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악의 (4)
―마음이 여려서 그래.
아나스타시아의 머릿속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폐쇄되어 쓰이지 않는 학원의 별관.
그 지하로 누군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따라 들어갔을 때의 기억.
―저거 다 가식이야.
목소리가 지독하게 귀에 달라붙었다.
이미 들어 본 목소리였지만 익숙해지는 것 따윈 없었다.
―상냥한 척, 착한 척은 다 하고 있지만.
―실은 너도, 나도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겨.
―정말이니?
―내가 다 봤다니까?
바닥에서 부글부글 핏물이 끓었다.
피거품이 일었고, 곧 그 거품은 입술과 혀가 되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손을 다친 그 아이의 피를 닦아 줬잖아?
―그런데 기숙사에선 이렇게 중얼거리더라.
―짜증 나 죽겠다고. 왜 그런 천한 것과 내가 엮여야 하냐더라.
아나스타시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가짜 목소리라는 건 알지만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아….”
바늘로 찔리는 듯한 따가운 통증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목소리는 곧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상냥한 사람.
―말은 없지만 그걸 알 수 있어.
―어릴 때도 풀로 반지를 엮어서 만들어 줬는걸.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잊지 않아.
핏물이 무리 지어 웃음을 터뜨렸다.
―가식 덩어리.
―실은 관심도 없으면서.
―그 반지도 손가락에 흙이 묻으니까 지저분하다고 버렸으면서.
―차라리 탑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그렇게 생각했던 주제에.
“그건….”
―그런 사람도 사랑하고 있다고.
―그걸 주변에 보여 주고 싶을 뿐이잖아.
―역겨워라.
아나스타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목소리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러는 사이 핏물이 모여들어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랑의 맹약도 가짜였고.
―손수건을 지어 보낸 것도 그냥 가식이지.
―궁지에 몰리니까 사랑을 연기할 뿐이야.
피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반쯤 본능적으로 핏물로 된 인영이 움직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서웠다. 머리가 아팠다. 일전에 느꼈던, 가슴을 찔렸던 통증이 뇌리를 타고 되살아났다.
그녀는.
“악몽에 먹히지 마.”
아나스타시아는, 카를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래.
이건, 악몽일 뿐이다.
현실이 아닌 악몽.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
아나스타시아는 눈을 떴다.
윽, 그녀는 갑자기 눈이 부신 나머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머리에 하고 있었던 수정 머리핀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건.”
마법의 빛이었다.
그녀는 수정 머리핀을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핏덩어리 악마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아나스타시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형태를 한 붉은 피가 울컥대며 꿈틀대고 있었다. 무섭기보다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마법은… 상상력의 발현.”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찾아 읽었던 마법서.
그녀는 그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하얀빛은 그저 손 안에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마법사도 아닌 자신이, 상상력으로 이걸 바꿀 수 있을까.
“……레이피어.”
학원에서 교양으로 배운, 그녀가 다룰 줄 아는 유일한 무기.
그것을 떠올리자 손안의 빛은 저절로 연습용 레이피어의 모습을 갖추었다.
놀랄 새도 없었다. 그 순간에도 악마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어금니를 깨문 채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촤악! 날이 악마의 몸뚱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핏물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허물어졌다.
“별거 아니잖아?”
핏방울이 묻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아나스타시아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까지 저것을 무서워하던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얼떨떨함에 멍하게 서 있었던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복도가 천장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리핀에서 흘러나오던 마력의 빛이 그쳤다.
그녀는 카를부터 찾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카를?”
그녀는 카를을 흔들어 깨웠다. 반응이 없었다.
악몽에 먹히지 말라고 했으면서, 설마 자기가 먹힌 걸까.
그런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카를, 괜찮아요?”
그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카를이 눈을 떴다.
하아. 그는 아나스타시아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시아가 물었다.
“악몽에… 먹히진 않은 거죠? 우리 둘 다?”
“그런 것 같다.”
그의 악몽은 어떤 것이었을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으나 그녀는 묻지 않았다.
악에 받친 얼굴이 된 카를이 어둠 너머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빌어 처먹을 악마 놈이.”
그 목소리에는 증오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놀란 아나스타시아가 뒤로 물러서자 카를은 피 웅덩이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망령된 것의 거짓에 분노하노니. 겨울이시여, 이곳에 도래하소서!”
분노 그 자체를 원동력으로 발동하는 마법.
영창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카를의 주위로 세찬 기류가 돌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핏물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까드드득!
얼어붙은 피바다가 깨져 나갔다.
핏물로써 물리적 형체를 이루는 악마였으니, 그것의 무기를 깨부순 것과 마찬가지였다.
“……!”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의 것이었다.
카를은 그것을 무시하고 복도 구석의 커다란 전신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은빛 거미의 함정.
“결정화.”
거울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과 동시에 악마의 비명 소리가 그쳤다.
카를은 순간적으로 마력을 집중해 아예 거울을 박살 내 버렸다.
“…후.”
그는 숨을 내쉬면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악몽이 끝나기 직전, 악마가 억지로 새겨 넣었던 저주는 사라져 있었다.
카를은 아나스타시아에게 다가갔다. 손목을 짚어 그녀의 심장에 새겨져 있었던 저주도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저주의 술자인 악마가 죽으면서, 저주도 자연스럽게 그 효력을 잃은 것이다.
[최우선 목표 달성!] [보상은 80시간 후에 지급됩니다.] [보상의 내용은 지급과 함께 공개됩니다.]그것을 아예 확신으로 바꾸어 주는 메시지까지.
그것을 확인한 카를이 말했다.
“끝났다. 아나스타시아.”
“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과 카를을 연달아 쳐다보던 그녀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예명에 어울리는, 꽃다운 미소였다.
“고마워요. 카를.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그건 그렇고 아나스타시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저 안에도 들어갔었나?”
박살 난 거울 뒤에 웬 문이 있었다.
발설하는 것을 조건으로 발동하는 저주를 거는 함정까지 설치하면서 숨긴 문.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몰라도, 평범한 것은 아닐 테다.
“아뇨, 들어가지는 못했어요.”
“그런가.”
“그런데… 들어간 사람은 있어요.”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그녀의 말을 들은 카를은 고개를 돌렸다. 아나스타시아는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 이 건물, 별관은 더 이상 안 써서 폐관된 건물이에요. 물론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종종 들어가 보기는 하지만 지하는 잠겨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하로 들어가길래 저도 몰래 따라갔는데….”
“종소리가 울렸고 저주가 새겨졌다는 거군.”
“네.”
설정상 악마를 자유자재로 다뤄서 함정을 만드는 것은 은빛 거미만 가진 능력이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거미를 고용해 함정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돈과 정보, 둘 다 많은 사람은 몇 없다.
그들 중 하나가 칼리테였다. 그는 이미 펠하임 가문의 실권을 쥐고 움직이는 차기 공작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펠하임 가문이 세우고 운영하고 있는 학원이었다. 모든 정황이 칼리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칼리테 펠하임의 비밀이 있다.
카를은 홀린 듯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문고리를 잡아서 돌렸으나, 당연하게도 열리지 않았다.
단순히 잠긴 게 아니라 마법이었다.
감지되는 것만 적어도 셋. 하나는 문 그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고, 나머지 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었다.
“…대체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칼리테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고려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더라도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거울의 악마보다 더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
궁금증이 가라앉자 카를은 문에서 손을 뗐다.
최소한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건… 저희 오라버니가 만든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왜 이런 걸….”
아나스타시아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산산조각 난 거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그때 봤던 사람도 저희 오라버니겠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만든 건지….”
“아니.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왜요?”
“…이런 걸 만들어서 꽁꽁 숨기려고 하는 걸 쉽게 말해 줄 것 같진 않아. 아나스타시아 그대가 칼리테의 동생이라고 해도.”
“으음, 그것도 그렇네요. 이미 저도 함정에 걸렸으니까.”
깨진 거울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이게 깨져 있으면 누가 침입했다는 걸 알아챌 텐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네? 왜요?”
“악마를 소재로 만들어진 함정은 불안정해서 망가지기 쉬워. 마력의 흔적만 지워지면 저절로 부서졌다고 여길 거다.”
“아…! 그럼 마력의 흔적은 언제쯤 지워질까요?”
“하루 정도.”
“며칠 동안은 탄신일 축제 때문에 바쁠 테니까… 끝나고 나서 확인할 테니까 괜찮겠네요?”
휴.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카를… 안에 들어가 볼 건가요?”
“밖으로 나가지.”
칙칙하고 피비린내 나는 지하는 질색이었다. 게다가 악몽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지하에서 걸어 나왔다. 밝은 햇빛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짹짹짹짹― 하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울렸다.
“벌써 아침이네요…?”
아나스타시아가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카를을 향해 말했다.
“카를,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저랑 당신 사이에 약간의 허물? 과한 격식 같은 게 있는데 이제 그런 게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적어도, 저희 둘만 있을 때는요.”
“허물이라면, 어떤?”
“그러니까… 음, 예를 들자면.”
아나스타시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카를의 앞에 섰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카를.”
“…….”
“아… 이건 좀 아니었나요? 악몽에 먹히기 전에, 당신이 저를 친근하게 불렀던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어떨까 해서… 아, 나 왜 이래.”
그녀는 붉게 물든 자신의 얼굴에 대고 손부채를 부쳤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고고한 귀족 영애인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
카를로스가 원래 하던 것처럼 격식을 갖추어 대한 것이었다. 격식이 없다면, 편한 건 자신이었다.
“그래. 안나.”
“…어? 괜찮은 거에요?”
“우리 둘만 있을 때라면.”
“다행이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딱히….”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카를의 말을 낚아챈 아나스타시아가 짓궂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한 거죠?”
“…알고 있었네.”
“말로 사람을 홀리진 않으니까요. 행동이라면 모를까.”
목소리는 여유를 되찾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홍당무였다. 열기를 식힐 요량으로 짤막하게 숨을 내쉰 그녀가 말했다.
“이제 카를, 저를 ‘그대’ 이렇게 딱딱하게 부르는 건 금지에요. 알았죠?”
“…그래.”
“그리고 음… 탄신일 축제 기간 동안 괜히 찔러보는 영애들이 있으면 어울려 주지 말고요. 알겠죠?”
실제로, 약혼자가 있어도 그 약혼자와 사이가 나쁘면 채 가려는 사람이 남녀를 불문하고 존재했다.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는 사람.
그렇기에 아나스타시아는 카를에게 신신당부했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 저희 둘 다 찾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알겠죠?”
“그래, 안나.”
카를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에 보자.”