도가, 황궁을 습격했다.
“짐은 천수를 누리고 죽고 싶구나.”
“걱정할 필요 없어요.”
“흐응….”
“호위대장?”
대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화초.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아나스타시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중앙 계단을 점령한 적의 수는요?”
“여섯 내지 일곱이었습니다. 불길이 곳곳에 번져 있어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섯 내지 일곱….”
“많구나. 저 계단에만 여섯이라.”
황실, 아니 제국의 모든 기록을 볼 수 있는 그녀다. 숨겨지지 않은 전쟁신의 기록을 보았다.
혼자서 일당백의 힘을 낼 수 있는 사도가 중앙 계단에만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공법이 제일 낫겠구나.”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가 시선만 더 끌게 분명했다. 그리고 시선을 잘못 끌면, 죽는다.
전쟁신의 사도들은 철저히 전쟁을 수행한다. 무언가 저들만의 진법을 짠 것일 터.
진법은 풀어낼 방법이 없다면 정공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놈아. 저것들을 뚫어낼 수 있겠느냐?”
“그, 그것이….”
호위대장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됐다. 개죽음이 될 뿐이다. 백매화 공작, 그대는 가능하겠나.”
“네. 폐하.”
“호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폐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짐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엇을 하면 되지?”
“폐하께서 앞선으로 나서주셔야 해요.”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호위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제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앞선으로 나서야 한다? 왜지?”
“저 발키리들은 폐하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그대를 노리는 것은 아니고?”
“그랬다면 황궁이 아니라 다른 곳을 집중적으로 찾았을 거 에요. 의도적으로 통로를 차단하고 황궁을 수색하고 있는 건 폐하를 찾기 위해서죠.”
“옳은 추론이로군. 그래서?”
“저는 솔직히, 카를처럼 잘 싸우지 못해요.”
“그야 당연한 게 아닌고. 아무나 그자처럼 싸우면 개나 소나 ‘제국 최강’이었을 게다.”
흠흠. 헛기침을 한 황제는 아무튼, 하는 말과 함께 물었다.
“이어서 말해보아라.”
“딱 한순간만, 폐하께서 시선을 끌어주시면 끝낼 수 있어요.”
“폐, 폐하의 옥체에 흠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펠하임 공, 차라리 다른 방법을….”
“그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가벼운 한숨을 내쉰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그녀의 선언에 아나스타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대장 역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는고?”
“중앙 계단을 향해 걸어가주세요.”
“그게 다인가?”
“네.”
“쉬운 일이군.”
펄럭. 황제가 팔을 쭉 뻗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황제는 패기가 넘쳐흐르는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복도에 깔린 붉은 카페트를 망설임없이 밟으며 황제는 중앙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에선 품격이 느껴졌다.
그 순간 철컹, 하고 무거운 쇳소리가 났다.
“흡…!”
“조용히 하지 못할까.”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신의 사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
그에 당황한 호위대장이 겁먹은 숨을 집어 삼키고 무어라 말하려 한 순간, 황제가 그것을 미리 일갈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해서 중앙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이 늘어났다. 쇳소리 역시 늘었다.
곧 창을 쥔 강철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내는 발키리들. 개중 몇몇이 창을 들었다. 그리고 곧장 황제를 향해 그것을 투척했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과 싸우는데 있어 인질을 남길 이유 따위, 그들에겐 없었으니까. 중요한 인간이면 빠르게 제거한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한 사도들의 생리를 몰랐던 호위대장은 경악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오호라.”
그 용기에 황제가 감탄한 순간이었다.
호위대장보다 한 걸음 뒤에 있었던 아나스타시아의 손가락 끝에서 빛이 번뜩였다.
어마어마한 열량을 품은 화염이 그 손끝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복도를 가득 채웠다.
화마가 호위대장은 물론이고 황제를, 그리고 사도들이 내던진 창과 사도들마저 모조리 삼켰다.
“허….”
날아들던 창이 화마에 녹아내렸다. 아연실색한 호위대장은 자신도, 황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기이한 일에 놀라기에 앞서, 사도들을 향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철갑에 둘러싸여 있었던 사도들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무슨 이런 신묘한 마법을….”
“아무리 허구적인 상상도 현실로 만들 수 있거든요. 그게 마법이라고, 그랬어요. 태우고 싶은 걸 태우고 살리고 싶은 걸 살리고….”
“말은 참 쉽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뿐. 부부가 쌍으로 짐을 놀라게 하는구나.”
타고 남은 잿가루가 공중에서 나풀거렸다. 손을 휘저어 잿가루를 떨쳐낸 황제가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잘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을 거 에요.”
“저것들의 우두머리에게 당할 것 같은가?”
“그럴리가요.”
“확신이 깊구나. 무슨 신앙 수준이로고….”
“그런 사람이니까요. 제, 신랑은.”
“좋을 때로고. 그 마음이 한결 같으면….”
“…….”
황제가 한참 말하던 도중 아나스타시아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의 틈을 두고 그녀가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부터 쿠르르릉, 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건, 또 무슨.”
지진이 하늘에서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은 미약한 진동이 대기를 흔들었다. 시야가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황제가 말했다.
“무슨 일인가. 백매화 공작.”
“카를한테 연락이 왔어요.”
“뭐라고 하는가?”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놀라지 말라고….”
아나스타시아가 그렇게 말한 순간.
복도의 창문 너머로 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퍼어엉!
폭음과 함께 길게 늘어진 복도의 유리창들이 산산히 깨져 나갔다.
태어나서 제일 빠른 속도로 내달리며, 그 복도를 지나가려고 했던 유리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꺄악?!”
“소녀 같은 비명을 지르는군.”
“소녀 맞거든!”
“혼기도 다 찬 여인이 무슨.”
턱! 깨진 유리창 끝을 짚는 철갑을 두른 손가락. 난데없이 저택을 습격한 적이었다.
곧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창틀이 우그러지며 정체 모를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철갑으로 두르고 창을 손에 쥔, 날개 달린 전사.
이시엘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발키리’였다.
“나, 이제 스물둘이거든! 그리 늦은 편도 아니야! 그래서 너는 몇….”
섬뜩. 홧김에 내뱉은 말에 반응해 살기 섞인 눈길을 보내는 마왕의 모습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며 숨을 삼켰다.
앞에 있는 적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이 마왕한테 죽을 것 같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아무 말도 안했다만.”
“그냥! 내가 다 미안하니까!”
스르릉. 잘 벼려진 칼이 뽑혀져 나오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한 발키리를 가리키며 유리아가 외쳤다.
“가만히 있지 말고 저거 좀 어떻게 해봐!”
“그러지.”
직후, 유리아가 느낀 것은 무언가가 ‘쏘아졌다’라는 것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아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찰나가 흐르자, 바로 옆에 있었던 마왕이 쥔 창이 철갑 째 발키리의 몸을 꿰뚫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이상하군.”
“뭐, 뭐가?”
“전쟁의 신은 죽었다. 아니, 죽은 것은 아니어도…최소한 힘을 상실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느껴진다.”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절명한 사도의 몸에서 창을 뽑아낸 이시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리아가 똑같이 창밖을 보고는 물었다.
“그러면 저것들은…왜 여기 있는 거야? 쟤네 전쟁의 신 부하라며.”
다른 발키리들이 저택을 에워싸고 있다. 한둘이 아니다. 족히 열은 넘는다.
시야의 사각까지 고려하면 스물도 넘을 것이다. 신의 사도가 스물. 말이 안 되는 수였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엥?”
“제가 섬기는 신이 죽거나 힘을 잃으면 사도들은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저것들은 아직도….”
쿠르릉! 갑작스레 들려온 천둥소리에 이시엘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
“아직도 뭐! 왜 말을 하다 마는 건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뭐? 뭘?!”
“저것.”
그녀의 손가락이 하늘에 낀 먹구름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먹구름 뒤에 드리운 불그스름한 빛을.
“저기에서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
“전쟁신의 그것과 비슷하다. 설마, 카를로스 그가 패하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분명 전쟁신을 끌어들여 홀로 요격하려 했는데, 여기에 그 전쟁신이 나타났음은….”
“아니야.”
빠드득, 어금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유리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이시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죽을 리가.”
“맞아. 너도 알면서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저건, 그 신이 아니라 다른 이상한 신일 거야.”
-발버둥 치는 꼴이 아주 우습구나!
불손하기 짝이 없고, 오만한 목소리가 하늘로부터 쩌렁쩌렁 울려왔다.
-무엇을 위해 그리도 발버둥 치느냐! 결국 너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불쾌하군.”
“…….”
“저건 무엇이지?”
벌레라도 씹었다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은 이시엘이 내뱉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전쟁신을 닮았다. 먹구름 뒤에 숨은 불그스름한 빛이 커지면 커질수록 특유의 존재감 역시 커져갔다.
-자아, 나의 사도들이여! 전쟁의 진수를 저 무지렁이들에게 보일 시간이다! 저 잡것들이 ‘전쟁’을 알게 하라!
“전쟁신이군.”
“그, 그럼….”
“아니.”
창을 붙잡고, 기억을 되새긴다.
결연했던 아비의 표정. 담담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했던 그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제룡은 가능성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죽는다.
그리고 자신은 전쟁신이 자격을 갖추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죽는다.
전쟁신은 신이면서도 인간이어서, 그리고 아득히 오래 전부터 자격을 갖춘 존재여서….
제룡의 죽음으로 성배가 현현되면, 높은 확률로 카를로스 크로우보다는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될 확률이 높다, 라고.
“저건 전쟁신이 아니다.”
도대체 성배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결국,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아비는 죽었다. 그렇다면 성배는 카를로스 크로우의 손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까마귀 공주.”
“알아. 제도에 연락을 해볼게.”
“그동안 나는 저것을 죽이겠다.”
발키리가 저택을 습격하기 몇십 분 전, 아나스타시아가 보낸 전령이 와서 미리 습격을 알려주었다.
그 전령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버텨내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유리아는 저택 내에서 언제 침입해올지 모를 발키리들에게 대비하고 있는 집행관 중 한 명을 워프 게이트로 보냈다.
그녀가 받은 대답은, 정확히 다음과 같았다.
“…놀라지 말고 기다리라고?”
분명 안나한테서 받아온 대답인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리아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하늘로 향했다.
무언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아.”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간 것은 커다란 균열이었다.
하늘을 반으로 쪼개놓고, 먹구름 뒤에 숨은 붉은 빛마저도 쪼개 놓은 모습에 유리아는 입을 헤벌린 채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