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47
47화 황제의 탄신일 (4)
저녁이 되어 노을이 깔린 하늘의 주황빛을 받은 백발이 흔들렸다.
아나스타시아가 서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약속 있다면서. 벌써 끝난 거야, 안나?”
“벌써라니? 지금 저녁이야, 유리. 약속은 오후에 끝났어.”
“아… 그랬구나.”
팔짱을 낀 아나스타시아가 유리아를 향해 말했다.
“나한테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지 않았어?”
“오늘 바쁘다고 들어서.”
“아무 기별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도 아닌데, 미리 말해 줄 수 있었잖아.”
“그… 그렇지.”
“내가 오늘 오후에 갑자기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유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미안. 미안해, 안나. 내가 나중에 꼭 따로 사과할게. 알겠지?”
그녀는 카를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그리고는 멋쩍게 웃으면서 서둘러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본 아나스타시아의 입에서 하아, 한숨이 흘렀다.
카를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아나스타시아.”
“네. 저도요. 그나저나 유리아처럼 안나라고 불러 주시지 않겠어요? 제가 당신을 카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안나.”
“네. 그렇게… 아?”
머리핀이 담긴 함을 내밀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카를은 짧게 덧붙였다.
“…선물이다.”
마수 인자를 제 몸에 이식할 생각을 했었던 매드 사이언티스트 카를로스나, 본래의 정현은 모두 연애에 관심이 적었다.
뭔가 따로 할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입이 안 떨어졌다.
“고, 고마워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새삼, 지금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빠르거나 늦어서, 해가 남아 있거나 거리의 등불이 켜졌다면 자신의 표정이 드러났을 테니까.
“지금 열어 봐도 괜찮다.”
“…그럴, 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꽃 모양 머리핀.
아나스타시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머리핀을 착용했다.
“어때요?”
“아름답다.”
“…제가요? 아니면 이 머리핀이?”
“안나, 네가.”
“읏.”
만약 둘 다라고 답하거나 애매하게 대답했으면 살짝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물어본 자신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대답이었다.
“으음… 이런 선물을 받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마음에 안 드나?”
“아뇨. 그 반대죠.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나스타시아는 머리핀을 매만졌다. 살짝 투박하지만, 그것마저도 매력이었다.
“선물을 받았으니까 저도 답례를 해 드려야겠죠?”
“답례?”
“네, 카를. 다음 주에 있을 탄신일 축제에 무투 대회가 열린다는 건 알고 있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자신이 바로 그 무투 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기까지 했다.
“그거, 저희 오라버니가 입안한 거예요. 폐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셔서 통과한 거고요.”
“…알고 있었다.”
“어라? 정말요?”
게임 내에서 무투 대회는 플레이어가 선택해서 개최할 수 있었다.
그 대회의 우승자는 플레이어의 휘하에 종속되기 때문에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모를걸요? 어떤 사람이 황궁에 찾아와서 그 대회에 참가하겠다면서 난동을 부렸다나 봐요. 황제 폐하는 참가하는 걸 허락했고요.”
플레이어가 아닌 이번 황제의 성격이 조금 독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다음이 이상했다.
“근데 황제 폐하께서 그 사람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어떤 걸 주겠다고 하셨는지 알아요?”
“폐하의 휘하로 삼겠다고 하셨나?”
“아뇨. 수준에 맞는 마법사랑 싸울 기회를 주겠다고 했어요.”
“…….”
수준에 맞는 마법사.
무려 황실에서 개최하는 대회이니 제국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모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대회에서 우승하면 곧 제국에서 제일가는 강자라는 뜻이다.
“우승자랑 수준이 맞는 마법사면…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겠죠? 그런데 탑주들은 올지 안 올지도 불분명하니까 탑주는 그 대상이 아닐 테고….”
“설마.”
“아마 그 설마가 아닐까 싶어요. 카를 당신은 초대장도 받았고, 일단은 폐하의 신하라서 명령을 내리시면 거절할 수도 없죠. 또 탑주들 다음가는 마법사라는 소문도 자자하고요.”
카를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참가하지 않겠다고 그리 강하게 말했거든, 황제는 억지로라도 자신을 시험해 볼 요량인 듯했다.
“어때요? 답례가 좀 되었나요?”
“그래. 덕분에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아, 카를 저기 봐요. 달이 떴네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이 노랗게 떠 있었다.
이미 노을이 지고 사방이 어두워진 것을 깨달은 카를이 말했다.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있는 걸로 아는데, 괜찮나?”
“에이, 누가 이사장 막내딸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도 너무 늦으면 안 되니까 들어가 봐야겠네요. 그런데 카를 탄신일 축제가 끝나면요,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래.”
“어라? 생각보다 쉽게 수락하시네요.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나스타시아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핀과 더불어 의외의 일면이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면서 카를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넥타이 비뚤어졌네요. 고쳐 줄게요.”
한 발자국 다가온 그녀는 카를의 넥타이를 고치다 말고 갑작스레 힘을 주어 확 잡아당겼다.
카를의 상체가 기울어지자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키 차이를 좁혔다.
“……아나스타시아.”
“안나라고 불러도 된다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살갗이 닿은 순간,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 그녀의 몸 안에서 느껴졌다.
뒤틀린 마력… 비슷한 것일까.
사도를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도 놀란 나머지, 카를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나스타시아는 쿡쿡 웃었다.
“어머, 당황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요.”
“언제 이런 걸… 설마, 부탁이라는 게.”
“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속삭임으로 대답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거든요.”
“……왜 진작 말하지 않고.”
“그야 당신은 저한테 파혼을 제안할 만큼 마음이 떠나 있었으니까요?”
할 말이 없는 대답이었다.
카를은 입을 다물었고, 아나스타시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유리한테는 비밀이에요. 알겠죠?”
직후, 그녀는 자신이 잡아당긴 탓에 더 크게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주었다.
그때 거리에 설치된 등불이 켜졌다. 그러자 학원 담장을 엄폐물 삼아 자신들을 훔쳐보던 이름 모를 영애들과 카를의 눈이 마주쳤다.
“보는 시선이 있었군.”
“괜찮아요. 눈치가 있으면 설마 소문을 내진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뒷걸음으로 멀어졌다.
“탄신일 축제 때 봐요, 카를. 선물 고마워요.”
* * *
다음 날.
카를은 일출과 동시에 황궁으로 향했다. 가문을 상징하는 배지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경비병들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림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볼레르가 곧장 마중을 나왔다.
“어쩐 일이신지요, 공작? 오늘은 접견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를 뵈어야겠다.”
“아, 지금은 조금 곤란한…….”
“지금 당장 폐하를 뵈어야겠다. 볼레르.”
카를은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제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고, 아직 정무는 시작할 시간이 아니었다. 접견에 문제는 없었다.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황제는 입장상 카를 자신의 무례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
전후 사정을 아는 볼레르 또한 강하게 반대하진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곧장 올라가서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볼레르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5분이 채 안 되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기록 보관소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카를은 그를 따라 황궁의 계단을 올라갔다.
기록 보관소가 위치한 5층에 오른 그는 볼레르를 제치고 먼저 복도를 걸어 보관소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
황제의 목소리였다. 카를은 기록 보관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공작. 지금 당장 급하게 짐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더냐.”
“…폐하께서 계획 중이신 무투 대회에 대한 건입니다.”
“호오라, 무투 대회라. 공작은 참가하지 않겠다 하지 않았는가? 혹,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느냐?”
“폐하.”
지금의 행동은 불경죄로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짓이었으나 황제는 분노하기는커녕 부드럽게 말했다.
“알고 있다. 그대가 어찌하여 짐을 이리도 급하게 찾아왔는지. 펠하임에게 들었느냐?”
“……예.”
“전적으로 짐의 잘못임을 안다. 그대의 말마따나 공작 그대는 싸움꾼도 아니고 광대도 아닌데, 짐이 싸움을 시키려 하였다. 지금 그대의 행동은 정당한 의견의 표출임을 이해한다. 앉거라. 나름대로 설명을 해 줄 터이니.”
카를은 그녀의 말에 따라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읽던 책을 덮은 그녀가 말했다.
“며칠 전, 기이한 검사가 짐을 찾아왔다.”
“…예. 폐하.”
“감히 하사받지도 않은 이명을 내세우며 무투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더구나. 그래서 짐은 기회를 주었다. 짐의 호위 기사와 싸워서 이기면 대회에 참가하게 해 주겠다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살 났다. 짐의 기사 쪽이 말이다. 오러를 보통 잘 다루는 자가 아니더구나.”
있지도 않은 이명을 내세우며, 황제의 기사를 꺾은 검사.
황제가 한 말만 가지고도 그가 누구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검귀, 아담이었다.
“그 기사 놈은 과거에 삼중술사와 결투를 해서 이긴 적이 있다. 짐이 알기로는 공작 그대도 삼중술사다. 다른 모든 요소를 제쳐 두고 단순히 이론으로 따지면 그 검사가 공작 그대를 이길 테지.”
“…예.”
이론상이 아니라, 실제로도 이길 것이다.
아담은 네임드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무력을 지닌 캐릭터였으니까.
특히 그 힘이 정점에 달하는 시나리오 후반부에서는, 단신으로 용을 죽이는 경지에 이른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달리 말하면 그 검사는 그대의 전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상대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짐은 그것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전력. 카를로스 크로우라는 마법사의 전력이.”
“……꼭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저는 폐하께 제 전력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보여 주기 위한 것을 보는 것과,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다르지. 짐이 그대의 전력이 보고 싶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희미한 마력의 빛이 새어 나왔다.
카를의 눈이 커졌다. 설정상 플레이어, 즉 황제는 마력을 다루지 못했으니까.
“북방의 마족들이 내분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예. 이미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내분이 끝나면 벌어질 일이 학살, 혹은 전쟁이라고 분석했지. 그리고 높은 확률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도. 짐은 펠하임에게 들어 알았다.”
황제의 마력은 곧 염동 마법이 되었다. 서가의 한구석에서 종이 뭉치가 둥둥 떠서 책상 위로 올라왔다.
“펠하임 녀석의 비밀정보부가 분석한 자료다.”
“…저에게 보여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그 녀석이 짐에게 주었다. 짐의 것이니, 어떻게 사용하든 짐의 마음대로지. 아무튼, 이 자료를 보아라.”
카를은 황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을 보았다.
“마족들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에, 제국은 멸망에 이르거나 그에 준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공산이 크다.”
“…….”
“지금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지만 그리 먼일도 아니다. 길어야 3년이다. 고작 3년이면 칠백 년을 존속해 온 제국이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카를은 그녀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느꼈다.
짜증, 분노, 귀찮음 따위의 감정을 드러낸 적은 있어도 공포를 드러낸 적은 없었기에.
“짐은 두렵다. 카를로스 크로우.”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 제국이 짐의 대에서 멸망하는 것이 두렵다. 역사가 짐을 정녕코 암군이라 칭하는 것이 두렵다. 대신들의 눈치만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허수아비라 불리는 것이 두렵다. 후대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지탄하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황제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두렵다. 이 땅에 이리도 큰 제국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그 제국에 수많은 황제가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두렵다.”
현재의 황제는 플레이어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렵다. 플레이어가 아니기에, 그리고 이 세계는 현실이기에 그녀는 대신들과 끝없이 권력 다툼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황제가 제국을 호령하기도 전에 마족들이 들고 일어서, 사람을 태우고 땅을 짓밟을 것이다.
그것이 이 세계의 결말.
정현이 보았던 수많은 게임 오버였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황제.
그녀가 필사적으로 카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카를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많아서였다.
“짐은 그대의 강함을 보고 싶다.”
황제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제국 최강의 검사를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 그대가 그 누구보다도 강하여서, 짐의 앞에서 제국을 지킬 수호자로서 우뚝 서 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정녕코 제국이 이 종이 쪼가리의 내용처럼 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해 주었으면 한다.”
하아.
숨을 내쉬어 평정심을 되찾은 황제가 말했다.
“단지 그것을 바랄 뿐이었으나 마음이 급해져 그대의 뜻도 묻지 않고 일을 진행해 버리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카를로스 크로우.”
“…아닙니다, 폐하.”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멸망을 막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카를 자신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황제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그는 확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