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27
27화 역병 (2)
“뭐 하느라 이제 왔어!”
리안을 다스리는 캐모마일 자작이 집행관들을 위해 마련한 임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 마차에서 먼저 내리려던 사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카를을 돌아보았다.
“어… 우리 늦게 온 거야?”
“흠.”
카를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사라를 대신해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헉, 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가, 각하?! 죄… 죄송합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를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차석 집행관 테나였다.
“내가 늦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럼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늦는 모양이군. 사정을 설명해 줄 수 있나?”
“예! 그게, 제가 임무를 맡겨 둔 집행관 알타냐가 원래 어제 돌아와야 했는데 이틀 넘게 연락도 없어서… 깃발을 보고 착각했습니다!”
긴장했는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카를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오해할 만했군. 이해한다.”
“가, 감사합니다…?”
“그건 되었으니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싶군.”
“아. 예!”
얼빠진 얼굴이었던 타냐는 고개를 몇 번 흔들어 표정을 고쳤다.
차석 집행관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병의 첫 발견은 이곳에서 도보로 6일 정도 걸리는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었습니다. 저쪽, 저기에 보이는 산입니다. 최초 발견자인 집행관 카스에 의하면, 이미 절반 이상의 주민이 병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절반이나?”
“산에 주민들이 쓰는 온천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다 같이 옮은 것 같다고… 그래서 저희는 그 병을 일단 온천병이라고 부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집행관 알타냐가 진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온천병이라… 알겠다. 최초로 발견한 집행관은? 괜찮나?”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그게, 돌림병임을 늦게 파악해서….”
타냐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 온천병에 감염된 마을의 사냥꾼들이 산 아랫마을에 사냥감을 팔러 나갔고… 그 이후로는 감염 경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첫날 보고서에만 14개 마을에서 환자가 나왔다고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지?”
“총 38개 마을에서 612명의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각하. 이 도시에서도 어제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시대이기에, 한마을에 사는 인구가 얼마 안 되고 마을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심각했다.
“…다른 마을에 시집간 딸을 두고 있는 노인인데, 딸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와서 이틀이 지난 어제부터 몸져누웠다고 합니다.”
“잠복기가 있는 모양이군.”
“딸이 시집갔다는 마을까지는 거의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어제 증상이 나타났으니…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일단 그 노인은 집 안에 격리하고 저희가 식사를 챙기고 있습니다.”
“…….”
안 그래도 전염성이 높은 병인데, 잠복기까지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카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도시가 병에 삼켜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인데, 사망자가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다만 젊은 사람은 잘 견뎌도 노인 중에는 상태가 위중한 환자가 몇 명 있습니다.”
“…알겠다.”
이해와 분석. 두 가지 특성이 작용하며 미약한 두통을 일으켰다.
특성이 이루어 낸 인위적인 상황의 파악. 직후, 나머지 한 가지 ‘사고’ 특성 또한 작용했다.
사고 특성을 기반으로 결론 내린 최적의 대처는, 일단 그 노인을 만난 사람들을 전부 다 찾아 격리시키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세상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
최선책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리안의 특수한 지리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차석 집행관. 자작을 불러오도록.”
“네!”
테나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 뒤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아직 젊었지만, 차석 집행관이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직 사라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어서 시선을 옮기자, 뭔가를 꼼지락대고 있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있냐.”
“응? 아, 선배도 하나 할래?”
“……마스크?”
실험할 때 손이 자주 더러워진다면서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목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마스크라기보다는 도적들이 쓰는 복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라가 시킨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하겠다고 한 건지 칼리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거 감기처럼 옆에서 숨만 쉬어도 옮아. 벌써 육백 명이나 걸렸고 이 도시에도 환자가 있는 거면 이런 거라도 해야 해.”
“그런 얇은 천으로는 못 막아. 의미 없는 짓이다.”
“윽. 그래도….”
“굳이 말리진 않으마.”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 뚱뚱한 남자가 테나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리안의 시장, 캐모마일 자작이었다.
황제에게 작위를 하사받은 귀족이 아니라 크로우 가문으로부터 받은 귀족이다.
크로우 가문의 신하나 다름없는 자였다.
“오, 오셨군요. 제가 미리 마중을 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공작님.”
“됐다. 자작. 급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예, 예.”
카를은 몸을 돌려서 집행관들의 임시 숙소로 들어갔다.
말이 임시 숙소지 원래는 캐모마일 자작이 지내던 시장 청사였다.
리안에서 가장 큰 건물. 자작은 집행관들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시청을 내어 주었다.
“일동!”
청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뒤에서 테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함께 분주히 움직이던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크로우 가문에 소속된 집행관들. 그리고 그 집행관들을 보좌하는 인력들로, 눈대중으로 대충 봐도 50명은 훌쩍 넘었다.
“각하께 경례!”
그들 모두가 카를을 향해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한창 군 생활을 할 때 계룡대에서 날아온 쓰리 스타에게 경례했을 때가 떠올랐다.
‘허.’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자신이 어느 위치에 올라와 있는지 똑똑히 자각할 수 있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카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고가 많다. 하던 일들을 마저 하도록.”
경례 자세를 푼 집행관들이 원래의 업무로 돌아갔다. 카를은 청사 1층의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를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도시 한가운데의 시청이 위치한 광장을 중심으로, 기다란 대로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 있었다.
“캐모마일 자작.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위병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그게… 열여섯 명입니다. 공작님.”
“열여섯 명.”
“이, 일단은 그렇습니다. 지금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고 그래서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습니다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많고 적음을 논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것이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열여섯 명.
그 숫자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카를은 고개를 들어 계속해서 지도를 살폈다.
리안의 인구는 대략 천 명.
시골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크지만, 그렇다고 도시라 하기에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커다란 시장 청사까지 따로 지어져 있을 정도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 도시다.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지 외곽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왜 투자를 했는가.
카를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작,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 도시는 원래 전시를 대비해 지어졌다는데, 맞나?”
“예? 아. 예. 비상시에 군사 기지로 쓰기 위해서… 예. 그렇습니다.”
자작이 소매로 제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짐작한 대로였다.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도시가 먼저 지어지고 사람이 모인 것이다.
흡사, 바로셀로나를 떠올리게 하는 정돈된 도시의 지도를 보며 카를이 입을 열었다.
“차석 집행관. 아까 말했던 그 노인의 집은 어디인가.”
“이곳입니다. 각하.”
카를은 테나가 손을 뻗은 곳을 유심히 살폈다.
도시의 남서쪽 외곽 지역이었다.
집 안에 바로 격리시켰다고는 하나 이틀 동안 병에 걸린 채 돌아다녔다.
누구를 만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중에는 병이 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찾아 격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다른 방법은 가능했다.
“캐모마일 자작. 대로를 기준으로 해서 도시를 구획별로 나누는 건 어떻겠나.”
“……예?”
“그 노인은 이틀 동안 자신이 병에 걸린 줄 모르고 있었다더군. 환자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올 테니 차라리 아예 분리해서 관리하지.”
“아…!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환자가 나온 구획만 따로….”
“아니.”
아예 작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
“도시를 통째로 폐쇄해서 외부 유입과 도시 내부의 구획끼리의 이동까지 차단하고 따로 관리하자는 말이다.”
“예…? 그, 그러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나,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 그러니까 백성들의 생업은….”
“내가 책임지겠다. 치료제는 내가 개발할 것이고, 늦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 지금은 최대한 환자를 적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재정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더군다나 돌림병이 퍼지면 황실에서 그 지역에 따로 자금을 지원해 준다.
황실의 인력이 파견되면 자금은 다수 회수되지만, 그럴 걱정은 없다.
그러니 재정을 꽤 소모하더라도 충당이 가능할 것이다.
“이미 다른 마을은 이동 자체를 통제하고 있다고 들었다. 내 말이 맞나, 차석 집행관?”
“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집행관이 마을 간 교류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노인도 저희 통제에 따라 딸이 사는 마을에서 리안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군. 자작. 위병들을 시켜 도시의 출입구를 한 곳만 제외하고 모두 막게. 가능하다면 워프 게이트도 봉인하고.”
“알, 알겠습니다!”
캐모마일 자작이 무거운 몸을 끌고 청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병에 전염된 이의 동선을 추적하는 건 어려워도, 이동 수단이 제한된 세계에서 마을 간의 이동을 차단하는 건 가능하다.
이 이상의 조치를 한다고 해도 더 큰 효과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차석 집행관 당부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다만 이 조치는 병의 전염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어도,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잘 따라도 나중에는 통제를 벗어나는 이들도 나오겠지. 부딪히는 일이 있더라도 부드럽게 대처하도록.”
“예. 이해했습니다. 각하. 다른 집행관들에게도 말을 전해 두겠습니다. 또 따로 내리실 명령은 없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마차에 실어 둔 장비가 있는데 그걸 가져와 주게.”
“알겠습니다.”
차석 집행관이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청사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옆에 서서, 카를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사라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이제 죽든 살든 치료제는 만들어야겠네. 증상도 조사해야 되고.”
“…미안하다. 이런 곳에 억지로 끌고 와서.”
“아냐. 뭐… 나도 꼬맹이 때 선배 도움 많이 받았으니까 그거 돌려주는 셈 치지 뭐.”
“그래.”
크로우 공작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으니.
이젠 마법사 카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차례다.
“한번 해 보자.”
* * *
“대문을 폐쇄하라굽쇼?”
“그, 그래.”
“어… 나리. 이쪽 대문을 닫아 버리면 농부들이 밭 갈 때 쭉 둘러서 가야 하는데, 진짜로 닫습니까?”
리안의 동쪽 대문.
캐모마일 자작의 명령에 한가하게 카드를 치고 있었던 위병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진짜로 닫아라. 그, 그리고 앞으로 대문을 지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집으로 돌려보내고.”
“예?”
“벼, 병 때문에 그렇다. 돌림병이 돈다는데 농사지을 재간이 어디 있겠느냐.”
“아, 그거 말입니까? 일단 닫기야 하겠습니다만 그거 뭐 사람 죽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별거 아닌데 대문까지 닫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다, 닫으라면 좀 닫아라. 이것들아.”
캐모마일 자작이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바지에 비벼 닦으면서 말했다.
위병들은 손에 들고 있었던 카드를 내려놓고 거대한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 대문을 열지 못하도록 거대한 나무 막대를 걸어 잠궜다.
정확히는, 잠구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막대를 걸려던 병사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 목소리 같은 게 들린다 싶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뭐, 뭣 하고 있느냐. 이놈아. 빨리 닫아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나리.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소리는 무슨. 환청이니 무시하고….”
쿵쿵쿵!
캐모마일 자작이 성질을 낸 순간,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자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작이 새파래진 얼굴로 말했다.
“무, 문을 한번 열어 보거라.”
“아, 예.”
병사들이 걸어 두었던 나무 막대를 다시 들어 올리고,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풀썩.
대문이 열린 순간 문을 두드린 게 분명한 사람이 힘없이 쓰러졌다.
“헉…?!”
순간 깜짝 놀란 캐모마일 자작은 숨을 가라앉히고 쓰러진 여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설마 돌림병에 걸린 환자인가? 그런 생각에 노심초사하며 고개를 숙인 자작은, 깜짝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여성의 가슴에는, 크로우 가문의 집행관임을 뜻하는 까마귀 모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