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악의 (2)
“솔직하게, 말할게요.”
두 사람은 함께 황궁에서 빠져나왔다. 붙잡는 사람은 없었고, 수행원들은 고개를 돌려 못 본 체하기 바빴다.
하늘이 별 무리로 빛나는 어두운 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한테 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건가? 가문이나,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셈이죠.”
아나스타시아가 허심탄회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당신 가문에 첩자를 심어 둔 거고요. 알고 있었죠?”
“…그래.”
“어쩐지, 제가 심어 둔 시종을 제도까지 데려온 이유가 그래서였군요.”
지금은 제도의 교외에 위치한 별장에서 짐을 관리하고 있을 시종.
카를은 그 시종이 아나스타시아의 사람이라 추측하고, 데려왔다.
제도에 온 이후로도 모종의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그녀는 그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시종한테서 자기가 제도에 있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 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정보를 원했으면 칼리테가 비밀정보부를 파견했을 테니까.”
“아아… 맞네요.”
“다른 정보가 아니라 내 소식만 원했던 거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카를의 말을 들은 아나스타시아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되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아서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다른 귀족들은 그렇거든요. 역시 당신은 조금 다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나스타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목소리.
속삭임이 닿는다.
“봐요.”
“…….”
“심장 소리가 그대로잖아요.”
짧게 한숨을 쉰 그녀의 눈에 분하다는 기색이 서렸다.
치켜뜬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던 아나스타시아가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카를. 다른 귀족들은 제가 눈웃음만 지어도 정신을 못 차려요. 좀 오만한 말이긴 한데 정말이에요.”
“…….”
“저번에 당신이 학원에 찾아왔을 때 제가 당신한테 한 말을 다른 사람한테 그대로 들려줬으면 그 자리에서 말을 바꿨을 걸요?”
그녀는 검지로 제 뺨을 짚으면서 말했다.
만약 원래의 정현이라면 그녀의 말마따나 ‘반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나, 매혹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놈의 연심이 원래 다른 데 가 있어서인가.’
카를로스의 기억과 감정은 그 몸에 빙의한 정현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또한 그 여파일 것이다.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했네요.”
“…도움이 필요했으면 그냥 말하면 될 텐데.”
“당신이 특수한 경우라는 걸 제가 잊고 있었어요. 다른 귀족들은 도와 달라고 말해도 도와주는 경우가 없거든요. 보통은 이리저리 뜯어보고 상황을 살펴보다가… 그러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라고 되묻죠.”
어느새 두 사람은 황궁을 둘러싼 귀족들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황궁 안에서 탄신일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린 것처럼, 황궁 바깥에선 제도의 주민들이 오늘만은 황제에 관련된 소문을 잊고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저한테 홀딱 빠지게 만들죠. 그럼 도와 달라고 하면 눈이 돌아가서 자기한테 돌아가는 게 없어도 저를 도와주거든요.”
짐짓 불만스러운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권력도 있고, 마법도 잘 쓰겠다. 저 하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당신은 그런 오만한 귀족들이랑 다르다는 걸 잊었어요. 그냥 진심으로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는 사람인데.”
“…….”
귀족들의 화법은 이런 건가.
머리가 아파 왔다.
평민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는 탓에 예법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황제에게 동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나스타시아, 네 몸 안에 새겨진….”
“잠시만요. 카를.”
그녀는 손을 뻗어 입술을 손가락으로 짚어 카를의 말을 막았다.
카를이 원래 하려던 말은, 저주였다.
학원 앞에서 아나스타시아를 만났을 때 느낀 이질적이고 뒤틀린 마력.
언젠가 겪어 본 것이 있는 것이었다. 정현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에 있었다.
선대 공작이 죽은 원인인 저주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그런데.”
“발설하면 안 되는 종류인가? 대상자가 아닌, 남이어도?”
“…아? 네.”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이 궁금해진 아나스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정한 조건에 이르면 발동하는 저주.’
카를은 아나스타시아가 자신의 말을 막는 것으로 바로 알아챘다.
게임 속에 이미 존재하는 저주의 한 종류였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저주는 ‘말하는 것’ 혹은 ‘표현하는 것’이리라.
저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 단어조차도 꺼내선 안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였지?”
“글쎄요. 제가, 백매화라고 불리게 되었을 때였을까요.”
선황이 예명을 하사했을 때.
카를은 그 시기를 떠올렸다. 선황이 죽기 얼마 전이니, 1년을 조금 넘었다.
“칼리테는.”
직접 물으려던 카를은 도중에 질문을 고쳤다.
칼리테가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냐는 말을 직접 꺼내서는 안 되었으니까.
“칼리테는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알고 있나?”
“모를걸요. 저희가 뭘 하든 간에.”
칼리테조차 모르는 저주.
그런 저주를 어디서 얻었는가, 그것을 묻기 위해 카를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할 텐데, 적당한 장소가 있나?”
“저희 학원이요. 교사랑 학생 대부분이 탄신일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밖에 나와 있을 거예요. 특히, 지하로 내려가면 정말 아무도 몰라요.”
학원의 지하.
대체 칼리아 학원의 지하에 무엇이 있기에 이런 저주가 새겨지는가.
‘펠하임 가문이 세우고 관리하는 학원.’
그런데 정작 그 펠하임 가문의, 소중한 막내딸이 저주에 걸렸다.
경쟁자 제거… 따위도 아니다. 이미 펠하임 가문의 차기 당주는 칼리테라고 해도 무방했다.
‘술자가 있는 건 아닐 테고.’
그러면.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함정에 가깝다.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카를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아는 사람은?”
“당신이랑 저뿐이겠죠?”
“다른 사람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을 테고.”
“네. 당신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 없거든요. 또, 있다고 해도 어차피… 아시죠?”
마법을 활용하는 능력만 따지면 카를보다 탑주들이 훨씬 우위에 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도 가끔씩은 무시하는 그들은 펠하임 가문의 영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사정을 자세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혹시, 남은 기한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마 그리 길진 않을 것 같아요.”
단어를 오랫동안 고심하던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음… 저희 혼약식까지일까요.”
“펠하임 녀석은 내년을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그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길어야 1년.”
이제야 왜 아나스타시아가 게임 내에 등장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었다.
1년이라면 플레이어가 한창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중일 테니, 비중이 작으면 등장하지도 못한다.
당장 카를과 결투를 치른 아담도, 무투 대회가 없으면 시나리오의 1년 차에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으니까.
“따지고 보면 제 삶은 딱 1년 남은 거죠. 그러니까, 여자로서의 삶이요.”
“…….”
“아아, 결혼이라. 듣기만 해도 싫증이 나네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죽음을 결혼으로 말하면서, 그녀는 저주의 조건을 필사적으로 피해서 말했다.
짐짓 여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카를은 그 목소리에서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카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대로 혼약식을 기다릴까요? 아니면, 저를 구해 주시겠어요?”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감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고,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구하고 싶다.
머릿속에서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그런 말들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일단, 방법부터 찾자.’
“아나스타시아. 내가, 그대의 몸에 손을 대어야 할 것 같은데.”
“어머, 제 몸에요?”
“그러니까….”
카를이 말을 끝마치기 전, 그녀는 카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자신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맥을 짚을 필요가 있는 거죠?”
“알고 있었나?”
“나름 공부를 했거든요. 저는 마법사가 아니지만, 마법사들은 맥을 먼저 확인한다고 들었어요.”
두근.
핏줄을 타고 목으로 올라온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카를, 가끔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저랑 당신은 엄연히 약혼을 했어요. 어차피 결혼까지 이어질 텐데, 이 정도는 딱히 문제 되지 않아요. 닳는 것도 아니고.”
아나스타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카를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손이 컸다. 그리고 따뜻했다.
그 온기를 느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저도 약간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상태가 안 좋으면 가슴이 아프거든요. 꼭,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요.”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거죠?
입으로 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눈빛으로 그렇게 물어 왔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가 자리 잡은 위치는 심장.
대상이 된 이에게 ‘제약’을 거는 종류의 저주였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3일.”
카를은 손을 거두면서 단언했다.
이름 모를 주술사가 건 저주라면 시간이 오래 소요될 테지만 그녀는 그 저주를 얻은 곳이 칼리아 학원의 지하라고 명백히 했다.
“학원의 지하에는 아무도 없나?”
“네. 원래도 출입하는 사람은 얼마 없고, 요즘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
주술사가 건 저주가 아니고 함정이라면 저주의 종류는 한정된다. 카를은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공략의 기억을 되짚는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순간,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 확답을 듣지는 못한 것 같은데. 어때요, 카를?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그래.”
달이 구름에 가리었다.
축제가 한참 동안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두웠다.
약간의 찰나. 아나스타시아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같이 갈까요?”
어둠을 틈탄 두 사람은 경비병의 눈을 피해 학원의 담장을 넘었다.
아나스타시아의 손은 카를을 학원의 지하로 이끌었다.
“여기에요. 카를.”
칼리아 학원의 별채.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그 건물의 1층 구석에 숨겨진 계단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햇빛도 달빛도 들지 않아 어둠뿐인 그 복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질퍽.
발에 무엇인가가 밟혔다. 카를의 손을 잡은 아나스타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카를.”
이윽고, 눈앞에 푸른빛이 떠올랐다.
[긴급 퀘스트가 발급됩니다.] [최우선 목표 : 거울의 악마 토벌] [보상 : ???]거울의 악마.
카를은 그 글자를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리테….’
악마는 무생물에 깃든다. 거울의 악마는 그 글자 그대로 거울에 깃들어 악마가 된 존재다.
거울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를 비출 수 있다.
게임에서 나오는 거울의 악마는 토템, 즉 ‘방어용 유닛’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한 거냐.’
무언가를 지키는 악마.
그 악마는 곧,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소리를 흘렸다.
주륵, 주르륵.
검붉은 액체들이 흘러내리면서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어둠 너머로 사람 크기의 인영이 보였다.
한 쌍의 남녀.
너무나도 익숙한 형상이 눈앞에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